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들리지 않는 진심

29화

맹주원이 선고문 마지막 장을 넘겼다.

“원고의 청구를 기각합니다.”

법정에 소리가 사라졌다. 선풍기 날개가 멈춘 것처럼. 누구 하나 자세를 움직이지 않았다.

“소송비용은 원고가 부담하는 것으로 합니다.”

맹주원의 손이 선고문을 덮었다.

“이상으로 선고를 마칩니다.”

의자 밀리는 소리가 났다. 방청석에서 누군가 일어났다. 우상일의 아내는 일어서지 못했다. 아이 두 명이 엄마의 팔을 잡았다.

우상일이 증인석에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아닌 눈으로 말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통역사석을 향해 두 손을 들었다.

수어였다. ‘이겼다.’ 문법도 틀리지 않았다. 손바닥이 제 위치를 정확히 짚었다.

처음이었다. 우상일이 웃었다.

서이언은 그 손짓을 고스란히 받았다. 통역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모두가 보고 있었으니까.

이겼다.

법정은 패소를 말했고 우상일은 이겼다.

서이언은 깨달았다. 이 사람이 처음부터 법원에 바란 것은 승소가 아니었다. 누군가 들어주는 것. 떨리는 손으로, 서툰 문법으로, 그래도 말하게 해주는 것.

그게 전부였다.

수첩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가죽 덮개가 닫히는 소리가 통역사석에 작게 울렸다.

법원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 오후 빛이 길게 늘어졌다.

서이언은 로비 중앙에서 우상일 부부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상일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내가 고개를 숙였다.

“통역사님.”

눈가가 붉었다.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남편이 어젯밤에, 처음으로…”

말이 잠시 멎었다.

“편히 잤습니다. 긴장을 안 하고요.”

우상일이 아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짝 밀었다. 더 말하지 말라는 듯한 손짓이 아니었다. 그냥, 그걸로 충분하다는 손짓이었다.

서이언은 목례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상일이 서이언을 향해 두 손을 올렸다. ‘고맙습니다.’ 수어가 천천히, 또렷하게 동작을 마쳤다. 마지막 손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가 있었다.

부부가 법원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이 둘이 양옆에서 부모의 손을 잡았다. 유리문 너머로 일가족의 실루엣이 옅어졌다.

서이언은 로비 한쪽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목공소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수첩에서 꺼냈다. 구겨진 가장자리를 엄지로 한 번 펼쳤다.

택시 승강장 쪽으로 발을 돌렸다.

택시는 올림픽대로를 벗어나 성수동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서이언은 창밖으로 익숙한 벽돌 담장과 낡은 공장 지대를 확인했다. 목공소 골목 입구에서 내린 뒤 5분가량 걸었다.DIRECT

목공소 문은 열려 있었다.

서이언은 문턱을 넘지 않고 멈춰 섰다. 톱밥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작업대 위로 대패가 밀려난 자리, 서명근의 손이 나무 결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순자는 안쪽 주방에서 찻잔을 꺼내고 있었다. 찻잔 두 개. 세 개가 아니다.

서이언은 작업대 앞으로 걸어갔다. 구두 굽이 콘크리트 바닥에 닿는 진동이 서명근의 손목까지 전해졌다. 대패가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

목소리로 불렀다. 서명근은 듣지 못한다. 그러나 대패가 멈췄다. 진동이 멈추자 손이 느낀 것이다. 서명근이 고개를 들었다.

“법정에는 왜 오셨어요.”

서이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명근의 손이 대패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톱밥이 손바닥에 묻어 있었다. 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를 보려고.”

수어가 느렸다. 손가락이 공기 중에서 머뭇거렸다.

서이언이 작업대 옆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나도 당신처럼 도망치고 있었어요.”

서명근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대패 손잡이를 다시 잡지 못했다. 손가락이 말리듯 오므라들었다가 펴졌다.

이순자의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주방에서 들렸다. 가벼운 도자기 소리. 그 뒤로 물 끓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순자는 나오지 않았다.

서명근이 손을 들어 올렸다. 동작이 천천히, 한 글자씩 읽히듯 이어졌다.

“네가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랐다.”

오른손 검지가 이마에서 가슴 앞으로 내려왔다. ‘더 나은’을 표현할 때 손끝이 약간 떨렸다. ‘바랐다’의 마지막 손 모양에서 손가락이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서이언은 그 손을 바라보았다. 떨림이 멈추길 기다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생각한 더 나은 삶이 뭔지, 저는 한 번도 몰랐어요.”

서명근의 손이 떨어졌다. 시선이 작업대 톱밥 더미로 내려갔다. 왼손이 톱밥을 쓸었다. 쓸 이유가 없는 자리였다.

서이언은 손을 들어 올렸다. 수어로 천천히 말했다.

“나는 아버지 딸이에요. 내가 선택하고 싶은 삶이 있었어요.”

서명근의 눈이 서이언의 손으로 향했다. 서이언의 수어는 침착했다. 동작이 또렷했다. 공기 중에 획을 긋는 듯했다.

서명근의 숨이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대패 옆에 놓인 줄자 위로 손을 얹었다. 줄자의 철제 끝이 작업대를 살짝 두드렸다.

그때 이순자가 주방 문간으로 다가왔다. 발소리는 거의 없었다. 손에 든 찻잔은 여전히 두 개였다. 이순자의 눈이 남편의 손을 향했다.

서명근이 다시 손을 들었다. 이전보다 더 느리게. 떨림이 손목까지 번졌다.

“그때 내가 유재현에게, 너를 떠나보내라고 했다.”

수어가 한 동작씩 끊어졌다. ‘유재현’ — 검지와 중지가 관자놀이를 스쳤다. ‘떠나보내라’ — 양손이 가슴 앞에서 바깥으로 밀려났다. 마지막 동작에서 손이 완전히 펴지지 않고 반쯤 말렸다.

서이언의 손이 내려갔다. 이미 아는 말이었다 — 수첩을 펼쳐 보이던 그날, 아버지가 처음 고백했던 그 말. 그러나 어머니가 듣는 앞에서 소리 내어 놓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같은 말이 다른 무게로 작업대 위에 내려앉았다.

이순자의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두 사람 사이에 멈춰 섰다. 찻잔을 작업대 구석에 내려놓았다.

서명근의 손이 떨렸다. 대패 손잡이를 잡을 때와는 다른 떨림. 이순자는 아무 말 없이 남편의 떨리는 손등을 덮었다. 이순자의 손바닥은 차를 우리던 열이 남아 있었다.

서명근의 손이 더 크게 떨렸다. 이순자가 감싼 위로도 떨림이 전해졌다. 이순자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남편의 손을 꼭 눌렀다.

서명근의 손끝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딸을 향했다. 손등은 이순자의 손바닥 아래에 있었다. 손가락만 올라갔다. 수어가 아니라 손 그 자체였다.

서이언은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았다. 톱밥이 박힌 손금. 못 굳은살이 군데군데 눌린 손바닥. 십 년 전보다 더 깊게 패인 손등의 핏줄.

서이언이 손을 내밀었다. 두 손이 닿았다. 서명근의 손이 딸의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힘이 들어가서가 아니라, 힘이 빠져서였다. 손가락 마디마다 오래 묵은 죄책감이 실려 있었다.

이순자의 손이 그 위를 덮었다. 세 사람의 손이 작업대 위에 겹쳐졌다. 톱밥이 손등 옆으로 살짝 밀려났다.

서이언이 오른손을 아버지에게서 빼내지 않은 채, 왼손을 들어 올렸다. 수어는 단 세 단어. 또렷하게.

“이제, 됐어요.”

서명근의 눈이 붉어졌다. 소리 없이 입술이 한 번 달싹였다. 이순자는 남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어깨가 작게 떨렸다.

찻잔 속 찻물이 식어가고 있었다. 목공소 창문으로 늦가을 햇살이 길게 들어와 작업대를 반으로 갈랐다.

서이언은 손을 풀지 않았다.

사무실은 비어 있었다.

유재현은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왼손 검지가 오른쪽 커프스 단추를 찾아갔다. 한 번, 눌렀다가 놓았다.

책상 위에 낡은 수어 사전이 펼쳐져 있었다. 변론 전날 밤, 마지막으로 확인한 페이지 그대로. ‘진실’을 뜻하는 수어 그림에 연필로 작은 별표가 그어져 있었다.

그 옆에 보내지 못한 편지 세 통이 포개어져 있었다. 모두 흰 봉투, 주소 없이 이름만 적혀 있었다. 가장 오래된 봉투의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유재현은 편지를 한 장씩 집어 들었다. 날짜를 확인하지 않았다. 순서대로 가지런히 모아, 책상 왼쪽 서류 정리함에 넣었다. 정리함 뚜껑을 닫았다.

수어 사전을 집어 들었다. 표지는 닳고 모서리가 둥글게 마모되어 있었다. 책등은 여러 번 다시 붙인 흔적이 있었다. 손바닥 위에 얹자 책이 저절로 펼쳐지는 페이지가 있었다.

‘통역’ — 양손을 번갈아 가며 입과 귀를 가리키는 동작이 연필로 여러 번 덧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 메모가 적혀 있었다. 유재현의 필체.

‘서울중앙지법 2023년 1월 통역사 명단. 3쪽. 이름 확인.’

2023년 1월. 유재현이 이 사건을 배정받기 여덟 달 전이었다.

사전을 덮었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쪽에 법전 몇 권과 함께 빈 공간이 있었다. 사전을 눕혀 넣었다. 서랍을 닫았다.

서류 정리함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뚜껑 아래로 편지 봉투의 흰 모서리가 보이지 않았다.

유재현은 재킷을 다시 집어 들었다. 팔을 꿰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14층 아래로 가로수 길이 보였다. 법원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

그는 재킷 단추를 채우지 않았다. 책상 위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서이언이 목공소 문을 나섰다.

문턱을 넘기 전,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서명근은 작업대 앞에 서 있었다. 이순자가 그의 팔꿈치를 부축하고 있었다. 서명근의 손이 가슴 높이까지 올라왔다. ‘조심히 가라.’ 천천히, 더는 떨리지 않았다.

서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어로 답했다. ‘곧, 다시.’

목공소 골목을 빠져나왔다. 골목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서이언은 왼쪽으로 발을 돌렸다. 법원 방향.

가로수 길로 접어들 무렵,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손목시계는 보지 않았다.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늦가을 햇살이 마른 플라타너스 가지 사이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법원 계단의 첫 번째 디딤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먼 쪽에서, 같은 디딤돌을 향해 걸어오는 검은 정장의 인영이 있었다.

들리지 않는 진심2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