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4화
카페 문은 열려 있었다. 통유리 너머로 오후 두 시의 햇살이 테이블 위로 밀려 들어왔다. 서이언은 문을 밀기 전에 잠시 멈춰 섰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손목시계를 한 번 만졌다. 진동 알람은 없었다. 그냥 습관이었다.
안쪽 구석 테이블. 유재현이 먼저 와 있었다. 검은 넥타이, 차콜 그레이 수트. 테이블 위에 서류 파일 두 개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하나는 이미 반쯤 비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얼음이 녹기 시작한 채 그대로였다.
서이언이 다가가자 유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늦었습니다.”
서이언이 가방을 옆 의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유재현은 손목시계를 보지 않았다.
“3분 전입니다. 제가 일찍 왔을 뿐.”
서이언은 자리에 앉았다. 얼음이 녹은 아메리카노를 자기 쪽으로 당기지 않았다.
유재현이 서류 파일 하나를 펼쳤다.
“다음 공판은 2주 후. 오늘은 증거 목록 정리부터.”
“네.”
서이언이 수첩을 꺼내 테이블 왼쪽에 놓았다. 유재현의 시선이 수첩 표지에 닿았다가 곧바로 서류로 돌아갔다.
“우상일 씨의 보호구 관련 진술. 통역하시면서 특이점이 있었습니까.”
서이언은 수첩을 펼쳤다. 전날 기록한 페이지.
“보호구 착용 해제 시점을 물을 때마다 손속도가 느려집니다.”
“구체적으로.”
“평소보다 반 박자 정도. 질문과 답변 사이 간격이 다른 주제보다 깁니다. 시선은 왼쪽 아래로 고정되고요.”
유재현이 만년필을 들어 서류 여백에 무언가 적었다. 짧은 메모였다.
“그 시점에 관한 구체적 답변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가 반복됐습니다. 그런데 보호구 착용 자체에 관한 질문에는 바로 답합니다.”
“착용은 했지만, 벗은 시점은 말하기 어렵다.”
“네.”
유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사업장 안전 점검 일지와 업무 일지의 불일치 건은 지난 공판에서 쟁점이 됐고. 우상일 씨가 A구역 소음에 대해 진술할 때 특이점은.”
서이언은 수첩을 한 장 넘겼다.
“A구역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오른손 엄지를 왼손으로 감싸 쥡니다. 그 외 구역명은 그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긴장 반응이군.”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재현이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사업장 도면이었다. A구역이 붉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 구역은 소음 측정 기록상 89데시벨. 기준치 이하입니다. 그런데 우상일 씨의 청력 손실 정도는 기준치 이하 소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
서이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통역사의 영역이 아니었다.
유재현이 말을 이었다.
“증거로 채택된 작업 일지에 따르면, 우상일 씨는 사고 당일 B구역에서 오전 작업 후 오후에 A구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동 시각은 오후 1시 30분.”
만년필 끝으로 도면의 B구역에서 A구역으로 선을 그었다.
“사고 발생은 오후 3시 12분. A구역에서 약 1시간 40분간 작업 중이었습니다.”
서류를 덮었다.
“여기까지가 현재 확보된 객관적 사실입니다.”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유재현의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
“통역사로서 더 보고하실 사항은.”
서이언은 수첩을 한 번 더 들여다봤다. 미완성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우상일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던 순간.
“우상일 씨가 지난 공판 휴정 중에 무언가 말하려다 중단했습니다.”
유재현의 손이 커피잔 위에서 멈췄다.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증거와 관련된 사항이라면.”
“통역사는 중립 의무가 있습니다. 원고의 미진술 내용을 변호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중립성이 훼손됩니다.”
유재현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알겠습니다. 그건 당신의 직업적 판단이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페 안의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유재현이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각도가 정확히 직각이 되도록 모서리를 맞추는 손놀림이 빠르고 정확했다. 서이언도 수첩을 덮었다.
유재현이 커피잔을 테이블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리고 손을 올렸다.
서이언의 시선이 그 손에 고정됐다.
유재현의 오른손이 공중에서 움직였다. 검지와 중지를 펴서 이마 옆에서 앞으로 내밀고,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서 바깥쪽으로 펼쳤다. 그리고 왼손 검지로 오른손 검지를 가리킨 뒤, 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약간 올렸다.
'이 사건, 당신이 필요합니다'.
수어였다. 유창했다. 손목의 각도, 손가락의 굴곡, 전환 속도까지. 교과서보다 정확하고, 교과서보다 자연스러웠다.
서이언의 손이 수첩 위에서 굳었다.
유재현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왼손 검지가 오른쪽 커프스 단추를 찾아갔다. 한 번, 눌렀다 놓았다.
서이언은 손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수어를 구사했던 손. 십 년 전에는 알파벳조차 더듬거리며 손가락을 비틀던 사람의 손이었다. 지금은 문장을 완성했다. 문법과 어휘 선택까지 정확하게.
서이언의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눌렀다.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수첩을 가방 안에 넣었다. 지퍼를 닫았다. 찰칵.
“서이언 씨.”
유재현의 목소리였다. 전에 없이 낮고, 끝이 갈라져 있었다.
서이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가방 끈을 어깨에 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었다. 카페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가을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보도 블록 위로 구두 굽이 짧게 울렸다.
뒤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쫓아오는 발소리도 없었다.
카페 안. 유재현은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서류 더미. 한쪽으로 밀린 커피잔 두 개. 그중 하나는 얼음이 거의 녹아 투명한 물이 되어 있었다.
유재현의 오른손이 테이블 모서리로 갔다. 검지 끝으로 나뭇결을 따라 천천히 선을 그었다. 한 번. 다시 한 번. 세 번째쯤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빈 자리. 맞은편 의자. 커피잔이 놓였던 자리에는 얇은 물얼룩이 남아 있었다.
유재현은 그 물얼룹을 바라보다가, 서류 가방을 열어 파일을 집어넣었다. 딸깍, 잠금 장치가 닫히는 소리만이 탁자 위를 짧게 울렸다.
현관문이 닫혔다.
서이언은 손에서 가방 끈이 빠져나가는 것도 몰랐다. 등이 벽에 닿았다. 천천히, 마치 공기가 빠져나가듯 몸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신발을 벗지 않았다.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이마를 팔에 묻었다.
카페에서 본 손. 유재현의 손. 열 손가락으로 공중에 써 내려간 수어였다.
미안합니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능숙했다. 십 년 전, 수어를 배우려는 시도조차 없던 그 사람이.
눈을 감았다.
대학 3학년 봄이었다. 학교 앞 분식집, 테이블 네 개짜리 작은 가게. 아버지 서명근과 어머니 이순자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서명근이 메뉴판을 가리키며 이순자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이순자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서이언이 자리에 앉으며 수어로 말했다. “유재현이 곧 와요.”
서명근의 손이 움직였다. 처음 뵙는 자리니까, 내가 준비한 거 있어.
주머니에서 접힌 메모지를 꺼냈다. 네 칸으로 접힌 공책 종이. 펼치자 단정한 글씨로 수어 동작이 하나하나 그려져 있었다. 반갑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옆에 화살표와 함께 손의 방향까지 적혀 있었다.
서이언은 그 메모를 바라봤다. 서명근이 얼마나 오래 이걸 준비했을지 알 수 있었다. 작업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틈날 때마다 꺼내 봤을 종이.
“아버지, 이거…”
말하지 마. 네 친구니까.
서명근의 손이 그렇게 답하고 메모지를 다시 접었다.
15분이 지났다. 20분. 서명근이 시계를 봤다. 이순자가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서이언의 진동 시계가 울렸다. 문자메시지였다.
오늘 못 갈 것 같아. 죄송합니다.
유재현이었다.
서이언은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 서명근이 물었다. 왔어?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서명근의 손이 잠시 멈췄다. 메모지를 쥔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바쁜가 보구나. 젊은 사람은 바쁜 게 좋은 거야.
하지만 메모지는 그날 이후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해 여름. 서이언의 집 거실. 이순자가 유재현에게 수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유재현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서명근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합니다.
서이언이 통역했다. “환영한다고 하셨어요.”
“고맙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유재현은 끝까지 손을 올리지 않았다. 서명근이 내민 수어를 따라 해보라는 권유에도, 이순자가 웃으며 보여준 간단한 손짓에도.
“다음에 배울게요. 오늘은… 시간이 좀.”
그리고 그 '다음'은 오지 않았다.
대신 유재현은 통역이 필요한 자리에서 멀어졌다. 서이언의 부모님 생신, 명절, 가족 모임. 핑계는 언제나 같았다. “내가 끼면 불편하실 거야.”
서이언의 집에서 유재현이 마지막으로 앉아 있던 저녁. 식탁 너머로 서명근이 천천히 손을 올렸다.
언젠가는, 우리 말로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유재현은 그 손짓을 보지 못했다. 보고도 보지 않은 척한 건지, 정말 보지 못한 건지, 서이언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현관 바닥이 차가웠다.
서이언은 무릎 위에서 손을 폈다. 카페에서 유재현의 손이 움직이던 속도, 정확한 마침, 모음 하나 흐트러지지 않던 손가락 끝.
십 년 전 배우지 않던 언어를, 십 년 뒤 이렇게.
손등이 입술에 닿았다.
서이언이 일어났다. 손등으로 눈가를 닦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현관을 지나 거실을 가로질렀다. 서재 책상 위에는 수첩이 놓여 있었다. 펜을 집어 들었다. 앞선 사건에서 기록한 우상일의 회피 패턴 옆, 빈 여백에 짧게 적었다.
유재현 — 수어 — 의도적 접근.
글씨는 반듯했다. 손끝의 떨림이 묻어나지 않았다.
펜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열었다. 메일 클라이언트가 뜨고, 수신자 란에 유재현의 사무소 주소를 입력했다.
제목: 면담 요청 건.
본문: 내일 오후 방문하겠습니다. 통역과 관련하여 확인할 사항이 있습니다. 서이언 드림.
전송. 화면에 '메일이 전송되었습니다'라는 알림이 떴다.
수첩을 덮었다. 노트북 화면이 절전 모드로 스르르 어두워졌다.
방 안에는 손목시계 초침 소리만 남았다. 어둑해진 화면 너머로 내일의 약속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서이언은 책상에 앉은 채 깜빡이는 알림등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