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20화
법원 통역사 대기실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이었다.
서이언은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형광등 스위치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전 햇살만으로도 충분했다. 통역사 배지를 손에 쥐자 금속 클립이 차갑게 감겼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어제 적어둔 메모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보호구-청력검사-회피. 작업장 소음 측정치 89dB — CNC 선반 실측 95dB 이상.
새 페이지로 넘기지 않고, 손가락으로 수첩 가장자리를 따라 쓸었다. 종이의 결이 손끝에 닿았다.
배지를 가슴에 달았다. 클립이 블라우스 천을 물었다. 낯선 무게였다. 십 년 동안 매일 달았던 배지가 오늘은 묘하게 서먹했다.
손목시계가 진동했다. 9시 20분. 법정 입장까지 40분 남았다.
서이언은 수첩을 가방에 넣지 않고 손에 쥔 채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에 왼손을 올리자 손가락이 저절로 수어를 그렸다. 짧고 단절된 움직임이었다.
준비됐어.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러나 손만은 진지하게 답을 건넸다.
--- 법정의 공기에는 늘 마른 종이 냄새가 배어 있었다.
서이언이 통역사석에 앉았을 때, 유재현은 이미 변호사석에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손만 보일 뿐 시선은 오지 않았다.
속기사의 손이 키보드 위에 올라갔다. 방청석 뒤쪽 문이 닫혔다. 맹주원 판사가 입정했다.
“착석하십시오. 제9민사부, 우상일 건 속개합니다.”
맹주원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약간 낮았다. 서이언은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의 왼쪽 귀 쪽으로 가는 걸 의식적으로 바로잡았다. 맹주원이 서류에서 고개를 들었다.
“원고 측, 추가 증거 제출 있습니까.”
“없습니다, 재판장님.”
상대 변호사가 짧게 답했다. 맹주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향을 틀었다.
“피고 측.”
유재현이 일어났다.
“증인 우상일에 대한 피고 측 증거 조사는 완료되었습니다. 추가 신문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맹주원이 다시 서류를 한 장 넘겼다. 법정의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였다. 서이언은 수첩 위에 펜을 내려놓았다.
“본 건은 양측 증거 조사가 종결되었으므로, 다음 기일을 최종 변론 기일로 지정합니다. 3주 후인 6월 3일 오전 10시로 합니다.”
맹주원이 양측을 번갈아 바라봤다.
“양측, 일정 확인하십시오.”
“확인했습니다.”
유재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원고 측, 변론 요지서는 기일 5일 전까지 제출하십시오. 피고 측도 동일하게 준비하도록 합니다.”
서이언은 맹주원의 발언을 통역하지 않았다. 오늘 우상일은 증인석에 서지 않았다. 피고석 뒤 대기석에 앉아 아내와 함께 수어로 무언가 나누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떨림이 없었다.
맹주원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증인 우상일, 오늘 증언은 없습니다. 편히 계십시오.”
서이언이 손을 올려 맹주원의 말을 수어로 옮겼다. 우상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그의 팔을 한 번 토닥였다.
맹주원이 서류를 정리하며 덧붙였다.
“재판장으로서 한 가지 당부드립니다. 최종 변론은 이 사건의 마지막 절차입니다. 원고와 피고 모두 충실히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시선이 잠시 통역사석 쪽으로 향했다. 서이언은 그 시선을 받았다. 맹주원의 눈빛은 무언가 확인하는 듯했다. 서이언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우상일에게 마저 전달했다.
“휴정합니다. 20분 후 속개하여 잔여 일정을 정리하겠습니다.”
맹주원이 법대를 떠나자 법정의 공기가 조금 풀렸다. 속기사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목을 돌렸다.
서이언이 수첩의 모서리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순간, 구두 소리가 통역사석 앞에서 멈췄다.
그림자가 드리웠다.
“잠깐 괜찮겠습니까.”
유재현이었다.
서이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손이 수첩 위에서 멈추었다. 유재현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로 우상일 건 증거 조사가 끝났습니다.”
목소리에서 법정 특유의 긴장이 빠져 있었다.
“다음 기일은 변론뿐입니다. 증인은 더 이상 서지 않습니다.”
서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재현의 손이 변호사석 난간에 가볍게 얹혀 있었다. 커프스 단추를 만지지는 않았다.
“당신에게 말해둘 게 있습니다.”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서이언은 그 갈라짐을 들었다. 손이 수첩을 떠나 통역사석 난간 위에 놓였다.
“법대 앞에서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증거 인멸로 오해받을 여지가 있어서. 지금은 아무도 듣지 않으니 말합니다.”
그는 한 번 숨을 멈추었다.
“내가 변호사가 된 이유는, 당신이 속한 세계에 접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서이언의 손가락이 난간에서 미세하게 굳었다.
“이 사건을 선택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통역사 배정 명단에 당신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유재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시선은 서이언의 눈이 아니라, 오른손 위에 멈춰 있었다. 통역사로서 수없이 말을 옮겼던 손이었다.
법정의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방청석에서는 우상일 부부의 작은 수어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서이언은 유재현의 손등을 보았다. 펜 굳은살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십 년 전에는 없었던 굳은살이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손등에서 거두어 수첩으로 돌렸다. 왼손 검지가 수첩 표지의 코팅된 모서리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유재현이 손을 난간에서 떼었다.
“이상입니다.”
그가 변호사석으로 돌아가는 구두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서류를 정리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서이언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통역사석 난간을 움켜쥐고 있었다. 관절이 하얗게 드러날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천천히, 힘을 풀었다.
손가락이 한 마디씩 난간에서 떨어졌다. 손등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
법정의 마른 공기가 손가락 사이로 지나갔다. 서이언은 다시 수첩을 펼쳤다. 어제의 메모가 그대로 거기 있었다. 보호구-청력검사-회피.
펜을 들었다. 새로 적을 말은 없었다. 그래도 펜 끝이 수첩 구석에 짧은 획을 그었다. 의미 없는 선이었다. 그저 손이 기억하는 버릇이었다.
속기사가 키보드를 다시 당기며 중얼거렸다.
“20분 휴정, 짧네요.”
서이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의 햇살이 법정 바닥을 반으로 갈랐다.
--- 휴정이 끝나고 속개된 법정은 절차만을 정리했다. 맹주원이 다음 기일을 재확인하고, 양측 변호사가 서류를 제출했다.
서이언은 우상일에게 마지막 공지 사항을 통역했다.
다음 기일은 최종 변론입니다. 6월 3일 오전 10시.
우상일이 서툰 손동작으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아내가 옆에서 남편의 손을 살며시 내렸다. 우상일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서이언은 놓이지 않는 그 손을 보았다.
맹주원이 법정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원고와 피고 모두, 이 사건이 단순한 보상금 산정이 아닌, 진실을 가리는 자리임을 명심하십시오.”
서이언은 그 말을 수어로 옮겼다. 맹주원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무미건조했지만, 그가 던진 ‘진실’이라는 단어가 통역사석까지 가라앉아 내려왔다.
법정이 끝나고 방청석에서 사람들이 일어났다.
서이언이 통역사 배지를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방청석 뒤쪽에서 인기척이 다가왔다.
이순자였다.
가방을 든 손이 평소처럼 반듯했다. 서이언은 어머니가 언제 들어왔는지 알지 못했다. 휴정 전에는 보이지 않았다. 속개 도중에 조용히 들어와 앉았을 것이다.
이순자는 딸에게 손짓하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서 있었다. 서이언이 먼저 손을 들었다.
어머니, 여긴 왜.
이순자의 손이 올라왔다. 평소보다 느렸다.
네 일하는 걸 보고 싶었다.
서이언은 손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택시 타고 왔어?
버스. 두 번 갈아탔다.
이순자의 손짓에 미소가 약간 묻어 있었다. 서이언은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두 사람은 함께 법정 문을 향해 걸었다.
복도의 게시판에는 우상일 사건의 다음 기일이 공지되어 있었다. 빨간 글씨로 ‘6월 3일 오전 10시’라고 적혀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유리 덮개가 희미하게 빛을 받고 있었다.
서이언은 그 게시판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어머니가 옆에 섰다.
아버지는.
서이언의 손이 멈칫했다.
아버지는 작업장에 있어. 내일 아침 집에 들를게.
이순자는 딸의 손을 보았다. 손등에는 아직 붉은 자국이 옅게 남아 있었다. 이순자는 손을 올려 서이언의 손을 한 번 잡았다. 꽉 쥐지 않았다. 그냥, 온기를 확인하듯 짧게 감쌌다가 놓았다.
기다릴게.
이순자의 손이 내려갔다. 서이언은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의 온기가 수첩을 쥔 손등 위에 잠시 머물렀다.
두 사람은 법원 로비를 가로질러 큰길 쪽으로 걸었다. 복도의 게시판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3주 후의 기일을 가리키며, 유리 덮개 아래서 빨간 글씨가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