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22화
법정의 공기는 마른 종이 냄새를 품고 있었다. 서이언은 통역석에 앉아 손목시계를 한 번 만졌다. 진동 알람은 이미 꺼둔 뒤였다.
판사가 증거 채택을 선언했다. 회사 측이 낸 소음 측정 결과. 89데시벨. 기준치 이하.
서이언의 시선이 우상일에게 닿았다. 증인석에 선 그는 오른손 엄지를 왼손으로 감싸쥐고 있었다. A구역이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증인, 사고 당일 작업장 소음 상태에 대해 진술해 주십시오.”
유재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우상일의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수어가 시작됐다. ‘작업장’—양손을 가슴 앞에서 사각형으로 그렸다. ‘소음’—오른손 검지로 귀 옆에 원을 그렸다.
속도가 저하되었다. 초당 반 바퀴.
서이언은 입을 열었다.
“작업장 소음은 항상 있었습니다.”
우상일의 손이 이어졌다. ‘기계’—양손이 무언가를 조작하듯 움직였다. ‘소리’—다시 검지가 귀 옆에서 원을 그렸다. 천천히. 4분의 3 지점에서 살짝 멈칫했다.
서이언의 손가락이 수첩 모서리를 눌렀다. 목소리는 평온했다.
“기계 소리가 계속 났습니다.”
우상일의 손이 ‘보호구’로 넘어가려다 허공에서 멈추었다. 오른손 손목이 안쪽으로 꺾였다. 평소보다 10도쯤. 새끼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시선이 카메라를 벗어나 왼쪽 아래로 향했다.
서이언은 그 멈춤을 보았다. 어젯밤 모니터에 얼어붙었던 바로 그 각도였다.
우상일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보호구’—양손을 귀에 댔다. 손목 꺾임은 여전했다. ‘착용했습니다’—오른손을 가슴께로 내리며 작게 끄덕였다.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서이언의 목소리는 원발언의 떨림을 싣지 않았다. 통역사는 뉘앙스는 전달하지만, 떨림까지 모방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배웠다.
유재현이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사고 당시 장비 상태는 어땠습니까.”
우상일의 손이 답변을 구성했다. 서툰 수어 문법. ‘귀마개’—손바닥으로 귀를 덮었다.
‘낡다’—오른손을 비비듯 내렸다. ‘교체’—손을 뒤집으며 새것으로 바꾸는 동작. 그다음 동작이 끊겼다.
서이언은 1초를 기다렸다. 우상일이 다시 손을 올렸다. ‘요청’—오른손을 입술 아래에서 앞으로 뻗었다. ‘했다’—짧게 끄덕임. ‘하지만’—왼손을 수평으로 잘랐다.
그다음 수어는 헛돌았다. 손가락이 허공을 몇 번 더듬더니 우상일이 고개를 숙였다.
서이언은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통역했다.
“귀마개가 낡아서, 교체를 요청했습니다만.”
문장이 거기서 멈추었다. 법정의 정적이 이어졌다.
유재현이 증인석을 향해 반 걸음 다가섰다. 왼손 검지로 오른쪽 커프스 단추를 한 번 눌렀다. 서이언은 그 손가락을 보았다.
“증인, 요청 이후에 대해 더 진술하시겠습니까.”
우상일이 고개를 들었다. 손이 올라왔다. ‘기억’—이마를 짚었다.
‘안 난다’—손을 옆으로 저었다. 느린 동작이었다. 두 번째 ‘안 난다’에서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서이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통역석 왼쪽 수첩에 오른손이 내려가 볼펜을 집었다. 페이지 아래 빈 공간에 한 줄을 적었다.
교체 요청 후 — 동작 끊김. 요청 직전 ‘보호구’와 동일 패턴.
볼펜을 내려놓았다.
판사가 휴정을 선언했다. 20분.
서이언은 수첩을 가방 안쪽에 넣고 지퍼를 잠갔다. 통역사석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유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변호사석 난간에서 그의 손이 떨어지려던 순간이었다. 멈칫했다.
서이언은 시선을 먼저 거두지 않았다. 유재현이 한 걸음 움직였다. 우상일 쪽으로. 서이언은 몸을 돌려 법정 문으로 걸어갔다.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뒤에서 유재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증인, 잠시만 더 말씀해 주십시오.”
문이 닫혔다. 소리는 끊겼다.
복도는 조용했다. 서이언은 벽 쪽으로 걸음을 옮겨 등받이 없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가방 끈을 쥔 왼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젯밤 수첩에 적었던 두 문장이 떠올랐다. ‘두려움인가, 회피인가.’ 오늘 멈칫임도 같았다. 손목 꺾임, 새끼손가락 떨림, 시선 회피. 모두.
서이언은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법정 문 너머로 들리는 유재현의 목소리는 더 이상 문장으로 분간되지 않았다. 낮고 균일한 울림만 남았다.
법원 복도에는 오후의 햇살이 긴 창을 통해 바닥에 비스듬히 깔려 있었다.
서이언은 벤치에 앉아 수첩을 펼친 채였다. 어젯밤 멈춰둔 페이지가 그대로 열려 있었다. ‘두려움인가’라는 글씨 위로 엄지가 천천히 지나갔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복도 끝에서 이순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발소리는 없었다. 낡은 운동화가 대리석 바닥을 밟았지만, 서이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바닥에 스미는 진동만이 종아리를 통해 전달될 뿐이었다.
이순자가 서이언 앞에 멈춰 섰다. 손을 들어 올렸다. 수어가 시작되기 전, 왼손 검지가 바지 주름을 한 번 쓸었다. 떨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목공소에] 이순자의 오른손이 가슴 앞에서 살짝 내려왔다. [잠깐]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맞붙였다.
손끝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평소보다 손의 궤적이 좁았다. 큰 동작으로 말하던 어머니의 수어가 오늘은 작고 조심스러웠다.
[들르지 않겠니]
서이언은 손끝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십 년 전에도 똑같은 떨림을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유재현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던 날, 어머니가 부엌에서 홀로 수어를 연습하던 그 손이었다.
떨림의 원인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어머니의 손끝이 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사건 준비가 급합니다.”
서이언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수어는 섞지 않았다. 구어로만 답했다.
이순자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멎었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손가락이 움찔했지만, 곧 천천히 내려갔다.
서이언은 수첩을 덮었다.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봉투를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을 복도 끝 통역사 대기실 방향으로 두었다. 걸음을 옮겼다. 구두 소리가 복도에 짧게 울렸다.
이순자는 손을 내린 채 서 있었다. 그 손이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서이언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손에 쥔 봉투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살짝 눌렀다.
통역사 대기실 문이 가까워졌다. 손잡이를 돌리기 직전, 왼쪽 어깨 너머로 어머니의 기척을 느꼈다. 복도 중간쯤에서 발걸음이 멈춘 그대로였다. 돌아서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공기의 흐름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기실 책상 위에 서류 봉투를 내려놓았다. 의자에 앉아 봉투에서 소음 측정 기록 사본을 꺼냈다. A4 용지 세 장. 종이가 책상에 닿으며 마른 소리를 냈다.
수첩을 펼쳤다. 메모가 있는 페이지를 찾아 기록 옆에 나란히 벌려 놓았다.
왼쪽은 회사 제출 자료. A구역 89데시벨. 측정 위치는 작업장 네 귀퉁이 벽면.
측정 일시는 사고 한 달 전. 오른쪽은 서이언의 메모. CNC 선반 실측 95데시벨 이상.
보호구 수어 시 손목 꺾임. 새끼손가락 떨림. 시선 왼쪽 아래 고정.
손가락이 메모의 ‘보호구’ 항목을 짚었다. 우상일이 법정에서 보호구 착용을 진술할 때 보였던 패턴들이었다. ‘착용했습니다’라는 수어에서 손목이 평소보다 10도 안쪽으로 꺾였다. ‘보호구’ 단어에서 새끼손가락이 떨렸다.
그리고 시선. 카메라에서 왼쪽 아래로 향하던 시선. 우상일이 무언가를 피할 때 일관되게 보이는 방향이었다.
보호구 교체 기록과 사고 발생 사이의 12분 공란. 유재현이 발견한 그 빈 페이지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우상일만 알고 있었다.
서이언은 수첩을 소음 기록 위로 포갰다. 두 문서가 겹쳐지자 ‘95데시벨’이라는 메모가 ‘보호구 착용’ 항목 바로 위에 놓였다.
소음은 기준치를 초과했을 가능성이 컸다. 보호구는 교체되었지만 확인란은 비어 있었다. 우상일은 보호구 관련 진술에서 일관되게 회피 패턴을 보였다.
개인적 선택. 그 네 글자가 손끝에 닿았다.
통역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원발언의 뉘앙스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 그 너머의 해석은 변호인의 몫이었다. 그리고 지금 서이언이 발견한 수어의 패턴은, 아직 변호인에게 전달되지 않은 정보였다.
수첩을 덮었다. 표지에 손바닥을 올리자 바짝 마른 종이의 결이 전해졌다.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이 켜졌다. 통화 기록을 스크롤했다. 마지막 통화는 열흘 전, 유재현과의 현장 검증 관련 연락이었다.
검색창에 ‘법무법인 유현’을 입력했다. 사무실 번호가 첫 줄에 떠올랐다.
전화번호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터치하기 직전, 엄지가 화면 위에서 잠시 멈췄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내일 아침 걸기로 마음먹었다.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화면은 켜진 채로 남았다. 법무법인 유현의 번호가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떠 있었다.
대기실 창밖으로 법원 앞 가로수 잎이 흔들렸다. 바람이 불자 은행잎 하나가 떨어져 보도블록 위에 내려앉았다. 낙엽이 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서이언은 책상 위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수첩 표지의 코팅된 모서리를 한 번 쓸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