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16화
법정 복도에서 맹주원의 호출 메모를 받았다. 참여관실 사무관이 건넨 쪽지에는 ‘휴정 종료 후 집무실로’라는 짧은 문장뿐이었다. 수첩을 가방에 넣고 복도 끝 계단을 올랐다.
3층 집무실 문 앞. 노크를 두 번 했다.
“들어오도록.”
맹주원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 향이 먼저 와 닿았다. 맹주원은 탁자 앞에 앉아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찻물이 찻잔에 떨어지는 소리가 방 안의 유일한 소리였다.
“문 닫아 주게.”
내가 문을 닫자 그가 턱짓으로 블라인드를 가리켰다. 나는 창가로 걸어가 블라인드 끈을 당겼다. 반쯤 내려간 블라인드가 복도 쪽 유리창을 가렸다. 법정 복도의 형광등 빛이 가늘게 잘려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앉아.”
찻잔 하나가 내 앞으로 밀려왔다. 나는 가방을 의자 옆 바닥에 내려놓고 앉았다. 찻잔을 감싸쥐었다. 사기 그릇의 온기가 손바닥에 번졌다.
맹주원이 자신의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목에 걸린 안경줄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목에 붙은 병원 진료 스티커가 소매 사이로 보였다.
“내가 보청기를 끼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한 적 있나.”
나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뵌 날부터.”
“질문하지 않았지.”
“개인적인 일입니다.”
맹주원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웃음 같기도 했지만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판사가 청력에 문제가 있는데 수어 통역 공백에 집착한다. 충분히 이상하게 볼 수 있는 지점인데, 물어보지 않더군.”
나는 찻잔을 조금 더 세게 감쌌다.
“통역사가 판사님께 질문하는 것도 보기 드문 일일 겁니다.”
“보기는 드물지. 그래도 없는 건 아니야.”
맹주원이 등을 의자에 기댔다.
“20년 전이야. 내가 아직 배석판사였을 때, 한 민사 사건을 방청한 적이 있네. 당사자 중 한 명이 청각장애인이었어. 그런데 통역사 배정이 늦어졌다.”
나는 손가락에서 힘을 뺐다.
“법정은 개정 시간을 지켜야 했고, 결국 통역 없는 상태에서 증인 신문 일부가 진행됐네. 그때 방청석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증인의 진술을 제대로 듣지 못한 당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법정 경위가 그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의자가 넘어졌다.”
맹주원은 찻주전자를 다시 집어 들지 않았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고꾸라진 의자가 내 뒤통수를 강타했고, 결과적으로 이쪽 귀의 청력을 거의 잃었네.”
그가 왼쪽 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 쳤다. 건조한 소리가 났다.
“사고 자체는 그걸로 끝이었어. 문제는 이 귀를 잃은 것보다, 내가 그 방청객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그의 목에 걸린 안경줄을 바라보았다. 중간쯤 변색된 부분에 형광등 빛이 닿아 흐릿하게 빛났다.
“그 방청객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청각장애인 당사자는 통역 없는 법정에서 완전히 배제된 상태였고, 그걸 보다 못한 가족이었어. 나는 그 가족의 입장을 충분히 알면서도 침묵했다.”
찻잔의 열기가 내 손끝에서 빠져나갔다. 맹주원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그 재판은 원고 패소로 끝났네. 증인의 핵심 진술이 통역 없이 진행되어 기록에 남았고, 상고심에서도 뒤집히지 않았다. 통역 공백이 판결을 결정짓는 장면을 나는 두 눈으로 보고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로 법원에 남으셨군요.”
“남은 게 아니라,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수어 통역 절차를 바꾸는 거였어.”
맹주원이 의자에서 일어나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속기록에 수어 통역 내용을 별도로 기록하게 하고, 통역사 선서 절차를 증인 선서 전에 배치하며, 통역 오류 가능성을 교차 검증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지금 자네가 앉아서 일하는 그 자리도 그렇게 만든 거야.”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맹주원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자네는 내가 죄책감에 움직였다고 생각하겠지. 그럼 그렇게 해도 좋아. 틀린 말은 아니니까.”
책장 아래 서랍에서 그가 두꺼운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내 청력 손실은 오래전 일이고 나는 그걸로 이미 속죄할 방법을 찾아서 살아왔어. 그래서 보청기는 내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일 뿐이다.”
책상으로 돌아와 내 앞에 서류 봉투를 내려놓았다.
“여기 있는 건 20년 전 그 사건의 재판 기록 사본이야. 원본은 보존 기간이 지나 폐기됐고,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보관해 온 거다.”
봉투는 연한 갈색이었다.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나는 봉투를 집어 들지 않았다.
“왜 저에게.”
“우상일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통역 공백이 한 번이라도 생기면 이걸 열어보도록 하게.”
손끝이 봉투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이게 없다면 자네는 자신이 중립적이라고 믿을 테니까. 중립은 통역사의 덕목이지만, 때로는 책임을 외면하는 가장 편리한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용도일세.”
나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종이가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증거로 사용할 순 없습니다. 사본이고, 20년 전 사건이고, 우상일 사건과 무관합니다.”
“그래. 증거가 아니라 거울이야. 통역사로서 자신의 손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확인하는 거울.”
내가 봉투를 가방에 넣자 맹주원이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가지 당부하겠네. 그 봉투를 유재현 변호사에게 보여주거나 말하거나 하지 말게.”
왼손이 가방 끈을 움켜쥐었다.
“그 변호사는 자네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 같아서 하는 말이야.”
맹주원은 이미 차가운 찻잔을 정리하며 일어서고 있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다음 공판 준비나 하게.”
나는 잠시 집무실 문 앞에 서서 손에 쥔 봉투의 무게를 가늠했다. 맹주원의 마지막 말이 아직 허공에 맴돌았다. 발걸음을 옮겨 복도로 나왔다.
법원 복도는 비어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긴 복도 끝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대리석 바닥에 옅은 직사각형을 그렸다.
나는 벤치에 앉았다. 맹주원에게서 받은 재판 기록 사본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두꺼운 서류 뭉치의 무게가 허벅지를 눌렀다. 수첩을 가방에서 꺼내 펼쳤다.
볼펜을 쥔 손이 멈칫했다.
맹주원의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침묵을 통역하지 않았습니다. 이십 년 동안 그 문장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사람. 자신의 중립이 누군가의 진심을 지워버렸다고 믿는 사람.
나는 수첩의 빈 줄에 볼펜을 댔다.
진심이 전달되지 않았을 때의 시간
글씨가 평소보다 작았다. 획 끝에 힘이 빠져 있었다. 볼펜을 든 채로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십 년 전.
대학 실습실. 유재현이 시험관을 들고 서 있었다. 내가 수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에게 어떤 진심도 전달하지 않았다. 전달할 기회를 스스로 지웠다.
그 침묵이 내 것이었는데, 나는 십 년 동안 그가 떠난 것만 기억했다.
손끝이 약간 저릿했다. 볼펜을 쥔 검지와 중지 사이의 굳은살이 종이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을 멈추지 않고 다시 펜을 움직였다.
침묵도 선택이다
두 줄이 수첩 위에 나란히 놓였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나는 복도 저 끝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빛의 직사각형이 조금 더 길어져 있었다.
서류 뭉치를 정리했다. 우상일 사건 자료를 연대순으로 가지런히 포갰다. 보호구 지급 기록. 소음 측정 보고서. 근무 일지 사본.
손이 주머니 속 전화기로 내려갔다.
유재현의 번호는 저장되어 있었다. 사건 배정 후 업무 연락용으로 교환한 번호. 나는 액정을 켜지 않고 전화기의 모서리를 엄지로 쓸었다.
맹주원은 말했다. 통역의 책임을 상기하십시오. 나는 지금 그 책임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중이었다. 진심을 전달하는 일인가, 아니면 침묵조차 정확히 전달하는 일인가.
전화기를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았다.
수첩을 덮었다. 서류를 가방에 넣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복도 끝 창문의 빛이 한 뼘 더 이동해 내가 앉았던 자리를 비추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전화기의 진동이 한 번 울렸다. 일정 알림이었다. 다음 변론 준비. 1주일 후. 나는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 손을 떼고 복도를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