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28화
법정 4층 대기실. 오전 9시 15분.
서이언은 테이블 위에 수첩을 펼쳐 두었다.
새 회색 수첩이었다. 낡은 것은 서랍에 넣었다.
손끝이 페이지를 넘겼다. 우상일의 진술을 기록한 부분에서 멈추었다.
'보호구' 수어-손목 10도 안쪽 꺾임.
'착용했습니다'-새끼손가락 떨림.
'소리'-속도 절반, 시선 왼쪽 아래 고정.
마지막 메모는 앞선 사건 증언 이후에 적은 것이었다.
'두려움. 말해도 소용없다는 체념. 회사에 세 번 요청.'
수첩을 덮지 않았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멈추었다. 노크 소리.
“서 통역사.”
유재현의 목소리였다. 서이언은 고개를 들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문이 열렸다. 유재현의 넥타이는 평소보다 약간 풀어져 있었다. 서류 가방을 든 손가락 마디가 희게 질렸다.
서이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테이블 위의 수첩을 가리켰다.
“봐 주셨으면 합니다.”
유재현이 다가왔다. 수첩을 집어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느렸다.
두 번째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이건.”
“우상일 씨 진술의 뉘앙스 기록입니다.”
유재현의 시선이 메모를 훑었다. 손목 꺾임, 속도 저하, 시선 회피. 통역 과정에서 포착한 모든 미세한 균열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굳었다.
“이걸 증거로 제출하면 우상일 씨가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보호구를 스스로 벗은 점, 처음에 숨긴 점. 피고 측에서 중과실로 공격할 근거가 됩니다.”
서이언은 수첩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도 이게 진실입니다.”
법원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울렸다. 엘리베이터 도착 알림음. 그리고 다시 정적.
유재현의 손이 수첩을 접었다. 주머니로 향하는 손이 잠시 멈추었다.
“사용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유 변호사님 판단에 맡깁니다.”
유재현은 수첩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옷깃을 한 번 눌러 정리했다.
“왜 저에게 줍니까.”
“사건을 가장 잘 아는 분이니까.”
서이언의 손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빈 수첩 자리를 한 번 쓸었다.
“그리고.”
유재현이 기다렸다.
“통역사의 노트는 원래 제출 의무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상일 씨의 진심이 기록된 유일한 부분이라면.”
말을 마치지 않았다. 손이 내려왔다.
유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킷 안주머니를 한 번 더 만졌다. 수첩의 각이 옷감 너머로 느껴졌다.
“법정에서 뵙겠습니다.”
돌아섰다. 문까지 세 걸음.
멈추었다.
“작업장 소음 실측값. 95데시벨.”
서이언이 고개를 들었다.
“기록하지 않으셨습니까.”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재현이 문을 열었다. 복도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서이언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
제12호 법정. 오전 10시 00분.
방청석 둘째 줄에 서명근과 이순자가 앉았다. 서명근의 왼손 붕대가 깨끗하게 갈려 있었다.
이순자는 남편의 오른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조용히 포개졌다. 양쪽 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맹주원이 판사석에 입장했다.
“착석하도록 합니다.”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가죽 의자에서 낮은 마찰음이 이어졌다.
“제12민사부, 우상일 원고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요양급여 불승인 처분 취소 청구 사건. 최종 변론을 속행합니다.”
맹주원의 시선이 증인석으로 향했다.
“원고 본인, 최종 진술하도록 합니다.”
우상일이 일어났다. 낡은 정장 소매가 증인석 난간에 스쳤다. 귀에 꽂은 이명 차폐 장치를 만지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렸다.
방청석의 아내를 보았다. 옆자리 두 아이. 아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상일은 다시 정면을 향했다.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손이 올라왔다. 첫 번째 수어가 시작되었다.
서이언이 통역사석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그날.
우상일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서이언의 목소리가 법정에 퍼졌다.
“야근이었습니다. 사흘째.”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전에 없이 느렸다. 떨림은 없었다.
귀마개를 벗었습니다.
서이언의 통역이 문장을 완성했다. 법정에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우상일의 손이 계속 움직였다.
“사흘 동안 소음 속에 있었습니다. 귀가 먹먹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속기사의 키보드 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잠시 벗었습니다. 오 분도 안 돼서 사고가 났습니다.”
우상일의 손이 멈추었다. 왼쪽 아래를 향하던 시선이 정면으로 돌아왔다.
방청석에서 아내가 손수건을 꺼냈다.
내 탓입니다.
손끝이 약간 떨렸다. 서이언은 그 떨림까지 통역하지 않았다. 통역사는 손을 옮기는 사람이지, 떨림을 옮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더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서이언의 목소리가 한 음절 한 음절을 법정에 내려놓았다. 우상일의 손이 다시 올라왔다. 떨림이 멎었다.
하지만.
손이 더 커졌다. 수어 동작이 커지고 느려졌다.
“회사는 알았습니다. 귀마개가 낡았다는 걸.”
손목이 꺾이지 않았다. 새끼손가락도 떨리지 않았다.
“세 번 말했습니다. 바꿔 달라고. 한 번도 안 바꿔 줬습니다.”
서이언의 손이 통역을 따라 움직였다. 법정 공기가 마른 종이 냄새를 토해냈다.
“야근을 시키면서 귀마개는 안 바꿔 줬습니다. 그걸 알면서 우리가 벗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우상일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방청석의 아이들 쪽을 보았다. 다시 정면을 향했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손이 공기를 가르며 이어졌다.
“기름때. 바닥에 깔린 기름. 깜빡이는 형광등. 멈춘 환풍기.”
손가락이 하나하나 지목하듯 허공을 찍었다.
“그걸 작업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귀마개를 벗지 않았다 해도, 언젠가는 다른 사고가 났을 겁니다.”
서이언의 목소리가 일정한 높이를 유지했다. 속도도 균일했다. 통역사로서 완벽한 기계처럼.
그러나 손은 알고 있었다. 우상일이 지금 이 순간, 살면서 가장 긴 문장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증인석 앞에 선 우상일의 손이 내려왔다.
법정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속기사의 키보드 소리도 멈추었다.
맹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원고 진술 종료. 통역 내용을 기록에 등재한다.”
고개를 돌려 변호사석을 향했다.
“원고 측 변호인, 최종 변론하도록 합니다.”
유재현이 일어났다. 서류 가방을 열었다.
붉은 펜으로 전면 수정된 초안을 꺼내지 않았다.
닳은 표지의 수어 사전을 책상 위에 올렸다. 페이지를 펼치지 않았다. 그냥 올려만 두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서이언의 수첩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렸다.
증거로 제출하지 않았다.
대신 수첩을 변호사석 테이블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재판장님.”
유재현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렸다.
“이 사건의 진실은 소음을 이기는 침묵의 무게입니다.”
법정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누구도 기침하지 않았다.
“원고는 1년 가까이 침묵했습니다. 보호구를 벗은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재현의 손이 수첩 위를 스쳤다.
“그러나 그 침묵은 원고 혼자 만들지 않았습니다.”
“작업장 바닥에는 기름이 고여 있었습니다.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에서 사흘째 야근이 이어졌습니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 번 짚었다.
“피고 회사는 소음 측정치 89데시벨을 기록했습니다. CNC 선반의 실제 소음이 95데시벨임을 알면서도.”
속기사의 키보드가 다시 움직였다.
“방음 귀마개 교체 요청은 세 번 묵살됐습니다. 교체 기록 란은 비어 있었습니다. 사고 이틀 뒤 제출된 확인서만 모든 란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유재현의 시선이 잠시 서류 가방에 놓인 수어 사전으로 향했다.
“회사는 원고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사고 당시 귀마개를 쓰고 있었느냐고. 원고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목소리가 반 박자 느려졌다.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방청석에서 작은 흐느낌이 들렸다. 우상일의 아내였다. 아이 두 명이 어머니의 옆구리에 얼굴을 묻었다.
서명근의 손이 이순자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양쪽 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유재현은 수첩을 집어 올리지 않았다.
“원고는 오늘, 그 침묵을 깼습니다. 회사가 만든 작업장이 귀마개를 벗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고. 그리고 회사는 그걸 알고 있었다고.”
“재판장님.”
유재현의 손이 변호사석 테이블을 짚었다.
“이 사건은 보호구 착용 여부가 문제가 아닙니다. 89데시벨과 95데시벨 사이의 숫자도 아닙니다.”
잠시 멈추었다.
“들을 수 없는 사람이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법정이 조용했다. 선풍기 소음조차 멀게 느껴졌다.
“원고의 침묵은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피고 회사는 그 침묵을 이용했습니다. 그것이 이 사건의 본질입니다.”
유재현의 변론이 끝났다.
수첩을 집어 들었다. 재킷 안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서류 가방 위, 수어 사전 옆에 나란히 두었다.
“이상입니다.”
착석했다.
법정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십 초. 이십 초.
맹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양측 변론을 종결하고, 재판부는 선고를 위해 잠시 휴정합니다.”
법정 시계의 초침이 움직였다.
오전 11시 05분.
선고 낭독을 위해 맹주원이 다시 입장했다.
서이언은 통역사석에 앉아 있었다. 손을 내려다보았다. 십 년 동안 이 손으로 몇 개의 진심을 옮겼는지 몰랐다. 어떤 것은 놓쳤고, 어떤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남아 있었다.
유재현은 변호사석에서 서류를 정리하지 않았다. 수어 사전과 수첩을 그대로 두고, 맹주원의 선고문을 응시했다.
서로를 보지 않았다.
다만 같은 초침 소리를 들었다.
법정 시계가 또 한 번 째깍, 하고 움직였다.
맹주원이 선고문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