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23화
법원 민원실 안은 조용했다. 접수 창구 앞에 한 사람, 그 뒤로 한 사람. 오전의 빛이 복도 쪽 유리벽을 통해 들어와 대기석 바닥을 길게 가로질렀다.
서이언은 접수 번호표를 뽑지 않았다. 번호표 기계 옆 서류 수령대에서 이미 통지서를 받아든 상태였다. 창구 직원이 “우상일 건 최종 변론, 다음 주 화요일 오전 10시입니다”라고 말했고, 서이언은 고개만 끄덕였다.
통지서를 반으로 접었다. 접힌 선을 따라 엄지를 밀어내리자 종이가 반듯하게 눌렸다. 가방을 열고 수첩과 함께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몸을 돌렸을 때 복도 쪽 출입구 앞에 유재현이 서 있었다.
다크 네이비 수트, 왼손 검지로 오른쪽 커프스 단추를 한 번 누르는 손짓. 유재현이 먼저 시선을 들었다. 통지서를 든 손이 옆으로 내려갔다.
서이언이 걸음을 옮겨 복도로 나왔다. 두 사람 사이, 세 걸음 거리에서 멈췄다.
“일정 확인했습니다.”
서이언의 목소리는 복도 공기보다 낮았다. 유재현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다음 주 화요일.”
“오전 10시.”
유재현의 시선이 서이언의 가방 쪽으로 잠시 내려갔다. 통지서를 넣은 그 주머니. 다시 시선이 올라왔다.
“면담 요청 건도 같이 확인하겠습니다. 우상일 씨 측과 연락해서.”
서이언은 대답 대신 수첩을 꺼냈다. 표지가 손에 익은 촉감으로 닿았다. 엄지가 모서리를 한 번 문질렀다.
“필요한 자료 있으면 미리 알려주십시오.”
“그렇게 하죠.”
유재현의 왼손이 커프스에서 떨어졌다. 손끝이 주머니 옆에서 잠시 머물다 내려갔다.
서이언이 돌아섰다. 가죽 플랫슈즈 소리가 복도 바닥 대리석을 따라 두 번, 세 번. 법원 동편 계단 쪽으로 발걸음이 이어졌다.
유재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통지서를 든 손을 들어 반으로 접었다. 서이언이 접었던 방향과 같은 방향이었다. 접힌 선 위로 손가락을 눌렀다.
계단 입구에서 서이언의 어깨가 오른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유재현의 발은 바닥에 붙어 있었다. 통지서의 종이 온도가 손끝에서 체온으로 변했다.
복도 반대편에서 법원 직원 한 명이 서류 카트를 끌고 지나갔다. 바퀴 소리와 함께 유재현이 몸을 돌렸다. 서쪽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오전 10시 30분, 법무법인 유현의 유리문이 열렸다. 유재현이 안으로 들어서자 정유진이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오른손에는 형광펜, 왼쪽에는 오픈된 케이스 파일.
“최종 변론 기일 잡혔나요.”
“다음 주 화요일.”
유재현이 서류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렸다. 통지서를 꺼내 책상 한쪽에 두었다.
정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흘 뒤면 일주일도 안 남았네. 증거 정리는 거의 끝났고, 남은 건 우상일 씨 최종 진술 준비인데.”
“우상일 씨에게 연락해. 내일이나 모레 면담 잡자고.”
유재현이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넥타이 매듭을 풀지 않고 그대로 앉았다.
“이 사건의 핵심은 소음 수치가 아니야.”
정유진의 형광펜이 멈췄다.
“그가 왜 말하지 못했는지. 변론도 거기서부터 풀어야겠다.”
정유진은 노트를 한 페이지 넘겼다. 볼펜을 들어 무언가 적다가 손을 멈췄다. 시선이 유재현 쪽으로 향했다.
“증거 전략을 바꾸시는 겁니까.”
유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두 걸음 옮겼다. 14층 창밖으로 도심 빌딩들이 오전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유리창에 유재현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정유진이 볼펜을 노트 위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닫는 소리가 났다.
“……알겠습니다.”
의자 바퀴가 바닥을 밀며 정유진이 전화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화기를 들고 우상일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사무실 안으로 작게 울렸다.
유재현은 책상으로 돌아왔다. 통지서 왼쪽에 놓인 낡은 국립국어원 수어 사전. 표지 모서리가 닳아 얇아져 있었다.
통지서를 집어 그 위에 올려놓았다. 사전 표지와 통지서 종이 사이로 미세한 공기층이 눌렸다. 유재현의 손가락이 사전 등뼈를 따라 내려갔다.
“연결됐습니다.”
정유진이 수화기를 어깨에 끼우고 노트를 당겼다. 펜을 다시 집어 들며 고개를 유재현 쪽으로 돌렸다.
유재현은 사전 위 통지서를 한 번 더 내려다봤다. 사전의 낡은 모서리와 통지서의 새 종이가 맞닿은 경계. 손가락이 그 경계를 짚었다.
“우상일 씨, 내일 오후 세 시 가능하시다고 합니다.”
정유진이 수화기를 내리며 말했다. 유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이 사전 위에서 떨어졌다.
유재현은 외부 미팅을 위해 오후 네 시 사무실을 나섰고, 이후 정유진은 다른 업무를 처리하며 저녁까지 자리에 남아 있었다.
법무법인 유현의 14층 사무실은 비어 있었다. 유리벽 너머로 마천루의 불빛들이 저녁 8시의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정유진은 자신의 책상에 가방을 올려둔 뒤 서재 문을 열었다. 유재현이 외부 미팅 전에 산업재해 판례집을 찾아두라고 했었다. 2018년 대법원 판례, 제조업 소음성 난청.
서재 불을 켰다. 형광등이 깜빡이다 푸르스름하게 번졌다. 책장은 방 전체 벽을 채우고 있었고, 법전들의 등뼈가 줄지어 반듯하게 서 있었다. 공기는 책장 사이에 고인 먼지 냄새가 났다.
세 번째 칸, 판례집 코너. 손가락이 책등을 따라 이동했다. 2016, 2017, 2018—
손이 멈췄다.
판례집 옆, 법전들 사이에 책 한 권이 끼워져 있었다. 표지가 판례집보다 옅은 색이라 눈에 띄었다. 『한국수어 초급』. 그 옆에 『한국수어 중급』, 『수어 문법의 이해』.
정유진은 고개를 기울였다. 손가락이 수어 교재의 등뼈를 따라 내려갔다. 세 권 모두 표지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한 번도 펴보지 않은 책의 각도가 아니었다.
교재를 빼내려다 시선이 사진으로 갔다.
교재 뒤쪽, 책장 깊숙이 끼워진 낡은 액자. 유리 표면에 얇은 먼지가 앉아 있었지만 형광등 불빛 아래 사진 속 풍경은 선명했다. 대학 건물 앞 잔디밭. 담쟁이덩굴이 반쯤 올라온 석재 벽면. 스무 명 남짓의 젊은 얼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손가락이 액자를 살며시 당겼다. 먼지가 유리 위에서 미끄러졌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 잿빛 도는 흑발을 낮게 묶은 포니테일, 단정한 인상의 여성. 왼쪽에서 두 번째.
지금보다 젊은 유재현이 앞줄에 서 있었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지만 입가에 옅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사진 속에서만 웃는 얼굴.
서이언이었다.
정유진의 엄지가 유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사진 속 두 사람 사이에는 일곱 명의 다른 학생들이 있었고, 바람이 불었는지 여럿의 머리카락이 같은 방향으로 흩날려 있었다.
입술이 달싹였다가 닫혔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십 초쯤 지났을까. 정유진은 액자를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책장 유리문에 손바닥이 닿았다. 문을 닫자 경첩이 가볍게 끼익 소리를 냈다.
유리문 너머로 사진은 다시 책장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수어 교재들과 판례집들 사이에 끼워진 채, 원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정유진은 서재 불을 껐다. 문을 닫고 사무실로 걸어나왔다. 발소리가 카펫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책상 앞에 섰다. 의자를 당겨 앉았다. 모니터를 켜지 않았다. 까만 화면 속에 사무실 형광등과 자신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비쳤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 올려졌다. 움직이지 않았다.
사진 속 대학생 유재현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무표정한 변호사의 책장 깊숙한 곳에, 십 년도 더 된 단체사진이 닳은 수어 교재들과 함께 꽂혀 있었다. 그리고 사진 속 여성은 지금 이 사건의 통역사였다.
정유진은 키보드에서 손을 내렸다.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가볍게 말렸다. 모니터 화면은 꺼진 채로 남았다.
밤 10시. 서이언의 자택 서재.
책상 위에 노트북이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우상일의 2차 공판 진술 영상이 멈춰 있었다. 타임스탬프 47분 12초. 보호구 착용 여부를 묻는 질문 직전.
서이언은 속기록을 옆으로 밀었다. 인쇄된 글자들 사이로 연필로 그은 밑줄이 여러 개였다. ‘보호구를...’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착용했습니다’— 손목이 꺾이고 새끼손가락이 떨렸던 그 대목들.
노트북을 재생했다. 우상일의 손이 화면 속에서 움직였다. ‘보호구’ 수어.
엄지와 검지로 귀를 막는 동작. 평소보다 손목이 안쪽으로 꺾였다. 새끼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시선이 카메라 왼쪽 아래로 향했다.
정지. 되감기. 다시 재생.
서이언은 수첩을 펼쳤다. 바짝 마른 종이의 결이 손끝에 닿았다. 소음 측정 기록 사본을 수첩 옆에 포개었다. 89데시벨이라는 숫자가 인쇄된 칸 옆으로, 연필로 쓴 ‘95데시벨’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연필을 들었다. 수첩의 빈 페이지에 적었다.
회피 포인트: 보호구, 벗은 이유 미진술.
글씨는 작고 반듯했다. 연필심이 종이에 닿는 소리만 조용한 서재에 남았다.
서이언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수첩 표지를 한 번 쓸었다. 코팅된 모서리가 손톱 밑에 닿았다.
눈을 감았다.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기대었다. 책상 위 노트북 화면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우상일의 멈춘 손동작이 정지된 채로 떠 있었다.
창밖은 어두웠다. 가로등 불빛이 블라인드 사이로 얇게 갈라져 서재 바닥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