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들리지 않는 진심

7화

법원 로비는 오후의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해 대리석 바닥을 희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민원실에서 받은 공판 일정표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2차 공판은 다음 주 화요일 오전 10시. 통역사 확인란에는 여전히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이언 통역사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정유진이었다. 손에는 두꺼운 서류 봉투. 변호사 배지가 재킷 깃에 걸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정유진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 같은 밝은 톤이었지만, 눈동자가 내 시선을 피했다.

“법원 오실 일이셨어요?”

“공판 일정 확인차.”

“아, 네. 저는 선배님 서류 전달 때문에.”

정유진이 손에 든 봉투를 살짝 들어 보였다. 봉투 겉면에 ‘우상일 건’이라는 필기. 유재현의 글씨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정 변호사님. 지난번 사무실에서.”

정유진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책장에 있던 사진. 변호사님께서는 제가 그걸 봤다는 걸 아십니까.”

“아, 그게…….”

정유진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평소처럼 빠르게 튀어나오던 말이 없었다. 오른손 엄지로 서류 봉투 모서리를 반복해서 문질렀다.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고요. 선배님이 직접——”

“그 사진, 유 변호사님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겁니까.”

말을 자른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정유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대답 대신 짧은 숨이 새어나왔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정유진은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걸음은 평소보다 빨랐다. 로비를 가로질러 정문을 향하는 뒷모습에서, 왼손이 핸드백 끈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숨기려는 태도도, 어색한 침묵도, 무의식적인 손동작도. 통역사가 하루에도 수십 번 목격하는 신호들이었다.

정유진은 알고 있었다. 유재현이 그 사진을 보관해 온 이유를. 그리고 그 이유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펼쳤다. 정유진 관련 페이지 하단에 볼펜을 댔다.

사진 보관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 설명 회피. 유재현의 의도적 접근 가능성에 무게 추가.

볼펜을 접어 넣고 로비를 나섰다. 유리문 밖으로 나가자 바람이 볼을 스쳤다. 서늘했다.

목공소 근처 골목길에는 오후 세 시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유재현은 차에서 내려 잠시 서 있었다. 현장 조사 자료를 정리하던 중, 서명근의 작업장 위치가 문득 떠올랐다. 외관만 확인하고 갈 생각이었다.

골목 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체크 셔츠에 카고 조끼. 손에는 철물점 봉투. 걸음이 익숙한 리듬이었다.

서명근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오 미터 정도로 좁혀졌을 때, 서명근의 발걸음이 멈췄다. 유재현도 걸음을 멈추었다. 골목엔 아무도 없었다. 콘크리트 벽 너머로 목공소 기계음만이 낮게 울리고 있었다.

서명근이 봉투를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오른손이 허공으로 올라왔다. 손가락이 정확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무슨 일이요.

유재현의 손도 올라갔다. 십 년 전보다 훨씬 유창한 수어가 천천히 모양을 만들었다.

지나가다가. 말씀드릴 게 있어서.

서명근의 얼굴이 굳어졌다. 눈가의 주름이 깊게 패이고, 턱 선이 단단히 조여졌다. 오른손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더 짧고, 날카로웠다.

볼 일 없다. 할 말도 없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정확히 반 바퀴. 구십 도도, 백팔십 도도 아닌, 완전한 등을 보이는 회전이었다.

유재현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서명근의 왼손이 철물점 봉투를 쥔 채 떨리고 있었다. 봉투의 비닐이 미세하게 바스락거렸다. 걸음을 옮기지도, 손을 더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오른손이 바지 주머니 옆에서 떨고 있었다.

떨림이었다.

유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적개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떨림. 분노가 아니라, 분노로 감추려는 무언가. 그 손은 도망치고 싶은데 몸이 굳어버린 사람의 손이었다.

서명근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목공소 쪽문이 열리고 닫혔다. 철제 문이 닫히는 소리가 골목에 짧게 울렸다.

유재현은 거기서 몇 분을 더 서 있었다. 왼손 검지가 오른쪽 커프스 단추를 찾아갔다. 세 번, 눌렀다 놓았다. 그도 모르게 깊어진 숨을 한 번 내쉬고 차로 돌아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413호 법정.

오후 네 시. 예비 심리 테이블에는 재판부와 양측 변호인, 그리고 통역사인 나만이 배석해 있었다.

재판장이 서류 한 장을 들어 올렸다.

“본 건 통역사 배정 관련하여, 법원 사무국에서 제출한 경위서가 있습니다.”

내 손이 수첩 위에서 멈췄다. 통역사 배정 경위서. 예비 심리 안건에는 없던 서류였다.

재판장이 서류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사건 초기, 통역사 후보 명단 작성 과정에서…… 피해자 측 변호인 측의 의견이 일부 반영된 정황이 보입니다.”

유재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왼손 검지가 책상 아래로 내려갔다. 커프스 단추는 보이지 않았다.

“변호인 측에서 특정 통역사의 전문성에 대해 사전 의견을 개진했고, 이후 해당 통역사가 최종 후보군에 포함되었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서류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한 법정에 울렸다.

재판장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절차상 중대한 하자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본 재판부는 이 점을 양측에 사전 고지하여 투명성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유재현이 고개를 숙였다.

“확인했습니다, 재판장님.”

목소리는 평소처럼 평평했다. 나는 유재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받지 않았다. 책상 위의 서류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통역사 배정은 중립적 절차를 거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후보 명단에 내 이름이 오르는 과정에 유재현의 의견이 개입되어 있었다. ‘일부 반영’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정확하게 와닿았다.

재판장이 예비 심리 종료를 선언했다. 나는 통역 장비를 챙기며 다른 쪽을 보았다. 유재현은 변호사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동작은 느렸다.

그의 손가락이 가방 잠금장치를 두 번 다시 만졌다.

법정 밖 복도는 조용했다.

오후 다섯 시. 재판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 끝까지 이어졌다. 유재현은 내 앞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세 걸음쯤 뒤에서 그를 불렀다.

“변호사님.”

유재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돌아선 얼굴은 여전히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잠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목소리는 예정보다 낮았다. 유재현이 완전히 몸을 돌렸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일 미터 남짓. 복도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복도 끝 창문으로 늦은 오후의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바닥을 가로질렀다.

나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늘 예비 심리에서 확인된 통역사 배정 경위. 변호사님께서 관여하셨다는 점을 이제 알았습니다.”

유재현이 입술을 달싹이려 했다. 나는 오른손을 살짝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사건을 맡은 지 이 주 만에 그걸 알게 된 건, 제 직업적 실수입니다.”

내 손이 다시 내려갔다.

“변호사님은 제게 수어를 숨길 권리가 없으셨습니다.”

유재현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눈가의 근육이 수축하고, 턱 선이 일직선이 되었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통역사는 원발언의 결을 그대로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수어도 언어입니다. 그 언어를 구사하는 상대가, 제 앞에서, 그 사실을 숨겼습니다. 통역의 현장에서 그건——”

잠시 숨을 골랐다. 복도 바닥의 빛이 조금 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건 변호사님이 제 직업을 얼마나 가볍게 보셨는지 보여줍니다.”

유재현의 왼손 검지가 움직였다. 커프스 단추가 아니라, 주먹이 쥐어졌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천천히.

“……배정 경위에 대해서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끝이 갈라져 있었다.

“말씀드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묻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변호사님의 의도를 알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제게 중요한 건 배정 절차가 아니라, 그걸 알았을 때의 감각입니다.”

유재현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저는 이 사건 통역을 계속 맡습니다. 우상일 씨의 진술을 정확히 전달하는 게 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변호사님에 대한 제 직업적 판단은——”

한 걸음 물러섰다.

“——여기까지입니다.”

돌아섰다. 구두 소리가 복도에 짧게 울렸다. 뒤에서 유재현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지 않았다. 주먹을 쥔 손이 풀렸는지, 그대로인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차가웠다.

저녁 여덟 시. 작업실 데스크 램프가 작은 원을 그리며 책상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수첩을 펼쳤다. 왼쪽 페이지에는 목공소에서 돌아온 날 밤 적었던 메모가 있었다.

서명근-유재현 관계 재확인 필요.

그 메모 옆에 볼펜을 댔다. 글씨는 여전히 작고 반듯했다.

서명근의 동요는 적개심 + 두려움 혼재. 손 떨림이 신체 언어상 공포 반응에 가까움.

페이지를 넘겼다. 오늘의 날짜를 적고, 예비 심리에서 확인된 내용을 정리했다.

유재현이 통역사 후보 명단에 내 이름을 직접 추가. 배정은 우연이 아닌 의도적 개입의 결과. 정유진은 이 사실과 사진 보관의 맥락을 이미 알고 있으며, 설명을 회피함.

한 줄을 띄우고, 마지막 문장을 썼다.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볼펜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약간 저릿했다. 램프 불빛 아래 수첩의 종이 질감이 마른 나뭇잎처럼 보였다.

서랍을 열었다. 안쪽 깊숙이 넣어두었던 변호사 수첩을 꺼냈다. 법원에서 배포하는 표준 수첩. 표지는 이미 오래전에 닳아 있었다. 첫 장을 넘겼다.

법무법인 유현 / 변호사 유재현.

그 아래로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내 손가락이 번호 위에 멈추었다. 손가락 끝이 숫자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0, 1, 0.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수첩을 펼친 채 그대로 두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램프 불빛이 손등 위에 얹혀 있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방 안에서, 수첩 페이지는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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