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19화
법무법인 유현이 입주한 건물의 계단은 평소보다 한참 길었다.
서이언은 열다섯 계단쯤 내려오다 걸음을 멈췄다. 손이 난간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을 찔렀다. 그 자극에 정신이 약간 돌아왔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쉰 뒤 1층까지 이동했다. 로비의 대리석 바닥이 형광등 아래서 희게 빛나고 있었다. 유리문 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번졌다.
휴대폰을 꺼내 네비게이션 앱을 열었다. 즐겨찾기 목록 맨 위에 저장된 주소를 눌렀다. '서명근 목공소'.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택시 호출 앱을 실행하자 현재 위치와 목적지가 자동으로 입력됐다. 호출 버튼을 누르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배차까지 3분이라는 알림이 화면에 떴다.
밖으로 나갔다. 밤공기가 뺨에 닿았다. 아직 완전한 여름은 아니었다. 봄 끝자락의 바람이 어깨를 스쳤다.
택시가 정차했다. 뒷좌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기사가 백미러로 슬쩍 목적지를 확인했다. 차가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흘러갔다. 서이언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가죽 손잡이가 손바닥을 압박했다.
열다섯 살 겨울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시청에 갔다. 수어 통역이 배치되지 않은 민원 창구에서 아버지는 메모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썼다. 담당 공무원이 메모지를 옆으로 밀었다. 여기 서명하세요.
아버지는 읽지 못했다. 서이언이 아버지의 팔을 잡아당겨 종이의 위치를 가리켰다. 그날 밤 아버지는 식탁에 앉아 오래도록 수첩을 들여다봤다. 내가 귀가 들리지 않아서 네가 항상 옆에 있어야 하는구나.
그 수첩이 지금 가방 안에 있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라는 페이지가 접힌 채로.
목공소 앞에 도착했다. 택시가 떠나고 골목은 조용해졌다. 셔터는 반쯤 올라가 있었고 안에서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새어나왔다. 서이언은 고개를 숙여 셔터 아래로 들어갔다.
대패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서명근이 작업대에서 등을 보이고 서서 참나무 판재를 밀고 있었다.
서이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작업대까지 세 걸음.
서명근이 대패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손이 허공에서 반쯤 올라왔다가 멈췄다.
서이언은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접힌 페이지를 펴서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나무 부스러기가 수첩 옆으로 밀렸다. 휴대폰을 꺼내 녹음 테이프를 찍은 사진을 띄워 수첩 옆에 나란히 놓았다.
아버지의 시선이 사진에 닿았다. 그리고 수첩으로 내려갔다. 서명근의 손에 쥔 대패가 작업대 위로 천천히 내려졌다. 나무 손잡이에는 쥔 흔적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작업장의 공기는 톱밥 냄새와 니스 냄새가 섞여 있었다. CNC 선반의 전원 램프만 깜빡이고 있었다. 환풍기가 돌지 않았다.
서명근의 손이 올라왔다. 보청기를 만지작거리는 동작이었다. 귀 뒤의 작은 기기를 손끝으로 두어 번 쓸었다. 그리고 손이 내려왔다.
네가 알게 될 줄 몰랐다.
수어는 느렸다. 손가락 관절이 굳은 듯 움직임이 뻣뻣했다. 서명근의 얼굴에는 당황과 체념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서이언의 손이 허공에서 떨렸다. 수어를 시작하려다 세 번을 멈췄다. 입술이 달싹였다.
“왜.”
한 단어가 작업장을 가로질렀다. 서이언은 숨을 들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에게 그런 말을 했어요.”
수어가 따라붙었다. 손의 움직임이 격렬했다.
“왜 내 인생을 대신 결정했어요.”
마지막 문장에서 손이 크게 휘저어졌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서명근은 그 손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갔다. 자신의 손은 허리 높이에서 멈춘 채였다.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랐다.
서명근의 손이 무겁게 움직였다. 거즈로 감싼 왼손은 옆구리에 붙인 채, 오른손만으로 수어를 만들었다. 손가락이 중간에 멈추고, 다시 시작되고, 또 멈추었다.
나와 네 엄마가 네 짐이 될까 봐.
'짐'이라는 수어를 할 때 서명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른손 검지로 왼쪽 어깨를 두드리는 동작. 부담을 지는 사람. 무거운 것을 짊어진 사람. 그 수어를 보는 서이언의 눈이 커졌다.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작업장에 울렸다. 서이언의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왔다.
서명근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손을 다시 올렸다. 그러나 손가락이 떨려서 문장이 되지 못했다. 보청기를 다시 만졌다. 청각 보조 기기의 배터리가 부족한 건지, 귀 안에서 작은 비프음이 났다.
네가 대학원에 합격했을 때.
서명근의 수어가 이어졌다. 손이 조금 더 안정되었다.
네 방에 앉아 네 수어 교과서를 봤다. 책상 위에는 통역사 시험 원서가 놓여 있었다.
서이언은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가진 재능은 우리에게서 나온 게 아니야. 네가 우리 때문에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서명근의 오른손이 바지 주머니로 들어갔다. 낡은 수첩을 꺼냈다. 표지가 닳고 모서리가 둥글어져 있었다. 몇 장을 넘겨 한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연필 글씨가 빼곡했다.
유재현이라는 아이가 네 방에서 나오는 걸 봤다. 행복해 보였다. 그게 무서웠다.
서이언의 눈이 수첩에서 아버지의 얼굴로 옮겨갔다.
네가 그 아이와 함께 있으면 결국 통역사의 길을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이 생기면 우리보다 그쪽을 선택할 거라고.
서명근의 손이 잠시 멈췄다. 반쯤 쥔 주먹이 허공에 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펴졌다.
그래서 부탁했다. 네가 더 넓은 세상으로 가도록 막지 말아 달라고.
서이언의 눈물이 작업대 위 나무 부스러기 위로 떨어졌다. 소리 없이. 한 방울, 그리고 한 방울 더. 톱밥이 물기를 머금고 진한 색으로 변했다.
“그게….”
서이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게 나를 가장 외롭게 만들었다는 걸 몰랐어요.”
수어가 목소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느리고 정확했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선택할 기회조차 빼앗은 거예요.”
그녀의 손은 수어를 멈추지 않았다.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서 거의 속삭임이 되었지만, 손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한 사람이 유일하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십 년 동안. 그게 내가 버틴 방식이었어요.”
서명근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상처 입은 왼손이 올라왔다. 무언가를 만지려는 듯, 그러나 닿지 못할 거리를 알고 있는 듯 손바닥이 허공에서 멈췄다.
네가 버림받았다고 느꼈구나.
그의 수어는 문장이라기보다 흐느낌에 가까웠다. 손가락이 떨려서 수어 형상이 정확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너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서이언은 아버지의 수어를 똑바로 응시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 턱 끝에서 떨어졌다. 닦지 않았다.
“그게 아버지가 옳다고 믿은 방법이라는 걸 알아요.”
목소리는 다시 평온을 찾아가고 있었다. 떨림이 가라앉은 자리에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방법이었어요. 제 방법이 아니었어요.”
서명근의 손이 떨어졌다. 왼손 붕대에 핏자국이 살짝 번져 있었다. 오후에 손질하다 베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모양이었다. 작업대 위에 대패가 놓인 채로 굳어 있었다. 톱밥 냄새가 공기 중에 가라앉았다.
서이언은 작업대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선은 아버지의 얼굴에 고정된 채였다. 1분이 10분처럼 느껴지는 침묵이 작업장을 채웠다.
천천히 손을 올렸다.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수어는 느렸고, 떨렸다. 그러나 중간에 멈추지 않았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완성했다.
서명근은 그 수어를 읽고 있었다. 붕대로 감은 왼손이 작업대 위로 내려왔다. 손가락이 나무 결을 따라 미끄러졌다.
서이언은 작업대 위의 수첩과 휴대폰을 집었다. 수첩은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고 휴대폰은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지퍼를 잠그는 소리가 났다. 돌아섰다.
뒤에서 서명근의 손이 올라왔다. 닿을 수 없는 거리를 향해 뻗어졌다. 하얗게 감싼 왼손이 공기 중에서 멈췄다. 오른손도 함께 올라갔으나, 수어를 만들지 못했다.
서이언은 걸어갔다. 셔터 아래로 허리를 숙여 밖으로 나갔다. 발걸음이 골목의 아스팔트를 딛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목공소 안, 서명근은 작업대 앞에 굳은 듯 서 있었다. 손은 여전히 허공에 올려진 채였다. 문 쪽을 향한 시선이 깜빡이지 않았다. CNC 선반의 전원 램프만 깜빡이고 있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서이언은 목공소 골목 초입에 멈춰 섰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이 켜지며 시간이 표시됐다. 밤 10시 14분.
최근 통화 목록이 화면에 떠 있었다. 유재현의 이름과 전화번호. 마지막 통화는 열흘 전, 작업장 현장 검증 일정을 잡던 날이었다.
서이언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화면을 끄지도 않았다. 검지가 유리 위에 가볍게 얹힌 채로, 그녀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재현아.”
입술 사이로 이름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금세 흩어졌다.
십 년 전 유재현은 침묵 속에서 손을 놓았다. 아버지의 부탁을 지키는 방식이 그에게는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침묵을 배신으로 읽었다.
오늘에야 알았다. 그게 유재현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 지금…….”
서이언은 가로등 기둥에 등을 기댔다. 휴대폰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화면이 다시 켜지며 유재현의 이름이 떠올랐다.
“너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떨렸다.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미안해.”
혼잣말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처럼 생생한 억양이 실려 있었다. 그녀는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주머니 안에서 작게 떨렸다.
천천히 걸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큰길 쪽을 향했다.
법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내일이면 다시 그곳에 가야 했다. 통역사 배지를 달고, 법정의 마른 종이 냄새 속에 앉아, 말을 옮겨야 했다.
가로등 불빛이 한 걸음마다 그림자의 길이를 바꾸었다.
그녀는 한 번 더 뒤돌아보지 않았다. 목공소 쪽에서는 여전히 희미한 불빛만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작업등이었다. 붕대 감은 손으로 다시 대패를 잡았을까, 아니면 아직도 허공에 손을 올린 채 서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걸어야 했다. 그 사실만이 선명했다. 열다섯 살부터 지금까지, 서이언은 늘 그래왔다. 멈추면 무너질 것 같은 순간마다, 한 걸음씩 앞으로 걸었다.
밤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봄 끝자락의 찬 기운이었지만, 숨결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