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들리지 않는 진심

18화

사무실 유리문 너머로 불이 켜져 있었다.

서이언은 복도에 멈춰 섰다. 가방 끈이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유재현의 사무실. 14층.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부터 손끝이 차가웠다. 아버지의 수첩이 가방 안에 있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그 문장이 손바닥에 닿은 종이의 감촉처럼 생생했다.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하지 않았다.

손잡이를 돌렸다. 잠겨 있지 않았다.

유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책상 위에는 봉투가 열려 있었다. 연한 갈색. 목공소용 봉투. 그 옆으로 접힌 쪽지 한 장. 그리고 소형 녹음 테이프.

서이언의 시선이 탁자 위로 내려갔다.

유재현의 손이 커프스 단추로 가다가 멈췄다.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의 그림자가 책상 위로 길게 누워 움직임을 삼켰다. 테이블 램프 불빛이 서류 더미 옆으로 번져 봉투의 갈색을 한층 짙게 물들였다. 공간 전체가 어떤 온도를 상실한 채 멈춰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만 규칙적으로 박자를 쳤다.

유재현은 숨을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시선은 서이언의 손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쪽지를 집어드는 손가락 끝, 그 아래로 비치는 형광등 빛. 그는 손목시계의 초침이 한 바퀴 도는 동안 깜빡이지 않았다.

찻잔 속 커피는 이미 식어 표면에 얇은 기름막이 생겨 있었다. 그가 이 사무실에서 맞이한 어떤 재판보다도 긴 침묵이었다. 변호사 생활 이십 년 동안, 그는 침묵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지금 이 침묵은 모든 법적 절차 밖에 있었다.

등받이 가죽 의자가 약간 틀어져 있었다. 그가 일어나려다 만 자세 그대로였다. 넥타이 매듭이 평소보다 조금 낮게 내려와 있었다. 그는 그것을 바로잡지 않았다. 그런 몸짓조차 지금은 이 상황에서 사치였다.

서이언이 걸었다. 구두 굽이 카펫에 묻혀 소리가 거의 없었다. 세 걸음. 탁자 앞에 섰다.

손을 내밀었다. 쪽지부터 집었다.

그녀를 떠나보내 주십시오. 더 나은 삶을 위해.

아버지의 글씨였다. 연필로 눌러쓴 자국. ‘더 나은’에서 심이 부러졌는지 획이 갈라져 있었다. 수첩에서 본 것과 같은 문장.

손가락이 종이 가장자리를 접었다.

쪽지를 내려놓았다. 테이프를 집었다. 손끝이 약간 떨렸다. 플라스틱 케이스가 차가웠다.

유재현의 책상 위에는 오래된 카세트 플레이어가 놓여 있었다. 먼지가 앉은 검은색. 코드는 이미 콘센트에 꽂혀 있었다.

서이언은 테이프를 플레이어에 넣었다.

뚜껑이 닫히는 소리. 재생 버튼을 눌렀다.

테이프가 돌아갔다. 처음 몇 초는 잡음뿐이었다.

그리고 목소리.

“……변호사님.”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서이언의 손이 플레이어 위에서 멈췄다.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낮고 느린 음성. 서명근은 평소 거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딸에게는 수어로만 대화했다. 그 아버지가 목소리를 내서, 그것도 존댓말로 말하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어서.”

테이프 속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 의자가 끌리는 소리. 유재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듣고만 있었는지, 녹음에서 지운 건지.

“그 애는…… 이언이는,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서이언의 손가락이 플레이어 옆면을 감싸쥐었다.

플라스틱 표면의 미세한 요철이 지문에 닿아 왔다. 누군가 여러 번 재생하고 되감은 듯, 버튼 주변에 얕은 마모 흔적이 돌아 있었다. 사무실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천장에서 직선으로 내려와 어깨를 눌렀다. 그 아래서 손톱 끝이 하얗게 질렸다.

테이프에서는 이제 조용한 잡음만 흘러나왔다. 오래된 녹음 매체 특유의, 빈 공간을 메우는 쉬- 하는 소리. 그 소리가 아버지의 침묵을 거꾸로 확성하고 있었다.

평생 음성 대신 손의 움직임으로 사랑을 표현했던 사람. 그 사람이 남긴 유일한 목소리의 기록. 듣고 싶지 않아도 귀를 막을 수 없었다.

서이언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플레이어를 응시했다. 손가락 마디에 힘이 들어가 관절이 도드라졌다. 무의식중에 엄지가 정지 버튼 근처를 더듬었지만 누르지 않았다. 듣는 것이 마땅한 벌처럼 느껴졌다.

숨을 들이쉬었다. 냉기 섞인 공기가 기도를 타고 내려갔다.

“변호사님이 곁에 있으면 안 됩니다. 제가…… 제가 부탁드립니다.”

숨소리. 길고 느린 숨.

“그 애를 떠나보내 주십시오.”

잡음. 침묵.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서이언은 플레이어 앞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몇 번 없었다. 결혼식 축사도 수어로 했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설명할 때도 이순자가 대신 말했다. 그런 사람이.

녹음된 목소리로.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머리 숙여 부탁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 알았다. 딸을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유재현이라는 존재가 딸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 그것만이 더 나은 삶이라고 믿은 거였다.

플레이어 옆에 수어 사전이 놓여 있었다. 낡은 표지. 국립국어원. 책등이 갈라져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유재현이 독학할 때 쓴 사전이었다.

서이언은 사전을 보지 않았다.

그러나 시야 구석에서 낡은 책등이 흐릿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잘 보려는 의도가 아니라 외면할 수 없는 기억의 표지처럼 그곳에 있었다. 그 사전으로 그가 처음 익힌 단어가 무엇인지 서이언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일상의 용어들, 인사, 날씨, 음식 이름.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들. 미안하다든가, 보고 싶다든가. 그런 것들.

사전의 존재가 증명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유재현이 달아나면서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이 서이언의 가슴을 더 무겁게 눌렀다.

플레이어의 작동 램프가 깜박이다 꺼졌다. 붉은 빛이 사라지자 사무실은 더욱 침침해졌다. 창밖 도시의 불빛이 블라인드 틈으로 길게 쪼개져 들어왔다. 서이언의 얼굴 절반이 그 빛에 닿았고, 절반은 그림자 속에 남았다. 그 경계선이 뺨을 가로질렀다.

눈꺼풀이 약간 떨렸다. 속눈썹에 맺힌 것이 형광등을 반사해 반짝였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테이프가 멈췄다. 자동 정지 버튼이 올라갔다. 사무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몇 초가 지났다.

서이언이 테이프를 꺼냈다. 플라스틱 케이스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다시 집어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테이프 표면에 손톱자국이 났다.

고개를 들었다.

유재현이 서 있었다. 책상 뒤에서 나오지 않았다. 왼손 검지가 오른쪽 커프스 단추 위에 올려져 있었다. 누르지도 떼지도 못한 채.

눈이 마주쳤다. 유재현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변호사로서 지닌 모든 단어가, 그 순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이언은 그 얼굴을 응시했다. 십 년 전 도망치듯 떠난 사람. 아무 말 없이 약속을 지킨 사람. 아버지의 부탁을 듣고도, 그 사실을 끝까지 숨긴 사람.

눈물이 차올랐다. 서이언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흐르게 내버려뒀다. 손은 올리지 않았다.

돌아섰다.

가방을 집었다. 손이 떨려 가방 끈을 두 번 만에 잡았다. 걸었다. 문 쪽으로. 구두 굽이 카펫에 닿는 소리, 한 번, 두 번.

“이언아.”

유재현의 목소리. 반말이었다. 과거의 말투.

서이언은 멈추지 않았다. 유리문 손잡이를 잡았다.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다시 잡았다.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왔다.

뒤에서 쫓아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복도가 길었다. 형광등 불빛이 대리석 바닥에 희게 번졌다.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버튼을 누르려다 손을 내렸다.

계단으로 걸었다.

비상구 문을 열었다. 콘크리트 계단이 아래로 이어졌다.

손잡이에서 손을 놓았다. 철문이 닫혔다. 무거운 소리가 울리고, 그 후에는 정적뿐이었다.

서이언은 계단에 주저앉았다. 감정 형용사는 떠오르지 않았다. 가방을 가슴 앞으로 끌어안았다. 수첩의 모서리가 갈비뼈에 닿았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사무실 안.

유재현은 서 있었다. 탁자 위. 테이프 한 개. 펼쳐진 쪽지. 수어 사전은 책상 구석에 놓인 채 펼쳐지지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다.

서이언이 나간 그대로.

유재현은 손을 올렸다. 왼손. 오른쪽 커프스 단추를 찾았다. 검지로 한 번 눌렀다. 떼지 못했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먼 기계음. 그리고 다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십 년 전 서명근이 이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지금 유재현이 서 있는 바로 이 자리, 맞은편 의자에서. 그리고 말했다. 그 애를 떠나보내 주십시오.

유재현은 그 말을 지켰다.

오늘까지.

그리고 오늘, 그가 지킨 약속의 실체가 녹음 테이프라는 형태로 이렇게 탁자 위에 놓였다. 서명근이 남긴 부탁은 단순히 떠나보내는 것 이상이었다. 그 부탁에는 침묵이 요구되었고, 오해받을 각오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일이 때로는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일임을 감내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재현은 책상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살짝 얹었다. 마호가니 나무의 차가운 온도가 전해졌다. 그는 시선을 들어 열린 문 너머를 보았다. 복도 저 끝, 비상구 쪽에서 아주 희미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진동이었다.

그는 그 소리의 울림 속에서 십 년의 시간을 감각했다. 그것은 후회라기보다 어떤 무거운 확인에 가까웠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그 결과 지금 서이언이 저 문을 나가고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진실이었다. 그 진실이 갈비뼈 안쪽을 누르는 통증으로 자리 잡았다.

유재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탁자 위의 수첩을 보았다. 서명근의 것이 아니라 서이언이 가져온 수첩.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손가락을 가볍게 구부린 채 책상 아래로 내렸다.

커피 잔의 검은 액체가 완전히 식어 있었다. 유재현은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목이 타들어 갔지만, 컵을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 하나가 감당되지 않았다. 시계는 9시 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무실 불빛 아래 쪽지가 가만히 놓여 있었다. 연필로 눌러쓴 글씨가 형광등 빛에 바랬다. 테이프 옆, 서이언이 내려놓은 자국 그대로.

유재현은 커피를 마시지도, 서류를 정리하지도, 의자에 앉지도 않았다. 문이 닫히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밤 9시 47분. 복도 끝 창문으로 도시의 불빛이 멀리 깜빡이고 있었다. 유리문 밖으로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테이프가 돌아갔다. 처음 몇 초는 잡음뿐이었다.

그리고 목소리.

“……변호사님.”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서이언의 손이 플레이어 위에서 멈췄다.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들리지 않는 진심1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