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21화
창밖은 아직 검었다.
서이언은 책상 위 자료 더미에서 우상일의 진술 속기록을 집어 들었다. 왼손으로 페이지 가장자리를 한 번 훑었다. 종이는 차고 매끄러웠다.
수첩을 펼쳤다. 전날 기록한 뉘앙스 메모 위에 볼펜 끝이 닿았다. 작업장 소음 측정치 89데시벨, 그리고 우상일이 ‘보호구’를 수어할 때의 손 위치.
손가락이 기록의 시계열을 따라 움직였다.
오전 8시 30분, 안전 점검 서명.
오전 10시 12분, 첫 번째 소음 측정.
오후 3시 45분, 보호구 교체 기록.
그리고 사고 시각.
서이언은 마지막 두 지점 사이에 볼펜을 댔다. 3시 45분, 보호구를 교체했다. 그런데 사고 직후 현장 사진에서는 방음 귀마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진술에서는 귀마개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했다.
서이언은 볼펜을 내려놓지 않고 수첩 아래 여백에 짧게 적었다. 손가락만으로 한 글자씩 눌러썼다.
교체 후 미착용 가능성.
그러나 왜 자백했는가.
책상 위 커피 잔이 손등에 닿았다. 식은 지 오래였다. 서이언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찬 액체가 혀끝을 지나 목으로 넘어갔다.
다시 속기록을 넘겼다. 우상일의 답변 중 ‘보호구 착용’이라는 수어가 나올 때마다 속도가 느려졌다. 평소 문장당 2.3초, 이 부분만 3.8초.
0.9초 차이는 손의 움직임으로는 큰 간극이었다.
서이언은 그 지점들을 고리처럼 동그라미로 묶었다.
볼펜 끝이 마지막 원을 닫을 때, 약간의 잉크가 번졌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볼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폈다.
창밖이 서서히 옅은 회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탁자 위 커피 잔을 들어 싱크대로 가져갔다. 수돗물을 틀었다. 물줄기가 잔 안쪽을 때리는 소리만 부엌에 남았다.
잔을 건조대에 엎어 놓았다. 책상으로 돌아와 수첩을 덮었다. 덮기 전 마지막으로 동그라미 친 부분을 손가락으로 한 번 더 따라갔다.
종이의 결이 손끝을 스쳤다.
유재현은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열었다.
우상일 쪽에서 전날 저녁 메신저로 먼저 연락을 해왔다. ‘사고 당일 작업장 출입 및 안전점검 로그를 추가로 확보했다’는 내용이었다. 유재현이 답장을 보내기 전에 파일 사본이 먼저 도착했다.
봉투에서 A4 용지 다섯 장을 꺼냈다. 페이지마다 상단에 ‘작업장 안전점검 일지’라는 제목과 날짜가 찍혀 있었다. 작년 10월 14일.
유재현은 첫 장부터 차례로 넘겼다.
오전 6시 45분, 작업장 개방. 점검자 서명.
오전 8시 30분, 안전 교육. 출근자 전원 서명.
오전 10시 12분, 소음 측정. 89데시벨.
오후 1시 30분, 환풍기 점검. 정상.
오후 3시 45분, 보호구 점검 및 교체. 방음 귀마개 2세트.
그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손가락이 멈췄다.
다음 기재 시각은 오후 4시 27분이었다. 사고 발생 시각. ‘CNC 선반 작업 중 우상일 근로자 우측 청력 손실 호소. 119 신고.’
12분.
3시 45분 보호구 교체부터 4시 27분 사고 보고까지, 중간 점검 기록이 없었다. 보호구 교체 후 작업 복귀 확인 란은 공란이었다.
보호구를 교체해 준 안전 담당자는 그 12분간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우상일은 작업에 복귀했는가.
유재현은 로그의 공란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끝 아래 종이가 얇게 눌렸다. 봉투 안에는 다른 서류가 더 있었다.
사고 이후 회사가 제출한 ‘안전점검 체계 정상 작동 확인서’. 날짜는 사고 이틀 뒤. 모든 란이 채워져 있었다.
로그는 비어 있고, 확인서는 완벽했다.
유재현은 로그 사본을 뒤집어 책상 위에 엎어 놓았다. 오른손이 커프스 단추로 갔다. 검지가 단추 모서리를 한 번, 눌렀다 놓았다. 움직임이 평소보다 짧았다. 누르는 깊이가 거의 닿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14층 유리창 너머로 아침 햇살이 건물 옆면을 비추고 있었다.
서류는 책상 위에 엎어진 채 놓여 있었다. 빈 란이 아래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재현은 그 공란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했다.
12분.
오전 9시 15분, 법원 통역사 대기실.
서이언은 벽면 게시판에 붙은 주간 배정표 앞에 섰다. 오늘 오전에는 민사 14부 사건, 오후에는 우상일 사건과 같은 9민사부의 다른 사건이 잡혀 있었다.
우상일 사건 란에는 다음 기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6월 3일 오전 10시. 최종 변론.
서이언의 검지가 그 줄에 닿았다. 3주 후였다. 손끝이 글씨 위를 짧게 지나고 내려왔다.
대기실 구석 자리로 가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수첩을 꺼내 아침에 동그라미 친 페이지를 폈다. 보호구 교체 시각과 사고 시각 사이의 빈칸.
볼펜을 들었다. 3시 45분과 4시 27분 사이에 작은 물음표를 하나 더 그렸다. 그리고 물음표 오른쪽에 한 글자만 적었다. ‘시간.’
통역사 배지를 손으로 만졌다. 배지 뒷면에는 한국수어통역사 협회 등록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번호의 숫자들을 한 번씩 눌렀다.
대기실 커피 머신에서 종이컵에 커피를 받았다. 기계가 내뿜는 소리가 방 안에 잠시 울렸다. 서이언은 종이컵을 들고 창가에 섰다. 커피 표면에 창문 빛이 얇게 반사되었다.
한 모금 마셨다. 입안 가득 쓴맛이 번졌다.
수첩을 가방에 넣고 배지를 재킷 깃에 고정했다. 가방 끈을 어깨에 걸고 대기실 문을 향해 걸었다.
문 손잡이를 잡기 직전, 게시판 쪽을 다시 한 번 보았다. 6월 3일, 빨간 글씨가 멀리서도 읽혔다. 서이언은 손잡이를 돌리고 복도로 나갔다.
점심 무렵, 법원 3층 복도.
유재현은 계단에서 올라와 복도로 접어들었다. 왼손에는 서류 가방, 오른손은 코트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복도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저편에서 서이언이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색 재킷, 어깨에 멘 가방, 오른손에는 수첩. 통역 업무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복도 유리창으로 낮의 햇살이 들어와 바닥 타일을 반으로 갈랐다.
유재현은 오른손을 주머니에서 뺐다. 손이 반쯤 올라갔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미세하게 움직였다.
서이언.
입은 열리지 않았다. 손도 완전히 올라가지 않았다.
서이언의 시선이 바닥에서 올라왔다. 유재현을 보았다. 정확히 2초. 그녀의 걸음이 느려지지 않았다.
서이언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인사도, 무시도 아닌 각도였다. 손에 든 수첩을 더 꼭 쥐었다. 표지가 손바닥 안에서 눌렸다.
걸음이 빨라지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그대로 유재현의 왼쪽으로 지나갔다. 어깨와 어깨 사이, 복도 폭의 정확히 절반 거리를 두고 지나쳤다.
서이언의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규칙적인 리듬.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유재현의 손이 반쯤 올라간 채 멈춰 있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접혔다. 주먹도 아닌, 펴지도 않은 모양으로 잠시 머물렀다.
그 손은 코트 주머니로 들어갔다.
유재현은 돌아서지 않았다. 복도 저편 창문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맞은편 건물의 회색 벽이 보였다. 창틀에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다.
서이언의 발소리가 계단 쪽에서 사라졌다.
유재현은 서류 가방을 쥔 왼손에 힘을 풀었다. 손가락 마디가 희게 변해 있었다. 그는 복도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낮의 햇살만이 타일 바닥을 반으로 갈라 비추고 있었다.
저녁, 서이언의 아파트.
노트북 화면에 우상일의 증인 신문 영상이 멈춰 있었다. 서이언은 재생 버튼을 누르기 전에 수첩을 옆에 펼쳐 두었다.
영상이 재생되었다. 우상일이 증인석에 앉아 있었다. 상대 측 변호사의 질문이 들렸다.
“사고 당시 보호구를 착용하고 계셨습니까.”
우상일의 손이 올라왔다.
네. 착용했습니다.
서이언은 스페이스바를 눌렀다. 영상이 멈췄다. 우상일의 손이 화면에 정지해 있었다. ‘착용했습니다’—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편 동작이었다.
그런데 손목의 각도가 평소보다 10도쯤 안쪽으로 꺾여 있었다.
서이언은 몇 초 앞으로 되감았다. 이번에는 ‘보호구’라는 단어가 나오는 장면이었다. 양손이 머리 위로 올라가 귀를 막는 동작. 정확한 표준 수어였다. 하지만 손바닥이 귀에 닿을 때 새끼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른 증언 부분을 재생했다. 작업장 소음에 대해 설명할 때, ‘시끄럽다’라는 수어는 크고 단호했다. 손이 얼굴 옆에서 바깥쪽으로 강하게 뻗어 나갔다.
다시 ‘보호구’ 장면으로 돌아왔다.
우상일의 시선이 카메라에서 벗어나 왼쪽 아래를 향했다. 그가 무언가를 피할 때 보이는 패턴 그대로였다.
서이언은 ‘소리’라는 단어가 나오는 부분으로 영상을 이동시켰다. 우상일이 수어로 ‘소리’를 표현할 때, 오른손 검지를 귀 옆에서 한 바퀴 돌렸다. 동작은 정확했다.
하지만 돌리는 속도가 달랐다.
다른 단어는 초당 한 바퀴 속도. ‘소리’는 초당 반 바퀴. 손의 궤적이 천천히, 마치 무언가를 더듬는 듯이 원을 그렸다.
서이언은 영상을 멈추고 수첩을 끌어당겼다. 볼펜으로 페이지 아래쪽에 적었다.
‘소리’ — 속도 저하.
‘보호구’ — 손목 안쪽 꺾임, 새끼손가락 떨림.
시선 회피 — 왼쪽 아래.
한 줄을 띄우고 덧붙였다.
두려움인가, 회피인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영상은 정지 상태 그대로였다. 우상일의 손이 ‘소리’를 표현한 채 멈춰 있었다. 검지가 귀 옆에 닿기 직전, 원의 4분의 3 지점에서 동작이 얼어붙어 있었다.
서이언은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올려다보았다. 오른손이 무의식적으로 수첩의 마지막 문장 위로 올라갔다. 손가락이 볼펜 자국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회피인가.’
손끝이 종이의 옅은 홈을 따라갔다. 잉크가 살짝 파고든 자리, 글씨의 결이 손가락에 전달되었다.
모니터 위 우상일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멈춰 있었다. 미완의 원. 귀 옆 5센티미터 앞.
서이언은 수첩을 덮지 않았다. 펼친 페이지 그대로 책상 위에 두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첩 위로 형광등 불빛이 내려앉았다. ‘두려움인가’라는 글씨 위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