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24화
며칠 뒤 오후 2시. 법원 3층 변호사 접견실.
형광등이 흰 벽에 닿아 번졌다. 탁자 위에는 법원 비치용 모래시계. 모래는 전부 아래쪽에 쌓여 멈춰 있었다.
유재현이 서류 파일을 덮었다.
“보호구 관련해서 추가로 확인할 지점이 있나.”
서이언은 수첩을 폈다. 접힌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1차 공판. ‘보호구를...’에서 문장이 끊겼습니다. 2차 공판에서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후 시선이 왼쪽 아래로 고정됐고, 손목 각도가 평소보다 안쪽으로 꺾였습니다.”
유재현의 왼손 검지가 오른쪽 커프스 단추에 닿았다. 눌렀다가 놓았다.
“빈도는.”
“‘보호구’ 단어가 나올 때마다 새끼손가락 떨림이 있었습니다. ‘착용했습니다’라는 수어에서는 손목이 약 10도 정도 더 꺾였고요. 세 차례 공판 모두 동일한 패턴입니다.”
서이언은 수첩의 기록을 손끝으로 따라 내려갔다.
“‘소리’ 수어에서도 속도가 절반으로 저하됐습니다. 카메라를 향하지 않고 왼쪽 아래를 보는 것도 일관됐고.”
유재현이 펜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증인이 무언가를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군.”
“말하지 못하는 건지, 말하지 않는 건지는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서이언이 수첩을 덮었다. 코팅된 표지가 손바닥에 닿아 미끄러졌다.
유재현은 잠시 그 손을 보다가 시선을 탁자 위 모래시계로 옮겼다.
“어느 쪽이든 변론에서 다뤄야 할 지점이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문이 열리고 우상일이 들어왔다. 낡은 정장 차림에 이명 차폐 장치를 귀에 꽂고 있었다. 셔츠 단추 하나가 다른 색이었다.
우상일은 탁자를 향해 걸어오다 걸음을 멈췄다. 서이언과 유재현 사이 빈 의자를 확인했다.
“앉으십시오.”
유재현이 의자를 가리켰다. 서이언은 그 말을 수어로 통역했다. 손동작이 평소보다 컸다.
우상일이 의자에 앉았다. 오른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용접 화상 흉터가 별자리처럼 번져 있었다.
유재현이 서류를 한 장 꺼냈다.
“오늘은 최종 변론 전 마지막 면담입니다. 사고 당일 상황을 다시 한 번 확인하려고 합니다.”
서이언이 통역했다. 우상일의 눈이 유재현의 입술을 따라 움직였다. 느리게 끄덕였다.
유재현이 질문을 이었다.
“사고 당일 오후 3시 45분, 방음 귀마개를 교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교체하셨습니까.”
서이언의 손이 공기 중에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방음 귀마개’ ‘교체’ ‘오후 3시 45분’ 수어가 정확한 각도로 이어졌다.
우상일의 손이 탁자 위에서 미세하게 움찔했다. 이내 멈췄다. 시선이 유재현의 얼굴에서 탁자 위 모래시계로 옮겨졌다.
모래는 여전히 아래쪽에 쌓인 채였다.
“...교체했습니다.”
우상일의 수어가 나왔다. 손목이 안쪽으로 꺾였다. 새끼손가락이 떨렸다.
서이언이 통역했다.
“증인은 교체했다고 진술합니다.”
유재현이 펜을 들었다. 서류 여백에 짧게 메모했다. 시선을 들지 않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교체 후 계속 착용하고 계셨습니까.”
서이언이 통역했다. 우상일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모래시계를 바라본 채였다. 오른손 엄지를 왼손이 감싸쥐었다.
십 초. 십오 초.
우상일의 입술이 달싹였다. 구어가 먼저 나왔다.
“그게...”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문장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왼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손가락이 공기 중에서 멈췄다.
모래시계 유리벽 너머로 모래알이 보였다. 움직이지 않는 모래알.
“...피곤했습니다.”
수어가 시작됐다. 느리고 서툴렀다. ‘피곤하다’라는 동작이 두 번 반복됐다.
“그날 야근이... 사흘째였어요. 귀마개가...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오른손이 귀로 올라갔다. 이명 차폐 장치 위로 손가락이 닿았다. ‘벗다’라는 수어가 반쯤 만들어졌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떨렸다.
모래시계를 감싸쥐었던 왼손이 풀렸다.
“잠깐 벗었습니다. 제가... 벗었습니다. 보호구를.”
서이언의 손이 통역을 시작했다. ‘증인이’ ‘보호구를’ ‘스스로’ ‘벗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정확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유재현이 메모하던 펜을 내려놓았다. 펜이 탁자 위에서 가볍게 구르다 멈췄다.
우상일의 두 손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어깨가 앞으로 구부러졌다. 용접 흉터가 있는 손이 바지 주름을 움켜쥐었다.
“그때... 귀마개 벗은 지 오 분도 안 돼서... 기계 소리가...”
손이 다시 올라왔다. ‘소리’ 수어. 느렸다. 카메라는 없었지만 시선은 왼쪽 아래로 향했다.
서이언은 그 손끝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통역이 이어지는 동안 접견실 안은 조용했다. 유리벽 너머 복도에서 정수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한 차례 끊어졌다. 우상일의 시선이 아내 쪽으로 순간 닿았다가 떨어졌다. 서이언은 그걸 보지 못했고, 손은 이미 다음 진술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우상일의 손이 멈췄다. ‘보호구’ 수어를 한 지 3초쯤 지났을 때였다. 손목이 안쪽으로 꺾이고, 새끼손가락이 떨렸다. 그리고 손이 내려왔다. 천천히, 공기가 무거워진 것처럼.
서이언의 손이 허공에서 함께 멈췄다.
접견실 탁자 위, 유재현의 오른손에 쥐어진 만년필 뚜껑이 짧게 딸깍 소리를 냈다. 열렸다 닫혔다. 입은 열지 않았다. 시선은 우상일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이언은 숨을 들이쉬었다. 손끝이 다시 올라갔다.
우상일의 손이 움직임을 재개했다. *내가. 귀마개.
벗었다.* 동작은 느렸다. ‘벗었다’에서 검지가 관자놀이를 짚는 각도가 평소보다 낮았다. 손이 다시 무릎으로 떨어졌다.
서이언의 목소리가 접견실에 닿았다.
“증인은… 사고 당일, 보호구를 본인이 벗었다고 진술합니다.”
법정 휴정 때와 똑같은 음색. 항상 그래 왔던 속도. 다만 마지막 음절의 끝이 평소보다 반 박자 빨리 끊겼다.
유재현이 만년필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뚜껑은 닫힌 채였다.
유리벽 너머 복도에서 우상일의 아내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손수건이 손등 위로 올라간 손가락 사이로 떨렸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어깨만 두 번 들썩였다.
우상일이 고개를 숙였다.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용접 화상 흉터가 있는 손이 무릎 위에서 펼쳐졌다. 손가락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서이언은 손을 내렸다. 왼손 검지가 수첩 표지의 코팅된 모서리를 한 번 쓸었다.
정적.
유재현이 자세를 바로 했다. 의자 등받이가 가죽 마찰음을 냈다.
“지금 진술은 이 사건의 법적 쟁점을 변경합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우상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보호구 미착용 상태에서 발생한 사고는 산재보험법상 인정 요건이 달라집니다. 회사 측은 이 진술을 증인의 과실로 주장할 겁니다.”
우상일의 아내가 유리벽에 한 걸음 다가섰다. 손수건이 유리에서 10센티미터 거리에서 멈췄다. 입을 가린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법정에서 이 사실을 진술하지 않을 경우, 위증에 해당합니다.”
유재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 왼손 검지가 넥타이 매듭을 스치듯 지나갔다.
“의뢰인께서 선택하셔야 합니다. 현재까지의 진술을 유지하며 소송을 진행할지. 오늘 진술한 대로 사실을 법정에 제출할지.”
우상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유재현을 향했다. 잠시 후,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표지가 닳고 모서리가 접힌, 작업복 주머니에 오래 넣어두었던 듯한 수첩이었다.
볼펜을 찾는 손길. 유재현이 자신의 만년필을 건네려다 멈췄다. 서이언이 조용히 펜을 탁자 위로 밀어 넣었다. 우상일은 그 펜을 집어 들었다.
글씨는 느렸다. 손에 힘이 들어가서 획이 두꺼웠다.
사실대로
두 글자. 수첩에서 페이지를 뜯었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접견실에 울렸다. 그 종이를 접어서 유재현 쪽으로 밀었다.
유재현은 종이를 펼쳤다. 3초 동안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그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다시 반으로 접었다. 서류 가방을 열고 안쪽 칸에 집어넣었다.
“알겠습니다.”
서류 가방을 닫았다. 잠금장치가 두 번 딸깍거렸다. 시선을 들어 서이언을 바라보았다.
“최종 변론의 방향을 바꾸겠습니다.”
서이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수첩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유재현이 일어났다.
“내일 오전에 사무실로 오십시오. 구체적인 변론 전략을 논의하겠습니다.”
우상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자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짧게 났다. 유리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아내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남편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입술이 ‘괜찮아’라고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유리벽을 통과하지 못했다.
우상일이 접견실 문을 열었다. 아내가 그의 팔을 잡았다. 손수건이 작업복 소매에 닿았다.
두 사람은 복도로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 끝에서 점차 작아졌다. 여섯 걸음쯤에서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접견실에는 서이언과 유재현이 남았다.
탁자 위에 우상일의 수첩에서 뜯긴 자리가 남은 빈 수첩이 놓여 있었다. 닫힌 서류 가방이 그 옆에 있었다. 유재현의 만년필은 여전히 뚜껑이 닫힌 채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서이언은 접견실 출구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린 채 서 있었다. 시선은 열린 문 너머 복도의 빈 의자에 가 있었다.
유재현이 서류 가방의 손잡이를 잡았다. 가죽이 손바닥에 닿는 소리가 조용한 접견실에 스몄다.
“통역사님.”
서이언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예.”
“오늘 통역은 기록에 남습니다. 증인의 원발언 그대로.”
서이언의 손끝이 수첩 모서리에서 미세하게 멈췄다.
“네, 변호사님.”
수첩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짧고 깔끔했다. 통역사 신분증이 가슴 높이에서 흔들리다 멈췄다.
서이언은 접견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의 공기는 법정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마른 종이 냄새가 났다.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접견실 안, 유재현은 잠시 탁자 위의 빈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손 검지가 왼쪽 커프스 단추를 찾아갔다. 한 번 눌렀다 떼었다.
서류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걸음은 평소보다 느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