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들리지 않는 진심

6화

다음 날 아침, 법무법인 유현의 로비는 공기만 움직이고 있었다.

유리벽 너머로 도심의 아침 햇살이 바닥 대리석에 옅은 빛을 펼쳐놓고 있었다.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8시 57분.

진동 알람은 이미 두 시간 전에 울렸고, 가방 안에는 수첩과 필기도구, 통역사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지난밤 덮어둔 메모 한 줄이 아직 눈앞에 남아 있었다. '유재현 사무실-사진-수어 교재-정유진 변호사의 반응'.

“서이언 통역사님.”

오른쪽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유진이었다. 평소보다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내 인사에 정유진의 시선이 잠시 내 얼굴에서 머물렀다가 왼쪽 귀 옆을 스쳤다. 정확히는 내 포니테일을 묶은 검은 고무줄 쪽이었다. 입술이 열리는 듯하다가 다시 닫혔다. 손에 든 태블릿 가장자리를 엄지로 한 번 눌렀다 떼었다.

“선배님께서 현장 조사 준비 중이세요. 곧 나오실 거예요.”

“네.”

나는 그 짧은 시선의 정체를 수첩 없이 기억해두기로 했다. 정유진은 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 사진 속 얼굴을, 그리고 지금 여기 서 있는 통역사로서의 나를 연결 지은 표정이었다. 모르는 사람을 훑는 눈이 아니었다. 다만 그걸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의 눈이었다.

로비 안쪽 유리문이 열렸다.

유재현이 걸어나왔다. 손에는 검은색 증거 수집 키트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네이비 수트에 실버 커프스 버튼. 왼손 검지가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커프스를 한 번 누르는 작은 동작. 그 손끝에 시선이 닿자 나는 곧바로 눈을 돌렸다.

“출발합시다.”

유재현이 말했다. 누구에게도, 누구에게도 아닌 어조로. 키트를 왼손으로 바꿔 쥐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정유진이 한 걸음 물러섰다.

“저는 오늘 서류 정리하고 있을게요. 우상일 건 추가 자료도 좀 찾아보고.”

“그래.”

유재현의 대답은 짧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먼저 올랐다. 유재현이 뒤따랐다.

정유진은 로비에 남아 우리를 배웅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가 손에 쥔 태블릿을 가슴 앞으로 당기는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를 감추듯이.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했다. 14층에서 1층까지,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었다. 유재현은 내 왼편 사십 오 센티미터 뒤에 서 있었다. 거리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

사업장은 도시 외곽의 반지하형 공장이었다. 콘크리트 벽면에는 오래된 기름때가 번져 있었고, 형광등 몇 개가 깜박이고 있었다. 우상일은 정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낡은 정장 차림에, 귀에는 이명 차폐 장치. 손에 쥔 작업모를 만지작거리는 오른손 엄지가 굳은살로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우상일이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었다. 유재현이 답례하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작업장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A구역, B구역, 자재 보관소 순으로 공간이 나뉘어 있었다. 유재현은 벽면에 걸린 안전 관리 일지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일지, 사고 당일 것 맞습니까.”

내가 수어로 옮겼다. 우상일은 잠시 일지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손을 올렸다.

네. 이거 맞아요. 그날 아침에 사인했어요.

손동작은 또렷했다. 나는 통역했다.

“맞습니다. 사고 당일 오전에 본인이 서명했다고 합니다.”

유재현이 벽 쪽 보호구 보관함으로 이동했다. 보관함 유리문에는 금이 가 있었고, 내부 선반에는 방음 귀마개 몇 개가 흩어져 있었다. 교체 일자가 적힌 스티커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귀마개 교체 주기는 얼마였습니까.”

한 달에 한 번. 그런데...

우상일의 손이 멈췄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약간 구부러졌다. 문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였다.

“그런데요?”

내가 재촉하지 않고 손을 내렸다. 우상일은 보관함 안쪽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아닙니다. 그냥... 교체 주기는 한 달이었어요.

손속도가 느려졌다. 이전 공판에서 보호구 질문을 받았을 때와 같은 패턴이었다. 시선이 왼쪽 아래로 내려갔다.

유재현이 사진 촬영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합니까.”

나는 우상일의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교체 주기는 한 달이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 특이 사항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목소리는 중립적이었다. 통역사는 말을 옮기는 사람일 뿐, 말하지 않은 것을 옮기지 않는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일해왔다. 유재현의 눈이 나에게서 우상일에게로 옮겨갔다. 이 초 동안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했다.

프레스 기계는 공장 가장 안쪽에 있었다.

사고가 발생한 구역이었다. 기계 옆면에는 노란색 안전 스티커가 반쯤 벗겨져 있었고, 바닥에는 아직 검은 윤활유 얼룩이 남아 있었다. 우상일은 기계 앞에 멈춰 섰다.

유재현이 무릎을 굽혀 기계 하단부를 살폈다.

“안전 장치에 대해 몇 가지 묻겠습니다. 사고 당시, 이 기계의 광전자 센서는 작동하고 있었습니까.”

내 손이 질문을 옮기는 동안, 우상일의 오른손 엄지가 왼손 주먹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A구역이라는 단어, 혹은 사고 당시를 묻는 질문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반응.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 합니다.”

“동료가 멈춤 버튼을 눌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버튼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우상일의 시선이 기계 뒤쪽을 스쳤다. 딱 일 초 정도. 협소한 공간.

방음 귀마개 보관함이 붙어 있는 벽 쪽이었다. 그러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입술이 달싹이다 멈췄다.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그날은... 정신이 없어서.

내 손이 유재현을 향해 통역을 시작했다. 우상일의 손이 말한 내용만, 정확히.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합니다. 당시 정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유재현이 천천히 일어났다. 내 호흡이 한 박자 짧아졌다. 우상일의 시선이 스쳤던 그 공간을 나도 보았기 때문이었다. 멈춤 버튼의 현재 위치를 묻는 질문에, 우상일은 기계 뒤쪽을 바라보고도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의도적인 회피인지, 실제로 기억나지 않는 것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유재현이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십 년 만에 법정에서 마주친 그때와는 다른 시선이었다. 변호사가 통역사에게서 정보를 얻으려는 눈이 아니었다. 내 호흡 변화를 읽은 사람의 눈이었다.

“우상일 씨.”

유재현이 우상일에게 다가갔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잠시 밖에서 쉬고 오시겠습니까. 오늘 오전 조사는 여기까지입니다.”

우상일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 입을 열려다 멈추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발걸음이 출구를 향했다. 작업모를 쥔 손등에 힘줄이 올라와 있었다.

공장 안에 두 사람만 남았다.

기계의 금속 냄새, 윤활유 냄새, 그리고 정적.

유재현이 프레스 기계 옆에 서서 멈춤 버튼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우상일이 보지 않은 그 방향을 그대로 응시했다. 방음 귀마개 보관함과, 그 옆 협소한 공간.

“서이언 씨.”

유재현의 목소리가 작업장 공기 속에서 낮게 울렸다.

“방금 우상일 씨가 기억이 안 난다고 하기 전에, 기계 뒤쪽을 봤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통역사는 추측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질문과 다른 방향을 보는 사람은, 질문보다 그 방향에 더 많은 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재현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통역사로서 보고하실 사항은.”

나는 손가락을 가볍게 폈다 오므렸다.

“우상일 씨가 보호구 보관함 방향을 응시한 후에도 진술을 계속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의 사항은... 아직 통역된 바 없습니다.”

내 시계가 오전 11시 7분을 가리켰다. 유재현은 대답 대신 증거 수집 키트를 열어 렌즈를 교체했다. 셔터음이 다시 공장 안에 울렸다. 보관함 쪽을 향한 렌즈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몇 장을 더 촬영한 뒤, 그가 키트를 정리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조사 결과는 사무실에서 검토하겠습니다.”

내가 끄덕였다. 유재현이 먼저 공장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프레스 기계 옆면에 손끝을 한 번 대었다가 떼었다. 차가운 금속 감촉이 손가락에 남았다.

바깥 주차장에서 유재현이 차 문을 열었다.

“사무실로 돌아가겠습니다. 통역사님은.”

“저는 버스 타고 갈게요. 근처에 들를 데가 있어서.”

유재현이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묻지 않은 질문이 그 눈 안에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럼 다음 일정 때 연락드리겠습니다.”

차가 빠져나갔다. 나는 반대편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 우상일이 먼저 떠난 뒤였다. 그가 공장 정문을 벗어나 골목길로 접어드는 뒷모습이 잠깐 보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겠지.

목공소에 들어서자 나무 부스러기와 바니시 냄새가 공기 중에 얇게 깔려 있었다. 서명근은 작업대 앞에 앉아 소형 벤치의 다리 부분을 사포질하고 있었다. 어깨가 리듬에 맞춰 오르내렸다. 진동 알람 패드가 허리춤에서 푸른 불빛을 한 번 깜박였다.

내 발소리는 들리지 않을 터였다. 작업등 아래로 다가가자 그림자가 작업대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서명근이 고개를 들었다. 사포를 든 손이 멈추고, 얼굴에 잔주름이 접혔다. 입가가 올라갔다가 내 표정을 읽고 천천히 내려갔다.

언니는?

점심 먹으러 나갔다. 나는 작업대 옆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구석의 전기포트에서 물을 올렸다. 티백 두 개가 놓인 작은 쟁반을 집어 들었다.

무슨 일 있냐.

서명근의 손이 물었다. 사포질을 재개한 손놀림은 조금 느려져 있었다. 나는 찻잔을 건네며 고개를 저었다.

“근처 들렀다가.”

서명근은 받은 잔을 입가까이 가져가지 않고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김이 올라왔다.

“며칠 전에 산재 소송 통역 맡았어요.”

그렇구나.

사포가 나뭇결을 따라 길게 움직였다. 나는 가방 손잡이를 한 번 만졌다 놓았다.

“변호인이… 유재현 변호사예요.”

서명근의 손이 완전히 멈췄다. 오른손에 쥔 사포가 미끄러져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다. 먼지가 잠깐 일었다. 서명근은 줍지 않았다. 턱 근육이 천천히 경직되는 모습이 작업등 아래 그대로 드러났다.

찻잔 속 액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명근의 왼손이 테이블 모서리를 짚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나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냈다. 흰 종이에 검은 글씨. 유재현, 법무법인 유현. 천천히 작업대 위로 밀어 넣었다.

“아버지, 혹시 이 분을…”

서명근의 손이 명함을 낚아챘다. 엄지와 검지로 집어 올리더니, 한 번도 읽지 않고 곧바로 뒤집어 탁자 위에 엎어놓았다. 종이가 나무판에 부딪히는 소리가 지나치게 컸다.

손을 들어 올렸다.

모르는 사람이다.

수어는 짧았다. 오른손이 허공에서 한 번 더 떨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보충하듯 손을 다시 움직였지만, 중지 끝이 떨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놓쳤을 진폭이었다. 나는 보았다. 서명근이 손을 내리고 무릎 위에 올려놓을 때까지, 손끝의 미세한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차는 아직 뜨거웠다.

“…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명함은 뒤집힌 채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서명근은 벤치 다리를 집어 들었지만, 사포는 바닥에 그대로였다. 왼손이 여전히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고 있었다.

작업장 안에 작은 분진들이 움직이지 않고 떠 있었다.

오후 세 시.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차가 지나가지 않는 틈마다 목공소 쪽을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떨린 손가락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유재현의 표정도.

서점에서 본 정유진의 미묘한 시선. 사무실 책장에 꽂힌 대학 시절 사진. 사진 속 스물셋의 나와 유재현 사이에 서 있던 공기.

버스가 왔다. 빈 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모르는 사람이다'. 서명근의 손이 말한 것은 그 짧은 문장이었지만, 손끝은 전혀 다른 문장을 쓰고 있었다.

단순 적개심이 아니었다.

그 생각이 처음으로 문장의 형태를 갖추었다. 유재현을 향한 아버지의 반응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십 년 전 그가 말하지 않았던 무언가.

집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었다. 침묵 속에 전기 냄새와 먼지 냄새가 고여 있었다. 가방을 식탁 위에 올리고 수첩을 꺼냈다.

우상일 관련 페이지를 펼쳤다. 보호구 질문 시 손속도 저하, 왼쪽 아래 시선 고정,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반복. 그 메모 옆에 별표를 하나 더 그렸다.

페이지를 넘겼다. 새 칸에 볼펜을 눌렸다.

서명근-유재현 관계 재확인 필요.

글씨는 작고 반듯했다. 볼펜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천장에 금이 간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십 년 전 유재현이 내게서 멀어진 이유. 내가 알고 있던 것은 표면의 파편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수첩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엔 사건 관계자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우상일, 관할 법원 사무관, 그리고 유재현.

볼펜 뚜껑을 닫았다. 엄지손가락이 유재현의 이름 옆 전화번호 위를 가로질러 멈추었다. 번호는 외우고 있었다. 수첩을 덮었다. 표지가 손바닥 아래서 약간 차갑게 느껴졌다.

서명근의 손이 명함을 낚아챘다. 엄지와 검지로 집어 올리더니, 한 번도 읽지 않고 곧바로 뒤집어 탁자 위에 엎어놓았다. 종이가 나무판에 부딪히는 소리가 지나치게 컸다.

손을 들어
들리지 않는 진심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