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들리지 않는 진심

12화

사무실은 어두웠다. 정유진이 스위치를 올리자 형광등이 깜빡이다 푸르스름하게 번졌다. 책상 위에는 어제 미처 정리하지 못한 서류 더미가 흩어져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손가락이 유리문을 따라 내려가다 멈췄다. 세 번째 칸, 법전들 사이에 끼워진 낡은 단체사진. 유재현이 지난번에 집어넣었던 그 자리 그대로였다.

사진을 꺼냈다.

유리창 너머 이른 아침 빛이 사진 위에 얇게 깔렸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유재현이 앞줄에 서 있었고, 그 옆에 여자 하나가 어깨를 약간 기울인 채 서 있었다. 잿빛 도는 흑발을 낮게 묶은 포니테일. 입술을 가볍게 다문 단정한 인상.

서이언이었다.

엄지가 사진 속 유재현의 얼굴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저 무표정한 얼굴로 웃고 있던 시절이 있다니. 지금의 유재현은 절대 이런 사진에 끼지 않는다. 찍더라도 뒤쪽 구석이다.

사진을 뒤집자 뒷면에 볼펜으로 희미하게 적힌 글씨가 보였다. '2012. 5. 법학과 MT.' 잉크가 바래 닳아 있었다.

10년 전이다.

이 사진을 책장 유리문 안에, 그것도 법전 사이에 끼워둔 이유가 그제야 이해됐다. 숨기려는 것도, 버리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둔 거였다.

그리고 이제야 알겠다.

유재현이 지난 4년간 맡은 수어 통역 사건 중 유일하게 통역사를 직접 지정한 게 이번이었던 이유. 그가 왜 이 사건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서이언이 사무실에 처음 왔을 때 유재현의 손이 커프스 단추를 세 번이나 눌렀던 이유까지.

정유진은 사진을 제자리에 끼워 넣었다. 유리문을 닫고, 손바닥으로 유리 표면을 한 번 쓸어 지문을 닦아냈다.

“——묻지 않는다.”

혼잣말이었다. 평소보다 한 톤 낮은 목소리.

의자에 걸어둔 재킷을 집어 들었다. 가방을 어깨에 걸고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9시 12분. 법원까지 오토바이로 20분이면 충분했다.

현관문을 잠그고 복도로 나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한 번 더 사무실 쪽을 돌아봤다.

책장 유리문이 형광등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법정의 공기는 늘 마른 종이 냄새가 났다.

오전 10시 2분. 원고 측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증인 신청서를 제출하겠습니다. 청각 보호구 성능 평가 전문가 이혜원 씨를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맹주원이 신청서를 받아 천천히 넘겼다. 안경줄이 목에 닿아 가볍게 흔들렸다. 그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증인의 직업 이력을 간략히.”

원고 측 변호사가 답했다.

“한국소음진동공학회 정회원이며, 산업용 청각 보호구 적합성 검사 경력이 12년입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자문 의견을 제출한 이력도 있습니다.”

맹주원의 시선이 유재현 쪽으로 옮겨졌다.

“피고 측, 의견 있습니까.”

유재현이 일어섰다. 왼손 검지가 재킷 소매 안쪽, 커프스 단추를 한 번 눌렀다 놓았다.

“증인의 전문성 자체에 이의는 없습니다. 다만 증인 신문 범위가 보호구의 객관적 성능을 넘어, 청력 손실과 보호구의 인과관계 판단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제한해 주십시오.”

“원고 측, 증인 신문 예정 사항.”

“사고 당일 작업장에서 사용된 보호구 모델의 기술적 사양, 동종 보호구의 현장 적합성 테스트 결과, 그리고 보호구가 규정에 맞게 착용되었을 경우의 예상 소음 차단 수치입니다.”

맹주원이 신청서 마지막 장을 덮었다.

“증인의 직업 경력과 신문 예정 사항이 본건 쟁점인 청력 보호구의 성능 및 착용 실태와 직접적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증인 채택을 허가합니다. 다음 변론기일까지 증인 신문 사항을 정리해 제출하도록.”

서이언의 손이 통역을 멈췄다. 우상일을 바라보았다.

증인석 옆, 피고 측 벤치. 우상일의 오른손이 왼손을 쥐고 있었다. 손가락이 주먹 안에서 쥐어졌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명 차폐 장치를 낀 귀 쪽은 뻣뻣하게 굳은 채, 시선은 맹주원의 책상 위에 얹힌 신청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이언은 수첩을 열었다. 볼펜을 집어 들다 멈칫했다. 이미 적혀 있는 어제의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보호구-청력검사-회피.

볼펜을 내려놓고 수첩을 덮었다.

유재현이 재판장을 향해 목례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동작 사이로, 그의 눈이 우상일의 굳은 손을 훑고 지나갔다. 1초. 그 시선이 서이언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맹주원이 다음 기일을 지정하며 법정을 마무리했다.

서이언은 통역을 위해 다시 손을 올렸다. 우상일의 수어는 여전히 오른손이 왼손을 쥔 채였다.

휴정 선언 후 복도는 절차에 따라 고요해졌다. 우상일이 증인석에서 내려와 경비원을 따라가는 뒷모습을 잠시 보았다. 무릎 높이에서 손을 멈췄다 내린 그 동작이, 변론기일 내내 보호구 너머로 보여준 경직과 같은 결을 띠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가방을 챙겨 복도로 나왔다. 잠시 후 유재현이 법정 문을 밀고 걸어나왔다. 구두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가, 내 두 걸음 뒤에서 멈추었다.

“서이언 통역사님.”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늦추었다.

“의뢰인의 진술 태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내가 돌아섰다. 유재현은 왼손에 서류 가방을 쥔 채 오른손 검지로 커프스 단추를 누르고 있었다.

“통역사로서 한 말씀입니까.”

“관찰자로서 한 말입니다.”

나는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

“통역사는 관찰한 것을 말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분석은 변호인의 몫이죠.”

유재현의 손이 커프스에서 떨어졌다.

“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증인이 특정 수어에서 머뭇거리는 패턴을 포착하셨습니까.”

복도 끝에서 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잠시 우상일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보호구 착용 해제 시점에 관한 수어에서 왼손이 지연됩니다. ‘벗다’ 동작이 중간에서 멈추고, 시선은 왼쪽 아래로 고정됐습니다.”

유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통역사로서 기록한 바를 전달했을 뿐입니다.”

내 목소리가 의도보다 단단하게 나왔다. 유재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십 년 전, 내가 무언가를 감추려 할 때마다 보이던 반응이었다.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복도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정유진이 변호사 라운지 문간에 서 있었다. 손에는 종이컵 두 개.

“선배님, 커피.”

정유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유재현에게 다가와 컵을 건네고, 나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통역사님도 드실래요?”

“괜찮습니다.”

정유진의 시선이 유재현과 나 사이를 한 번 오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더 묻지도, 머물지도 않았다. 라운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문간에서 잠시 멈추는 듯했지만, 이내 문이 닫혔다.

재개된 법정은 이혜원의 증인 채택 절차만 남아 있었다. 공장 보호구 성능 인증 기관의 연구원. 그녀는 증인석에서 필요한 답변만을 건조한 어조로 풀어냈다.

서류를 두드리는 소리, 판사의 확인 질문, 속기사의 키보드 리듬.

모든 절차가 끝나고 판사가 다음 기일을 고지했다. 법정 경위의 “전원 기립” 소리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상일이 먼저 퇴정하는 뒷모습이 보였다.

변호사석에서는 정유진이 파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유재현이 서류 가방을 챙겨 일어서는 옆에서, 그녀가 짧게 말을 던졌다.

“서 통역사, 꽤 유능한 분이네요.”

유재현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정유진은 서류 마지막 장을 끼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검지가 종이 모서리를 한 번 쓸었다.

“나는 주차장으로 먼저 갈게요. 사무실에 두고 온 자료 마저 정리해야 해서.”

“……그래.”

두 번째 같은 대답. 정유진은 노트북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녀가 지나가는 바람에 내 어깨 쪽으로 희미한 레몬 향이 스쳤다.

나는 통역사 배지를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고 법정을 나섰다.

법원 현관의 유리문을 밀고 나가자 오후의 빛이 대리석 계단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공기만 무거웠다.

가방에서 버스카드를 꺼내려던 손이 멈췄다.

“잠시만.”

유재현이 계단을 내려와 내 옆에 섰다. 서류 가방을 바꿔 쥐느라 커프스가 접힌 채였다.

“내일 작업장에 같이 갑시다. 사고 현장과 장비를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제 통역이 필요한 건가요.”

“현장에 당신이 필요합니다.”

말이 짧았다. 십 년 전 그가 쓰던 문장의 호흡과 같았다. 나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진동 알람이 내일 아침 일곱 시로 맞춰져 있었다.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아침 아홉 시. 작업장 정문 앞.”

손목시계를 놓고 유재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넥타이 핀이 오후 햇살에 반짝였다. 왼손 검지가 커프스 단추로 향하려다 멈추었다.

“알겠습니다.”

유재현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한 마디를 삼킨 모양이었다. 그가 먼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오늘 적은 메모는 세 줄뿐이었다.

보호구-청력검사-회피. 작업장. 내일 아홉 시.

수첩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며 손끝을 폈다 오므렸다. 통역이 끝난 날이면 늘 하던 작은 습관이었다. 손끝에 남은 긴장을 털어내는 동작.

오늘은 그 동작이 평소보다 길어졌다.

사진을 꺼냈다.

유리창 너머 이른 아침 빛이 사진 위에 얇게 깔렸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유재현이 앞줄에 서 있었고, 그 옆에 여자 하나가 어깨를 약간 기울인 채 서 있었다. 잿빛
들리지 않는 진심1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