들리지 않는 진심
11화
속기사가 낭독을 마쳤다. 마지막 문장의 잔향이 법정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맹주원 판사가 고개를 들었다.
“원고 측, 추가 증거 신청 있습니까.”
상대측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판장님, 증거 제201호를 신청합니다. 원고 우상일의 3년 전 이비인후과 진료 기록입니다.”
서이언의 손끝이 수첩 위에서 멈추었다.
우상일을 향해 손을 올렸다. ‘진료 기록’이라는 수어를 천천히 풀어냈다. 왼손을 평평하게 펴고 오른손 검지로 그 위를 두드린 뒤, 귀 옆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청력 검사’라 이었다.
우상일의 오른손 엄지가 왼손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손가락이 살짝 움츠러들었을 뿐인데, 서이언의 시선은 거기에 멈추었다. 통역사석에서 본 원고석의 각도에서는 우상일의 손만 보였다.
“의뢰인의 3년 전 청력 상태와 현재 청력 손실의 인과관계를 입증할 자료입니다.”
상대측 변호사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유재현이 일어났다.
“재판장님, 원고 측 증거 신청에 대해 이의 있습니다. 방어권 보장을 위해 기록 검토 시간을 요청합니다.”
맹주원 판사가 유재현을 바라보았다.
“피고 측,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이의입니까.”
“원고가 사고 이전 청력에 문제가 없었다는 점은 이미 양측이 다투지 않는 사실입니다. 3년 전 진료 기록이 현재 청력 손실 정도와 직접적 연관이 있는지 검토가 필요합니다.”
서이언은 우상일에게 수어를 보냈다. ‘판사님, 변호사님 말씀’이라고 짧게 해석했다.
우상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탁자 위에서 바닥으로, 다시 손가락으로 떨어졌다. 왼손 엄지가 오른손 손가락을 하나씩 만지고 있었다.
“증거 채택합니다.”
맹주원 판사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다만 원고 측 반론 준비를 위해 30분 휴정을 선언합니다.”
서이언은 수첩을 열었다. 볼펜을 집어 들고 오늘 날짜 아래에 빠르게 적었다.
보호구-청력검사-회피
그 옆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전날 밤에 쓴 글씨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유재현 사무실 방문
먹물이 완전히 말라 종이에 스며든 낡은 글자. 그 아래 직선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수첩을 덮었다.
복도로 나왔다.
우상일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명 차폐 장치를 만지작거리며, 벽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유재현이 서이언에게로 다가왔다.
“통역사님.”
존댓말이었다. 법정 대기실 밖이었지만 복도에는 아직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서이언은 그 호칭을 그대로 받았다.
“어젯밤.”
서이언은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가리키는 짧은 수어를 했다. 메시지를 보내고 지우는 동작은 하지 않았다. 유재현의 눈이 그 손을 따라왔다.
“확인했습니다. 알림으로.”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서이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만 지금은 의뢰인과 먼저 대화해야 합니다. 진료 기록 건은 저희도 오늘 알게 된 사항입니다.”
서이언의 왼손이 수첩 쪽으로 내려갔다. 손가락이 수첩 모서리를 짧게 눌렀다.
“우상일 씨는 이 기록에 대해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까.”
“예. 공판 전까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그 부분은 통역사로서 전달할 게 없습니다.”
유재현의 왼손 검지가 오른쪽 커프스 단추를 찾아갔다. 한 번, 눌렀다 놓았다.
“오늘 재판 끝나고 사무실로 와도 됩니다.”
서이언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젯밤에 하려던 말이 뭡니까.”
짧은 침묵.
유재현의 손이 커프스에서 떨어졌다.
“그건 사무실에서 듣겠습니다.”
서이언은 끄덕였다.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복도 창으로 오전 햇살이 길게 깔렸다. 유재현의 어깨 너머로 우상일이 보였다. 이명 차폐 장치를 빼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 손바닥 안에서 가만히 있었다.
유재현이 우상일 쪽으로 걸어갔다.
서이언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복도 반대편 벤치로 발을 옮겼다. 통역사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도시락 가방이 지퍼가 잠긴 채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손가락이 도시락 가방 끈에 닿았다. 천천히, 한 번 감았다가 놓았다.
벤치에 앉아 유재현과 우상일의 대화를 기다렸다. 두 사람 사이로 들어가야 할 통역의 순간을 위해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복도 벤치에서 기다리는 동안 오전 재판이 재개되지 않고 연기된다는 고지가 전달됐다. 서이언은 사무실로 돌아와 메모를 정리했다.
오후 햇살이 사무실 창을 반쯤 가로질렀다. 서이언은 오전 메모를 정리하다 손을 멈추었다. 보호구-청력검사-회피, 세 단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노크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이순자가 문간에 서 있었다. 한 손에 보온 도시락 가방을 들고, 다른 손은 이미 수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 끝나고 오는 길이야. 밥 먹었어?
서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여긴 어떻게…”
이순자는 이미 책상 앞 의자에 앉고 있었다. 도시락 가방에서 세 겹 찬합을 꺼내는 손이 빨랐다. 뚜껑을 열자 김이 올랐다. 마른 반찬 냄새가 법전과 복사지 사이로 퍼져 들어갔다.
서이언의 시선이 찬합 안에 멈추었다. 연근조림, 계란말이, 멸치볶음. 대학 다닐 때 집에 가져가던 반찬과 같은 구성이었다.
이순자는 젓가락을 서이언 앞에 놓으며 손을 올렸다.
요즘 네가 힘들어 보여서.
서이언이 대답하기 전에 이순자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조금 느리게.
아버지도 그렇고…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이순자의 검지와 중지가 약간 구부러진 채 정지했다. 무언가를 막 잡으려다 놓친 모양 같았다.
나도 예전에 네게 못 해준 말이 있었어.
서이언은 젓가락을 든 채 이순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데.”
이순자가 책상 위에 손을 내렸다. 찬합 뚜껑 모서리를 한 번, 두 번 매만졌다.
나중에… 네가 덜 바쁠 때.
가방을 집고 일어나는 동작이 생각보다 빨랐다. 서이언이 의자를 밀며 일어서려는 사이 이순자는 이미 문 쪽으로 두 걸음 걸어가 있었다.
“차라도 한 잔…”
아니다. 밥 식기 전에 먹어라.
문이 닫혔다. 복도 발소리가 멀어졌다. 찬합 위로 김이 가늘게 올라가고 있었다. 서이언은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았다. 밥이 식어도 닫지 않은 도시락 뚜껑이 책상 한쪽에 놓여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오후 여섯 시의 그늘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명근은 목공소 셔터를 내리고 평소 타는 버스 노선 앞에 섰다.
정류장 안내판 너머, 편의점 출입문이 열렸다.
익숙한 뒷모습이 나왔다. 짙은 네이비 수트, 왼손이 커피 컵을 들기 전에 오른쪽 소매 끝을 한 번 확인하는 손끝.
버스 정류장 쪽을 향하던 발걸음이었다.
서명근의 손이 자신의 보청기로 올라갔다. 엄지가 이어폰 몸체를 한 번 더듬었다. 배터리 확인 습관이 아니었다.
그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재현이 고개를 들어 정류장을 바라보려는 순간, 서명근의 발이 반 발짝 물러났다. 이내 몸을 완전히 돌려 골목 쪽으로 들어섰다.
걸음이 빨라지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등 뒤로 버스가 정류장에 서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 여는 소리에 이순자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서명근이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작업복에는 나무 부스러기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오늘 일찍 왔네.
서명근은 소매에 묻은 톱밥을 털다 손을 멈추었다.
피곤하다. 이상하게 몸이 무겁군.
이순자의 손이 질문을 막 시작하려다 중단되었다. 서명근은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이순자는 물을 틀어 손을 씻으며 거실 쪽을 바라보았다. 수도물이 손끝에 닿은 채 몇 초가 흘렀다.
서명근의 방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순자가 수도를 잠갔다. 행주로 손을 닦으며 다시 한 번 거실을 바라보았다. 소파 위, 서명근이 걸쳐 놓은 작업복의 옆 주머니가 약간 부풀어 있었다. 작은 나무 조각 모서리가 천 밖으로 밀려 나와 있었다. 거칠게 재단된 표면이었다.
사무실 시계가 오후 12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이언은 식사를 마친 찬합 뚜껑을 덮었다. 반찬 밑, 찬합 바닥에 접힌 종이가 얹혀 있었다.
뚜껑을 다시 열었다.
손을 넣어 종이를 집었다. 펼치자 이순자의 필체가 나타났다. 손글씨지만, 수어 문법이 묻어나는 어순이었다.
네가 대학에 갔을 때, 아버지가 네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앉아 계셨다.
서이언의 시선이 마지막 글자에 멈추었다.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반대쪽 모서리를 다시 접었다. 다시 펴서 처음과 같은 크기로 접었다.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접은 쪽지를 한 손에 쥔 채, 바깥을 바라보았다. 건물 유리에 오후의 빛이 평평하게 깔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