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17화
저녁 일곱 시가 훌쩍 넘었다.
유재현이 사무실 책상 앞에 멈춰 섰다. 형광등 푸른 빛이 번지는 천장 아래, 서류 더미가 세 줄로 정렬해 두었다. 3년 차 소송 기록. 5년 차 조정 자료. 7년 차 파기환송 건.
모니터 옆에는 정유진이 두 시간 전 퇴근하며 붙인 포스트잇. 내일 아침 증인 소환장 확인할게요. 선배는 좀 가세요. 유재현은 그 쪽지엔 눈길도 주지 않고 서류함을 열었다.
맨 아래 칸. 10년 차 라벨 폴더 뒤에 봉투가 끼어 있었다.
목공소용 연한 갈색 봉투. 접착면은 누렇게 변색됐고, 봉인 스티커 위로 10년 전 사무실 우편 날인이 희미했다.
유재현의 손이 멈췄다.
왼손 검지가 오른쪽 커프스 단추를 한 번 눌렀다 떼었다.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눕혔다. 접착면을 뜯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안에는 두 가지. 낡은 쪽지 한 장과 소형 녹음 테이프 하나.
"……."
유재현은 쪽지를 먼저 집었다. 종이는 얇았다. 세로로 두 번 접힌 자국이 선명했다. 펼치자 연필 손글씨가 드러났다. 획의 굵기가 고르지 않았다.
그녀를 떠나보내 주십시오. 더 나은 삶을 살게.
서명은 없었다. 하지만 글씨를 아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서명근의 친필. 공사장 자재 명세표 숫자들, 현장 소음 측정표 하단 서명과 같은 손이었다.
턱 선이 굳었다. 눈썹 사이가 좁혀졌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쪽지를 든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녹음 테이프는 손바닥 안에 쥐었다. 재생하지 않았다. 그때 사무실 유리문이 열렸다. 돌아온 정유진이 입구에 서 있었다. 손에는 편의점 봉투 두 개. 그녀의 시선이 곧장 유재현의 얼굴에 멈췄다.
"선배."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 손이 평소보다 느렸다.
"얼굴이 왜 그래요."
정유진이 책상 쪽으로 걸어왔다.
"잠깐 나갔다가…… 텐션이 완전 달라졌네."
편의점 봉투를 자기 책상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서두르지 않고, 유재현의 테이프 쥔 손과 책상 위 쪽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유재현이 입을 열었다.
"이걸 왜 숨겼을까."
정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다. 숨긴 게 아니라…… 말할 수가 없었다."
혼잣말 같았다. 법정에서 증거를 정리할 때처럼 낮고 또박또박했지만, 문장 사이에 간격이 있었다.
정유진이 쪽지 쪽으로 턱을 까딱했다.
"그분 아버님…… 서명근 씨?"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움직임이었다. 끄덕임이 멈춘 뒤에도 시선은 쪽지에 붙어 있었다.
정유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언제 받은 건데요."
"10년 전."
"아까 서류 정리하다가."
"그래."
자기 책상 모서리에 기대서며 팔짱을 꼈다. 유재현의 옆얼굴을 보며 3초쯤 침묵이 지났다.
"그걸 지금 꺼낸 이유가 있죠."
유재현은 쪽지를 집어 들었다. 접힌 자국을 따라 다시 반으로 접었다. 손동작은 느렸지만 정확했다.
"이걸 계기로 그녀가 알게 될 거야."
"'그녀'가 누군지는 묻지 않을게요."
짧게 웃었다. 웃음기 없는 입꼬리였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유재현이 고개를 약간 돌렸다. 눈만 정유진 쪽으로 움직였다.
"그 쪽지 내용…… 지금도 유효한 거예요?"
정적.
"됐어요. 묻지 않을게요."
정유진은 기대고 있던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편의점 봉투에서 캔커피 하나를 꺼내 유재현 책상 구석에 내려놓았다. 캔 바닥이 나무에 닿으며 무거운 소리를 냈다.
"뜨거운 커피예요. 식기 전에 마셔요."
자리로 돌아가 노트북을 열고 모니터 전원을 켰다. 키보드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규칙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유재현은 접은 쪽지를 봉투에 다시 넣지 않았다. 책상 위, 모니터 옆에 그대로 두었다. 녹음 테이프도 그 옆에 내려놓았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정유진이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거 월요일에 갈아 달라고 해야겠네."
커피 캔은 따지 않았다.
같은 시각.
서이언은 부모님 집 거실에 앉아 있었다.
이순자가 외출한 지 20분쯤. 이웃 할머니에게 반찬을 전해주러 간다고 했다. 식탁 위에는 랩을 씌운 멸치볶음과 깻잎장아찌. 랩 표면에 김이 서려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서이언은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거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TV 아래 수납장. 벽에 걸린 가족사진. 그리고 책장.
책장은 거실 안쪽 벽에 붙어 있었다. 유리문 달린 삼단 서가. 위쪽 칸에는 수어 교재와 농인 인권 관련 자료집이 빼곡했다. 중간 칸에는 가족 앨범과 오래된 잡지들. 아래 칸 세로 바인더들 사이에 무언가 끼어 있었다.
무릎을 굽혀 아래 칸을 들여다보았다.
바인더와 바인더 사이. 작은 수첩 한 권. 표지는 진한 밤색 가죽. 때가 타서 군데군데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서이언은 손을 뻗어 수첩을 빼냈다.
표지를 열자 첫 장에 글씨가 있었다.
수어로 쓰인 이름. 서명근.
아버지의 수어 표기였다. 오른손을 펴서 이마에 댄 후 가슴 앞으로 내리는 동작을 그린 작은 그림 아래에, 연필로 또박또박 쓴 낱말.
서이언은 책장 앞에 앉았다. 거실 바닥이 차가웠다. 장판 마감선이 정강이에 닿았다.
두 번째 장. 내지에는 손으로 그린 듯한 수어 그림들이 빼곡했다. 검지와 중지를 세워 동작의 진행 방향을 나타내는 화살표. 얼굴 표정을 그려 넣은 동그라미들. 그림 옆에는 짧은 글이 연필로 적혀 있었다.
오늘 이순자가 처음으로 내 수어에 웃었다. 작업장에서 새로 온 사람이 내 손을 보고 놀랐다. 목공 하는 손 맞냐고. 이언이가 옹알이를 시작했다. 손을 내미니까 내 손가락을 그냥 잡았다. 나는 소리가 없는 대신 이걸 줄 수 있다.
한 장을 넘겼다. 종이의 가장자리가 약간 눅눅했다. 오래된 습기 자국.
이언이가 초등학교에 갔다. 선생님이 부모님 통역을 시키지 말라고 했다. 애가 다 큰다. 이순자랑 싸웠다. 내가 수어 모임에 너무 자주 간다고. 오늘은 작업장에서 사고가 날 뻔했다. 기계 소리를 못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느려졌다. 한 줄 한 줄 읽기 시작했다.
이언이가 대학에 붙었다. 법대라고 했다. 통역사가 되겠단다. 이제는 다 컸네. 오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친구를 만났다. 우리 집에 왔었다. 유재현.
숨이 반 박자 늦게 들어왔다. 수첩의 무게가 갑자기 손목에 걸렸다.
좋은 아이였다. 내가 좀 무서웠나 보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이순자한테 말했더니 표정이 이상했다. 딸이 농인 부모랑 사는 걸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고.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하지 못했다.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눈을 감았다 떴다. 거실 유리창 너머로 해가 완전히 저물고 있었다. 바깥 가로등 불빛이 창문 아래에 얇게 깔렸다.
종이를 넘겼다. 연필 글씨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내가 부탁했다. 그 친구한테.
서이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우리 딸을 놓아 달라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 그날 밤 이순자가 물었다. 뭐라고 했냐고. 나는 말했다. 할 말은 다 했다고. 그 말이 맞았다. 그 아이는 진짜로 떠나주었다. 이언이가 밥을 안 먹고 방에서 안 나왔다.
이순자가 조용히 울었다. 나는 작업장에 더 오래 있었다. 아무 소리도 안 나는 작업장이 좋았다.
그 다음 장은 손가락 자국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같은 문장이 여러 번 적혀 있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연필심이 점점 굵어지다 마지막 줄에서는 심이 부러져 획이 갈라져 있었다.
서이언은 수첩을 덮지도, 다음 장을 넘기지도 못했다. 손가락이 종이 위에 얹힌 채 그대로 멈췄다. 엄지가 연필 자국의 패인 홈을 느끼고 있었다. 종이가 움푹 파인 깊이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신발을 벗는 소리. 봉지를 내려놓는 소리. 이순자의 발걸음이 거실 쪽으로 다가왔다.
서이언은 수첩을 닫았다. 커버를 덮는 데 평소보다 반 박자 더 걸렸다. 가방 지퍼를 잠그는 소리가 났다. 이순자가 거실로 들어왔을 때, 서이언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왜 어둡게 있어."
이순자가 등을 켜며 수어했다. 손동작이 컸다. 다른 한 손에는 빈 반찬 통.
서이언이 손을 올렸다.
"좀 피곤해서."
"밥은 먹었어."
이순자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 외출 후 약간 상기된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곧 먹을게요."
짧게 답했다. 손가락이 평소보다 덜 펴졌다.
이순자가 식탁 위 반찬 통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랩을 씌운 접시들을 넣었다. 냉장고 안의 불빛이 얼굴을 한순간 비췄다. 등을 보인 채로 다시 수어했다.
"아버지 오늘 야근 안 하셔. 곧 들어올 거야."
서이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방 지퍼가 닫힌 쪽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을 포갰다.
"차라도 마실래."
이순자가 몸을 돌렸다. 서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평소와 거의 똑같은 손동작. 다만 손가락이 내려가는 속도가 약간 느렸다. 이순자는 그 차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며 다시 등을 보였다.
가스레인지 불이 켜지는 소리.
서이언은 손을 가방 위에 그대로 두었다. 가죽 너머로 수첩의 모서리가 손바닥에 닿아 있었다. 아버지의 연필 자국이 남은 종이. 같은 문장을 세 번 쓴 페이지. 부러진 심의 흔적.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더 나은 길을 열어주려고.
"엄마."
입이 열렸다.
이순자가 몸을 반쯤 돌렸다. 수도꼭지 소리가 멈췄다.
"아빠 서류 정리하다가……."
말을 멈췄다. 이순자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서이언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아니다."
손을 내렸다. 가방 위에 포갰던 손이 풀어졌다.
"그냥…… 다음에."
이순자는 잠시 멈춰 섰다. 찻잔 두 개를 쟁반에 올리며 천천히 수어했다.
"네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문장이 끝나기 전에 서이언이 일어났다.
"다음에요."
짧았다. 손가락이 약간 경직되어 있었다. 이순자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손끝이 움찔했지만, 서이언은 이미 가방을 들고 방 쪽으로 몸을 돌린 뒤였다.
아버지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었다.
그 침묵은 적극적인 개입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십 년 동안 거실 책장 아래 칸에 꽂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변색되어 갔다.
주전자에서 김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순자가 찬장에서 찻잔 두 개를 꺼냈다. 잔 바닥이 선반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서이언은 가방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가락 끝이 약간 저릿했다.
"이언아."
등 뒤에서 이순자의 목소리. 수어가 아니었다. 입술로 만든 소리.
서이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