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26화
며칠 뒤, 오전 10시.
법무법인 유현 회의실 유리문 너머로 맞은편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탁자 위에는 우상일의 보호구 자진 해제 진술이 인용된 속기록 사본이 펼쳐져 있었다.
“증인 스스로 보호구를 벗었다고 진술한 이상, 이 사건은 산재보험법상 중대한 과실에 의한 면책 사유에 해당합니다.”
사본 모서리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는 소리.
“사고 발생 시점에 귀마개는 바닥에 있었고, 증인은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법정 기록입니다.”
유재현은 탁자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이 커피잔 손잡이를 감싸고 있었다.
“보호구 미착용 상태에서 발생한 사고는 사용자의 안전조치 의무 위반과 인과관계를 별도로 입증해야 합니다. 그건 이미——”
“보호구를 벗은 이유가 피로 때문이라면, 그 피로가 업무에서 비롯되었다는 입증 책임은 원고 측에 있습니다.”
상대 측이 말을 끊었다.
커피잔이 유리 탁자에 닿았다. 짧은 도자기 소리.
정유진이 옆자리에서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키보드 위에 얹은 손이 멈춰 있었다.
“증인이 사흘 연속 야근을 했다는 진술은 이미——”
“야근 시간과 보호구 해제 사이의 직접적 인과를 증명할 작업장 내부 규정이 없습니다. 증인의 주관적 피로감은 객관적 증거가 아닙니다.”
유재현의 검지가 커피잔 가장자리를 한 번 쓸었다.
서류 가방이 닫히는 소리.
“다음 기일 전에 화해 권고안을 검토해보시죠.”
문이 닫혔다.
회의실에 침묵이 들어찼다. 정유진이 노트북을 닫았다.
“……화해 권고안이라도 받아들일 거예요?”
“아니.”
유재현이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 너머 14층 아래 도로가 내려다보였다.
“우상일 씨가 보호구를 벗은 이유는 단순한 피로가 아니야. 회사가 교체 요청을 묵살한 구조적 문제다.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증인이 스스로 벗었다는 진술 하나로 공격이 이렇게 들어올 줄은.”
목소리에서 평소의 경쾌함이 사라져 있었다. 유재현이 커피잔을 집어 올렸다. 손목이 약간 경직된 각도로 꺾였다.
“증거 보강할 자료 찾아봐. 작업장 안전점검 로그 원본이랑 교체 요청 기록 말고도.”
“알겠습니다.”
정유진이 노트북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변호사님.”
유재현이 창밖을 향한 채로 고개를 약간 틀었다.
“수어 사전, 가방에 넣으셨어요?”
“……아직.”
정유진은 더 묻지 않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커피잔에서 김이 올랐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오후 2시.
법원 통역사 대기실.
서이언은 책상 위에 우상일 사건 관련 파일을 펼쳐두고 있었다. 속기록 사본, 수어 진술 영상이 담긴 태블릿, 새 회색 수첩.
수첩을 펼쳤다. ‘진술 일관성 검토’라고 적힌 페이지 위쪽에, 아버지 목공소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가 끼워져 있었다.
언제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번호였다.
손가락이 메모지 가장자리를 짚었다. 번호가 적힌 잉크는 약간 바랬고, 종이 귀퉁이가 접혀 있었다.
메모지를 수첩에서 빼내지 않았다.
통역사 대기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책상 모서리를 반쯤 비추고 있었다.
태블릿을 켜지 않았다. 속기록 사본도 넘기지 않았다.
시선이 메모지의 번호 위에 멈춰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수어로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 법정 방청석 끝에서, 두 손이 무릎 위에 포개져 있던 모습만 떠올랐다.
메모지를 집어 수첩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수첩을 덮었다. 펜을 왼쪽 주머니에 꽂고, 태블릿과 속기록 파일을 가방에 넣었다. 수첩은 가방 안쪽 지퍼 칸에 닿아 멈췄다.
지퍼를 올렸다.
가방 끈을 어깨에 걸치고 일어났다. 구두 굽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대기실 건물 밖으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버스카드를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다.
법원 현관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현관을 나서자 오후의 열기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십 분 남짓. 차창에 기대어 스쳐가는 풍경 속으로 메모지의 번호는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다. 목공소가 있는 읍내에 내려 좁은 골목을 접어들 무렵, 대패 소리가 끊긴 적막이 셔터 아래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목공소 셔터가 반쯤 내려져 있었다.
허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대패 소리가 멈춘 작업장에는 나무 부스러기 냄새만 가득했다. 먼지가 햇빛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서명근은 작업대 앞에 서 있었다.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구두 굽 소리에 오른쪽 어깨가 먼저 반응했다. 진동을 감지한 것이었다.
서이언은 작업대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 멈췄다. 가방을 내려놓지 않았다. 손잡이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서명근이 돌아섰다. 얼굴에 잠시 반가움이 스쳤다. 그러나 딸의 표정을 읽자,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먼저 수어를 시작했다. 손의 움직임은 느렸고, 마지막 동작에서 손목이 약간 꺾였다.
'그날 밤, 유재현에게.'
서명근의 손바닥이 작업대 위에 평평하게 내려앉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어요.'
긴 침묵이 흘렀다. 목공소 구석에 쌓인 목재 더미에서 미세한 수축음이 났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였다. 왼손 검지와 중지가 작업대 모서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대패질하듯, 그러나 나무는 없었다.
아버지의 손이 올라왔다.
수어는 느렸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그날…'
손이 멈췄다. 다시 시작했다.
'그 청년에게, 내가 말했다.'
오른손이 가슴 앞에서 멈추고, 왼손이 천천히 바깥으로 밀려 나갔다.
'떠나보내라고.'
서이언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만 깜빡였다.
아버지의 손이 계속 움직였다. 손가락 떨림이 팔 전체로 번졌다.
'네가 우리 때문에 더 멀리 가지 못할까 봐.'
양손이 가슴께에서 멈췄다가,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두려웠다.'
가방 끈에서 손이 미끄러졌다. 끈이 어깨에 닿은 채로 멈췄다.
다시 올라온 아버지의 손은 더 느려졌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네 방에서 그가 나오는 걸 봤을 때, 네가 행복해 보여서…'
허공에서 손이 떨렸다.
'무서웠다.'
서이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곧바로 닫혔다.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수어가 계속됐다.
'네가 우리 때문에 기회를 포기할까 봐. 통역사를 포기할까 봐.'
손이 멈추지 않고 떨렸다.
'그래서 부탁했다. 떠나달라고.'
마지막 수어가 끝났다. 두 손이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와 작업대 위에 놓였다. 손바닥이 나무에 닿자, 떨림이 더 심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어도 하지 않았다.
옆구리에서 손이 약간 올라왔다가, 곧바로 내려갔다. 눈이 아버지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손가락 마디에 박힌 나무 먼지, 못 굳은살, 금이 간 손톱.
한 걸음 물러섰다.
구두 굽이 시멘트 바닥에 긁혔다. 그 진동에 서명근의 몸이 굳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문가에 이순자가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손에는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고, 비닐봉지가 바람에 살짝 부풀었다. 그러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입술이 꼭 다물려 있었고, 눈가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다.
어머니의 눈이 남편의 떨리는 손을 훑고, 딸의 굳은 옆얼굴에 닿았다. 이순자는 장바구니를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서이언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호흡이 한 번, 짧게 끊겼다. 이순자는 아무 수어도 하지 않았다. 장바구니 손잡이를 움켜쥔 채였다.
몸을 돌렸다. 가방 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팔꿈치에 걸렸다.
걸었다. 목공소 출입문을 지나쳤다. 구두 소리가 규칙적으로 바닥을 쳤다.
뒤에서 대패를 집는 소리가 들렸다. 손잡이가 나무에 스치는 마찰음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뭔가가 떨어졌다. 나무 바닥에 대패가 굴러가는 둔탁한 소리.
멈추지 않았다.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오후의 햇살이 담벼락에 반쯤 걸쳐 있었다. 벽돌 틈에서 마른 풀잎이 바람에 스쳤다. 발걸음이 느려졌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표지 모서리에 새겨진 '기록 완료' 글씨가 손끝에 닿았다. 펼치지도, 덮지도 않은 채 손바닥 위에 얹어두었다.
발걸음이 완전히 멈췄다.
골목은 조용했다. 저 멀리 차 소리가 들렸다.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페이지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때 떠오른 것은, 십 년 전 그날 밤이 아니었다.
그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의 집 앞에 서 있던 자신. 초인종을 누르기 직전의 손. 그리고 열리지 않았던 문.
아버지가 말했다. 유재현에게 떠나달라고 부탁했다고.
그런데 유재현은 그 부탁을 지켰다. 십 년 동안. 한 마디 변명 없이.
손가락이 수첩 위에서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골목 끝에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아직 밝은 시간이었지만, 자동 센서가 그림자에 반응한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부탁을 들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하지만 수어를 배운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수첩을 천천히 덮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표지가 약간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