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15화
법정의 공기는 늘 마른 종이 냄새가 났다. 통역석에 앉아 손목시계를 한 번 만졌다. 진동 알람은 꺼둔 지 오래였다.
맹주원 판사가 목을 가다듬었다.
“증인, 원고 측 반대신문을 계속하겠습니다. 사고 당일 보호구를 벗은 상황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십시오.”
우상일이 증인석에서 천천히 손을 올렸다. 수어가 시작되었다.
그날…… 작업 끝나고……
오른손이 오른쪽 귀로 올라갔다. 왼손이 왼쪽 귀를 향했다. 귀마개를 벗는 동작.
그 순간이었다.
오른손 검지가 공중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귀에서 손이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 손가락 끝이 진동하듯 흔들렸다. 우상일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자신의 떨림을 인지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무릎 위 수첩을 펼쳤다. 펜 끝이 종이에 닿았다.
보호구 — 회피 패턴 — 시차.
글씨는 작고 빨랐다. 떨림을 본 순간과 펜이 움직이기까지, 한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우상일의 손이 진술을 이어갔다.
……그리고 기계 쪽으로……
통역을 시작했다.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떨림은 통역하지 않았다. 통역사는 관찰한 모든 것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니까.
수첩을 조용히 덮었다. 표지가 무릎 위에서 살짝 들렸다 내려앉았다.
유재현이 변호인석에서 일어났다. 왼손 검지가 오른쪽 커프스 단추를 한 번 눌렀다 놓았다.
“증인, 사고 전 안전교육 이수 기록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서류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작년 9월 27일, 전 사업장 안전교육이 있었습니다. 증인은 이수자 명단에 서명하셨습니다. 맞습니까.”
우상일의 손이 올라왔다.
네…… 맞습니다.
“교육 내용 중 청각 보호구 착용에 관한 부분을 기억하십니까.”
기억…….
손이 멈칫했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유재현이 서류를 내려놓고 다음 장을 넘겼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법정에 작게 퍼졌다.
“사고 당일 작업량을 확인하겠습니다. 오후 네 시 십 분 이후, 증인의 작업 일지에는 다섯 건의 가공 기록이 있습니다. 이 작업들을 기억하십니까.”
우상일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날은…….
입술을 달싹였다. 수어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날은 일이 많아서…… 기억이……
오른손이 내려갔다. 왼손이 오른손을 감쌌다.
유재현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물었다.
“증인, 기억나지 않는 날이 유독 사고 당일뿐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류를 한 장, 다시 한 장 넘겼다. 손동작은 느리고 정확했다.
“9월 교육은 기억하십니다. 10월 초 작업량도 기억하십니다. 사고 이틀 전 보호구 점검 기록에 대해서도 진술하셨습니다.”
서류 더미를 가지런히 모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사고 당일만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우상일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왔다.
기억…….
오른손 검지가 관자놀이를 향했다. 기억이라는 단어를 만드는 손이 중간에서 멈추었다.
나는…….
손가락이 굽어졌다. 주먹도 아니고 펴지도 않은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정확히…….
더 이상 수어가 이어지지 않았다.
우상일의 손이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손등이 위를 향했다. 손가락 사이로 굳은살이 보였다.
맹주원이 증인석을 바라보았다.
“증인, 답변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우상일은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손이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통역석에서 마이크를 당겼다.
“증인, 답변을 보류하고 있습니다.”
내 목소리가 법정에 울렸다. 우상일의 침묵을 그대로 옮겼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맹주원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의 상태를 고려하여 20분간 휴정을 선언합니다.”
법정 모퉁이의 시계가 오전 11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복도 자판기 앞.
캔커피 하나를 뽑았다. 캔이 떨어지는 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렸다. 따뜻했다. 손바닥으로 캔을 감쌌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폈다.
보호구 — 회피 패턴 — 시차.
볼펜을 꺼내 ‘회피 패턴’ 옆에 작은 물음표를 추가했다. 펜을 든 손이 잠시 멈추었다.
시차가 의미하는 것. 사고 당일의 기억만 존재하지 않는 패턴. 그리고 증인석의 떨림.
수첩을 접었다.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멈추는 소리였다. 고개를 들지 않았다. 캔을 자판기 옆 선반에 내려놓고 가방을 열었다.
구두 소리가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유재현이 거기 서 있었다. 서류 가방을 든 손이 옆구리에 붙어 있었다. 수첩을 보지 않았다. 펜을 쥔 내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의 무게가 손끝에 닿았다.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지퍼를 잠갔다. 어깨에 가방을 걸었다.
“저……”
유재현의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반 박자 늦은 첫음.
걸음을 옮겼다. 자판기 앞을 떠나 복도 반대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구두 소리가 내 뒤에서 따라오지 않았다.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손끝이 아직 펜을 쥔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주먹을 폈다 쥐었다. 관절이 가볍게 소리 냈다.
모퉁이를 돌았다.
유재현은 그 모퉁이를 바라보았다. 서이언의 뒷모습이 사라진 지점을. 가방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섯 초, 그대로 서 있었다.
발걸음을 돌렸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왼손 검지가 오른쪽 커프스를 찾았지만, 단추를 누르지 않고 멈추었다.
복도에 두 사람의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복도에서 사무실로 걸어오는 유재현의 발걸음은 느렸다. 왼손 검지가 소매 단추를 두 번 눌렀다 떼었다. 사무실 문을 열자 우상일이 창가에 서 있었다.
유재현은 대기실을 가리켰고, 우상일이 먼저 들어갔다. 유재현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 “의뢰인 자격으로 면담을 요청합니다.”
법원 의뢰인 대기실. 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유재현은 문을 닫고 우상일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상일의 손이 탁자 위에 올라와 있다가, 천천히 무릎 쪽으로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유재현의 손이 올라왔다. 수어였다.
사고 당일 아침, 집에서 나서기 전에 뭘 마셨습니까.
우상일의 어깨가 굳었다. 두 손이 탁자 아래로 완전히 사라졌다. 유재현은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음 기회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저한테만 말하십시오.”
우상일의 숨소리가 탁자 위를 가로질렀다. 거칠고 짧은 호흡. 탁자 아래로 감춘 손이 옷자락을 쥐는 소리가 났다.
“음…….”
우상일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수어도, 음성도 아닌 신음이 새어나왔다. 유재현은 기다렸다.
탁자 아래서 손이 올라왔다. 떨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우상일의 손가락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게 전부였다. 유재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정으로 돌아가십시오. 3분 남았습니다.”
우상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유재현의 얼굴을 똑바로 향했다. 거기에는 더 이상 도망가려는 기색이 없었다. 유재현이 문을 열었다. 복도의 형광등 불빛이 대기실 바닥으로 밀려들어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9민사부 법정.
오전 11시 30분. 휴정이 끝나고 법정이 재개되었다. 방청석 뒤쪽의 문이 닫히고, 속기사의 손이 키보드 위에 놓였다. 나는 통역사석에 앉아 수첩을 왼쪽으로 밀어두었다.
“증인, 신문을 계속하겠습니다.”
맹주원 판사의 목소리가 법정의 마른 공기를 가르며 떨어졌다. 유재현이 변호인석에서 일어났다.
우상일이 증인석에 섰다. 휴정 전보다 어깨가 덜 경직되어 있었다. 대기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사람은 도망가지 않기로 한 얼굴이었다.
유재현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증인은 사고 당일,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었습니까.”
내 손이 올라갔다. 수어로 옮겼다. 우상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쓰고 있었습니다.
내 목소리가 법정에 울렸다. 평소보다 반 박자 빠르게, 나는 우상일의 손동작을 음성으로 옮겼다. 그가 숨을 들이쉬는 템포, 손가락이 약간 느려지는 지점까지 십 년의 경험은 정확히 따라갔다.
“사고 당시 보호구가 벗겨진 경위를 설명해 주십시오.”
유재현의 질문에 우상일의 오른손이 멈칫했다. 왼손 엄지를 감싸쥐는 동작. 그 손이 무릎 높이까지 내려가려다가, 다시 올라왔다.
피곤했다.
손가락이 이마를 짚었다.
내 실수다.
내 손이 따라 움직이다가, 한 템포 늦어졌다.
“피곤했습니다. 제 실수입니다.”
내 목소리를 내 귀가 들었다. 통역석의 마이크가 내 숨소리를 받았다. 우상일의 손이 이제 무릎 위에 내려와, 떨림 없이 포개졌다.
유재현의 시선이 증인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이상입니다.” 맹주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기록을 확인했다. 방청석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포갰다. 손끝이 차가웠다. 입술을 다물고 증인석을 바라보았다. 우상일의 아내 이혜원이 방청석 맨 끝에서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었다.
우상일의 손이 증인석 난간에서 떨어졌다. 마지막 남은 떨림이 손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