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들리지 않는 진심

25화

법정의 공기는 마른 종이 냄새였다.

오후 3시 10분. 제12민사부 법정은 방청석까지 가득 찼다. 우상일의 아내가 세 번째 줄에 앉았다. 두 줄 뒤에는 서명근과 이순자가 나란히 자리했다. 서명근은 작업복을 벗어 놓은 상태였고, 이순자의 손은 무릎 위에서 수어를 반쯤 쥔 채 멈춰 있었다.

맹주원이 호출했다.

“증인 우상일, 증인석으로.”

우상일이 방청석 옆 통로에서 일어났다. 걸음이 더뎠다. 구두 밑창이 마룻바닥에 닿는 소리가 법정의 정적을 한 겹씩 벗겨냈다. 자리에 앉을 무렵, 귀에 꽂은 이명 차폐 장치를 한 번 만졌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아내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서이언은 통역사 대기실을 나서기 전, 낡은 수첩을 서랍에 넣고 새 수첩을 꺼냈다. 표지는 전과 같은 무늬 없는 회색.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펜을 집어 왼쪽 주머니에 꽂았다.

법정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청석의 이순자가 고개를 약간 들었다. 서이언은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증인석 옆 지정된 위치로 걸어갔다. 통역사 배지는 가슴 높이에 수평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맹주원이 말했다.

“통역인, 선서.”

서이언은 오른손을 들었다. 손가락은 흔들리지 않았다.

“본인은 통역인으로서 양심에 따라 성실하게 통역할 것을 선서합니다.”

목소리는 평온했다. 수첩을 펼쳐 증인석을 향해 왼쪽으로 약간 몸을 틀었다. 펜을 쥔 손이 수첩 첫 줄에 닿았다.

맹주원이 증인석을 바라보았다.

“증인은 직전까지의 진술이 모두 사실임을 재확인합니까.”

서이언의 손이 허공에서 문장을 그렸다. 우상일은 그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 위에서 손이 올라왔다. 호흡이 한 박자 빨라진 게 보였다.

네.

서이언이 통역했다.

“예.”

유재현이 피고 측 변호사석에서 일어났다. 단추를 채운 수트 소매가 탁자 모서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류는 한 장도 들지 않았다. 앞으로 반 걸음 다가섰다.

“증인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맹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재현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또렷했다.

“사고 당일,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었습니까.”

서이언의 손이 공기를 가르며 번역했다. 우상일의 눈이 그 손을 따라 움직였다. 잠시 뜸을 들였다. 목젖이 한 번 올라갔다 내려갔다.

움직이기 시작한 손은 천천히였지만 망설임이 없었다.

아닙니다. 내가 벗었습니다.

서이언의 입술이 살짝 다물렸다. 수첩 위의 펜촉이 1초간 멈추었다. 이내 고개를 들었다.

“증인은 사고 당일 본인이 보호구를 벗었다고 진술합니다.”

속기사의 키보드 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방청석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났다. 우상일의 아내가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가장자리가 손바닥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저 사람, 왜 저래……”

서명근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순자가 그의 손목을 짧게 쥐었다.

유재현은 시선을 우상일에게 고정했다.

“벗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이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우상일은 답하기 전에 나무 난간 모서리를 오른손으로 한 번 짚었다.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가 풀렸다.

사흘 동안 야근이었습니다. 귀가 먹먹하고 답답해서.

잠깐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이언의 손끝이 수첩 위에서 따라 움직였다. 손목 안쪽의 맥박이 조금 빨라진 걸 느꼈다.

“사흘째 야근으로 귀가 답답해 잠시 벗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의 손수건이 무릎 위에서 더 작게 접혔다. 소리는 내지 않았고, 입술만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만해요, 이제……”

아내가 숨소리처럼 토해냈다.

유재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벗은 지 얼마나 지나 사고가 발생했습니까.”

오 분도 안 됐습니다.

“오 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법정의 침묵이 1초 길어졌다. 상대 측 변호사가 펜을 집어 메모지에 짧게 적었다.

유재현이 질문을 이어갔다.

“사고 이전에, 회사에 보호구 교체를 요청한 적이 있습니까.”

서이언의 손이 번역했다. 우상일의 시선은 이번에 움직이는 손끝을 벗어나 정면의 벽에 고정되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손이 올라왔다. 이전보다 빨랐고 망설임도 없었다.

세 번,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귀마개가 낡아서 소음이 다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바꿔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서이언의 손은 우상일의 수어보다 반 박자 빨랐다. 수첩 위 펜은 멈추지 않았다.

“증인은 소음 때문에 귀마개 교체를 세 번 요청했으나, 회사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고 진술합니다.”

속기사의 키보드가 다시 빨라졌다. 방청석 끝자리에서 서명근의 손이 무릎 위에 꽉 쥐어졌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이순자가 손을 옆으로 움직여 서명근의 손목 위에 얹자, 쥐었던 힘이 약간 느슨해졌다.

“나도 똑같은 일을 겪었어.”

서명근의 목소리가 떨림을 머금었다.

유재현은 잠시 질문을 멈추고 증인석을 바라보았다. 우상일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유재현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서이언의 손이 질문을 번역하는 동안, 우상일의 시선은 방청석으로 향했다. 아내가 앉은 자리였다. 두 사람의 눈이 유리벽도 없이 공기 중에서 만났다. 아내의 눈가가 붉어지고 있었다.

우상일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느렸다. 손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들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이언의 손끝이 멈추지 않았다. 통역은 정확했다.

“증인은 말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 진술합니다.”

방청석의 아내가 손수건을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입가를 눌렀다. 어깨가 떨렸다. 소리를 삼켰다.

“여보…….”

울먹임이 새어 나왔다.

속기록이 차곡차곡 쌓였다. 유재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피고 쪽 변호사가 즉시 일어나 넥타이를 한 번 매만졌다.

“증인은 본인의 보호구 미착용으로 사고가 발생했음을 인정한 셈입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상 부주의에 해당합니다. 재해보상 요건이——”

맹주원이 손을 들었다.

“거기까지.”

말을 멈춘 기업 측 변호인을 향해, 맹주원의 손이 방청석 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안경줄이 목에 닿아 흔들리지 않았다.

“본 법정은 수어 통역인을 통해 전달된 증인의 진술을 구어 증언과 동등한 증거능력으로 인정합니다.”

목소리는 무표정했다. 어느 문장에도 악센트가 실리지 않았다.

“증인의 손끝이 말한 모든 것은 이 재판의 공식 기록입니다.”

속기사 쪽을 바라보았다.

“속기록에 통역 내용과 수어 원발언의 동시 기록을 명합니다.”

맞은편 변호사가 반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탁자 위에 메모지를 내려놓았다. 네모 반듯하게 접힌 종이가 탁자 모서리에 닿아 멈췄다.

“재판장님, 하지만——”

“이의 있습니다.”

유재현이 낮게 끊었다.

서이언은 수첩에 ‘기록 완료’라고 적었다. 글씨는 또렷했다. 펜 뚜껑을 닫아 왼쪽 주머니에 넣고, 수첩을 덮었다.

맹주원이 말했다.

“증인 신문을 종료합니다. 다음 기일은 별도 고지합니다.”

우상일이 증인석에서 일어났다. 구두 소리가 다시 났다. 경비원이 다가와 팔을 짚자, 아내가 앉은 방청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내도 일어나 손수건을 든 손으로 남편의 소매를 잡았다.

“집에 가요.”

아내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법정 문을 향했다.

서이언은 수첩을 가방에 넣고 지퍼를 올렸다. 짧은 마찰음이 났다. 그녀가 일어서자 가방 끈이 어깨에 닿았다.

방청석 끝자리에서 서명근의 손이 이순자의 손을 감쌌다. 두 손은 무릎 위에 포개졌다. 서명근은 입술을 열지 않았고, 이순자도 수어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서이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마운 분이야.”

서명근이 손바닥으로 이순자의 손등을 쓸며 말했다.

변호사석에서 유재현이 서류를 정리했다. 오른손이 잠시 멈추었다. 검지가 왼쪽 커프스 단추를 찾아갔다. 금속을 한 번, 가볍게 눌렀다 떼었다.

서류 가방을 열자, 가죽 안쪽에 닳은 국립국어원 수어 사전이 보였다. 유재현은 책 모서리를 손끝으로 확인하고 가방을 닫았다. 시선이 통역사석을 향했지만, 이미 서이언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유재현의 입에서 말이 막 빠져나왔다. 그러나 발걸음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퇴정하는 사람들 사이로 서이언의 구두 굽이 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법정 복도로 나오자 공기가 바뀌었다. 마른 종이 냄새는 걷히고, 대신 대리석 바닥의 차가운 습기가 발목까지 올라왔다. 서이언은 복도 벽면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4시 5분이었다.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빨라졌다. 정유진이었다. 손에는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고, 평소보다 걸음이 빨랐다. 유재현이 법정 문을 막 나선 순간, 정유진이 앞에 섰다.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변호사님, 잠시.”

서이언은 복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손에 쥔 수첩 표지에, 손끝에 남은 힘이 얇은 자국을 냈다.

“수고했어요, 서이언 씨.”

자신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들리지 않는 진심2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