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들리지 않는 진심

27화

통역사 대기실은 비어 있었다. 오후 두 시, 복도의 발소리가 간간이 문 너머를 스쳤다.

탁자 앞에 앉아 우상일 사건 파일을 펼쳤다. 사고 당일 작업 일지 사본, 소음 측정표, 보호구 교체 기록.

종이 위 숫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89데시벨. 95데시벨. 오후 3시 45분.

'보호구 자진 해제'라고 적힌 유재현의 메모에 시선이 닿았다. 작고 단단한 글씨.

페이지를 넘기려던 손가락이 멈췄다.

아버지의 손이 겹쳐 보였다. 대패 위에서 떨리던 손. '내가… 그 청년에게 너를…'이라고 시작하던 수어. 엄지와 검지가 맞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던 모습.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파일을 덮었다. 표지가 책상에 닿으며 마른 소리를 냈다. 손가락이 아직 종이 모서리에 걸려 있었다.

탁자 위에는 회색 수첩. '진술 일관성 검토'라고 적은 페이지가 접힌 채 놓여 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젊은 법원 직원이 문간에 서 있었다.

“서이언 통역사님. 맹판사님께서 찾으십니다.”

직원은 그 한 마디만 남기고 고개를 숙였다. 발걸음이 복도로 물러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이 파일 표지를 한 번 더 짚었다. 종이 온도가 손바닥에 차갑게 남았다.

파일은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수첩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어깨에 가방 끈을 걸었다.

판사실 문은 열려 있었다. 안쪽에서 차 끓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노크를 하자 맹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탁자 위에 작은 찻주전자 두 개가 놓여 있고, 방 안은 조용했다.

맹주원이 손을 올렸다. 오른손을 펴서 가볍게 아래로 내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앉아요, 서 통역사.

문을 닫고 들어갔다. 그가 수어로 말하는 동안, 다른 손은 내 앞으로 찻잔을 밀어두고 있었다. 손목에 닿는 검의 열기. 나는 의자에 앉았다.

“부르셨습니까.”

맹주원은 내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목에 걸린 안경줄이 움직였다. 변색된 중간 부분에 창밖 빛이 닿아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잔을 내려놓은 손이 다시 올라왔다. 열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내가 왜 통역 절차에 집착하는지 이야기한 적이 없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손을 내렸던 맹주원이 오른손 검지로 찻잔 손잡이를 한 번 톡 쳤다.

그리고 다시 수어가 시작되었다.

이십 년 전이다.

손동작이 느렸다. 오래된 문서를 한 장씩 넘기듯, 한 단어 한 단어에 간격을 두었다.

청각장애인 원고가 있었다. 산업재해 소송이었어. 통역이 늦어져서, 초반 증인 신문이 통역 없이 진행됐다.

왼손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오른손 검지가 왼쪽 귀를 가리켰다.

방청석의 가족이 소리쳤다. 증인의 말이 뭐냐고. 법정 경위가 제압했다. 의자가 넘어졌다.

맹주원의 손이 탁자 위에 멈췄다. 두 손바닥을 펴서 마주 본 뒤, 천천히 내렸다.

“내 뒤통수를 쳤습니다. 이 귀는 그렇게 잃었소.”

목소리가 낮았다. 수어 없이 말할 때의 목소리는 더 건조했다. 나는 찻잔을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나는 아무 말도 전하지 못했다. 통역 없는 증언을 기록으로 남겼다. 원고는 패소했다.

탁자 서랍을 열었다. 안쪽에서 오래된 서류 봉투가 나왔다. 가장자리가 닳고 누렇게 변색된 종이. 봉투를 열지 않은 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봉투의 닳은 귀퉁이를 바라보았다. 찻잔 표면을 따라 오른손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사건 이후로 법원에 남으셨군요.”

“남은 게 아니오.”

맹주원이 손을 들어 수어로 다시 말했다.

절차를 바꿨다. 속기록에 수어 통역을 별도 기록하고, 통역 없는 증인 신문은 진행할 수 없도록 했다. 통역사 선서를 증인보다 먼저 받는다.

그의 손이 탁자 위에 잠시 멈췄다. 오른손 엄지가 검지 옆을 문질렀다.

당신이 앉아서 일하는 그 자리도, 그렇게 만든 거요.

찻주전자의 김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손을 올려 잠시 멈췄다가, 수어로 천천히 물었다.

왜 지금 말씀하십니까.

맹주원은 찻주전자를 집어 내 찻잔에 차를 더 따랐다. 찻물이 차가운 벽에 닿으며 소리가 났다. 주전자를 내려놓은 손이 다시 올라왔다.

내일 최종 변론이다. 우상일의 진술은 진실이다. 보호구를 벗은 것도, 회사가 교체를 거부한 것도, 사흘간의 야근도.

잠시 멈췄다.

하지만 법정에서 진실은 통역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찻잔을 들어 내 앞으로 한 뼘 더 밀었다. 손가락이 찻잔 받침 가장자리를 짚은 채였다.

통역은 누군가의 진심을 전달하는 마지막 통로요.

나는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검지와 중지 사이의 펜 굳은살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버지의 수어가 떠올랐다. 떨리던 손가락. 대패에서 미끄러지던 손.

탁자 위에 올라간 내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맹주원은 더 말하지 않았다.

손등에 찻잔의 열기가 닿았다. 천천히 손을 내렸다.

침묵이 몇 초간 방 안을 채웠다. 저 멀리 법정 복도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맹주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이 문 쪽을 향해 짧게 움직였다.

가도 좋다는 뜻이었다.

찻잔을 한 모금 마셨다. 식은 차는 썼다. 잔을 받침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맹주원은 이미 탁자 위의 서류 봉투를 서랍에 넣고 있었다. 닳은 종이 모서리가 서랍 속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숙였다. 그는 손을 들어 답하지 않았다.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복도로 나왔다. 판사실 문을 등 뒤로 닫았다.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수첩은 가방 안에 있었고, 우상일의 파일은 대기실 탁자 위에 남아 있었다.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두 시 사십 분. 시침과 분침 사이로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들었다.

나는 대기실 쪽이 아닌, 법원 정문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 구두 소리가 긴 복도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법무법인 유현의 사무실. 늦은 오후의 빛이 블라인드 틈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유재현은 책상 위 최종 변론문 초안을 읽고 있었다. 오른손에 쥔 붉은 펜이 법리 중심으로 촘촘히 적힌 문단 위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한 줄. 두 줄. 세 번째 줄에서 펜이 멈추지 않았다.

네 번째 페이지 전체를 대각선으로 그었다.

펜을 내려놓고 새 문서 파일을 열었다. 키보드 위로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상일 씨는 이 재판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의 말로 진술하지 못했습니다.

수어로 말했고, 통역을 통해 전달되었지만, 그 침묵의 무게는 이 법정이 온전히 들은 적이 없습니다.

입구에서 인기척이 났다. 정유진이었다. 문간에 선 채 유재현의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법리 논리 다 지우는 거예요?”

유재현은 타이핑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변론문 자체를 다시 쓰시는 거네요.”

이번에는 손을 멈추고 정유진을 돌아보았다.

“법리로 공략하면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우상일 씨의 진심은 전해지지 않는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온 정유진의 어깨를 블라인드 그림자가 스쳤다.

“그게 선배님이 변호사 된 이유예요?”

유재현의 시선이 책상 모서리로 향했다. 낡은 국립국어원 수어 사전이 거기 놓여 있었다. 표지는 닳고 모서리가 둥글게 마모되어 있었다. 손을 뻗어 사전을 집어 들고, 엄지로 책등을 따라 천천히 쓸었다.

“십 년 전, 내가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사전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표지가 천천히 펼쳐졌다.

“그 말을 제대로 전하는 게, 내가 변호사인 이유다.”

정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재현의 표정에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돌아서서 문으로 걸어가다 손잡이를 잡았다. 잠시 멈추었다.

“내일, 잘 될 거예요.”

문이 닫혔다.

유재현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붉은 펜으로 그어진 초안을 접어 서류 가방 속에 밀어 넣었다.

수어 사전을 펼쳤다. 페이지 가장자리에 연필로 작게 적힌 수어 기호 하나가 손끝에 닿았다.

그 페이지를 접지 않고 책상 중앙에 그대로 두었다.

법원 정문. 오후 6시 45분.

서이언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대리석 난간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가 멀어졌다. 저녁 공기가 발끝을 스쳤다.

계단 아래에서 인기척이 멈췄다. 서류 가방을 든 손. 짙은 네이비 수트. 유재현이었다.

서로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다섯 계단 거리. 서이언의 시선이 서류 가방 손잡이에 닿았다. 손가락 마디가 약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유재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법정에서 뵙겠습니다. 서 통역사.”

목소리는 담담했다. 법정에서처럼 정제된 어조.

서이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이 가슴 높이에서 멈추고, 천천히 움직였다.

네.

손목이 정확히 꺾였다.

유 변호사님.

두 번째 동작은 더 천천히. 손끝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유재현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 움직였다. 입술이 열리려다 닫혔다.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서이언은 손을 내렸다. 가방 끈을 다시 어깨에 걸고 계단을 내려왔다. 옆을 지날 때, 유재현의 커프스 단추가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었다.

멈추지 않았다.

법원 정문을 나서자 가로등 불빛이 긴 그림자를 계단 위로 드리웠다. 유재현은 돌아서지 않았다. 서류 가방을 든 손이 천천히 풀렸다.

서이언의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인도 블록의 패턴 위로 그림자가 번졌다가 흩어졌다.

법원 계단에는 가로등 불빛만이 그와 그녀 사이의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맹주원의 손이 탁자 위에 멈췄다. 두 손바닥을 펴서 마주 본 뒤, 천천히 내렸다.

“내 뒤통수를 쳤습니다. 이 귀는 그렇게 잃었소.”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수어 없이 말할 때
들리지 않는 진심2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