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진심
8화
통역 배정 확인서 사본을 손에 쥔 채,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법무법인 유현. 14층.
거울처럼 닦인 엘리베이터 벽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손만이 확인서 모서리를 접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오르는 동안 나는 세 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14층. 문이 열렸다.
복도는 조용했다. 법무법인 유현의 로고가 유리문 너머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접수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유진이 복도에서 튀어나오다 걸음을 멈췄다.
“서, 서이언 통역사님.”
“변호사님 계십니까.”
물었다기보다 확인이었다. 정유진이 대표실 쪽을 힐끗 쳐다봤다. 그 눈빛은 지난번과 같았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말할 수 없는 것을 숨기는 눈.
“계신데…… 약속하셨나요?”
“아닙니다.”
나는 대표실 문을 향해 걸었다. 정유진이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노크를 하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유재현은 집무실 책상 너머에 앉아 있었다.
네이비 수트의 상의가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다. 와이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린 채, 서류 한 묶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자 손이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나를 잡는 데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통역 배정 건입니까.”
질문형이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나는 확인서 사본을 펼쳐 책상 위에 밀었다.
“예비 심리에서 나왔습니다. 변호사님 측에서 배정 목록에 내 이름을 추가했다고요.”
유재현은 확인서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 대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 눈동자 속에서 나는 십 년 전 어떤 날의 빛을 봤다. 나는 그 기억을 손에 힘을 주는 것으로 지웠다.
“중립적 절차가 아닙니다. 직업적 통역사로서 이 경위를 설명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유재현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당신 이름을 넣었습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도 않았다. 손끝으로 책상 위 만년필을 한 번 굴리는 작은 움직임만이 있었다. 왼손 검지는 평소와 같이 오른쪽 커프스를 찾지 않았다. 오늘은 아직.
“이유를 묻겠습니다.”
“최선의 통역사였기 때문입니다.”
“그건 답이 아닙니다.”
유재현의 손가락이 만년필 뚜껑에 닿았다. 열었다 닫았다. 한 번.
“이 사건에서 수어 통역이 핵심 증거와 직결됩니다. 우상일 씨의 진술 뉘앙스가 판결에 결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았고, 나는 그 뉘앙스를——”
“변호사님.”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았다.
“지난 4년간 변호사님 로펌에서 수어 통역을 의뢰한 사건은 모두 6건입니다. 그중 법원 배정 통역사를 그대로 쓴 경우가 5건이었고, 유일하게 이번 사건에서만 특정인 지정 의사를 나타내셨습니다. 우연입니까.”
유재현이 침묵했다. 손가락이 뚜껑을 다시 열었다 닫았다.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왜 나였습니까.”
문 밖 복도에서 발소리가 멈추는 게 들렸다. 정유진이었다.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당신이 이 사건을 맡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무슨 이유.”
유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창밖 오후 햇살이 집무실 유리 너머로 길게 누워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책장 유리문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 안쪽, 사진첩이 꽂혀 있던 그 자리.
내가 그 책장을 열었던 날. 그 사진을 찾아냈던 순간.
“십 년 전에는 그러지 않으셨죠.”
내 입에서 나온 말에 유재현의 손이 멎었다.
“그때는 배우려 하지도 않았고, 쓰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걸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내 가족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았으니까.”
만년필이 책상 위에 내려놓였다. 유재현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수어로 한 문장을 만들었다.
나는 그 말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의 말.”
나는 그의 손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당신이 내 가족 앞에서 했던 그 말. 십 년이 지나도록, 당신은 그 말에 대해——”
“이언아.”
목소리가 아니라 손이 멈췄다. 유재현의 왼손이 허공에서 반쯤 말을 만들다 내려갔다. 그 손가락 끝이 책상 가장자리를 짚었다. 관절이 하얗게 드러났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만년필 뚜껑이 열리고 닫혔다.
세 번째. 네 번째.
나는 그 손을 보았다. 부인도 인정도 아닌, 열리고 닫히는 뚜껑의 반복. 열었다 닫을 때마다 미세하게 손끝이 경직되었다. 그건 말을 찾는 손이 아니었다. 말을 삼키는 손이었다.
“——그만합시다.”
유재현이 말했다.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뚜껑을 닫는 마지막 소리는 조금 더 컸다.
나는 침묵했다. 통역 배정 확인서가 내 손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 손을 확인서로 가렸다.
“이 사건 통역은 계속합니다.”
내 목소리가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건조한 음절 하나하나.
“단, 개인적 의도가 개입되면——”
확인서 사본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그때는 사임하겠습니다.”
돌아섰다.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정유진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의 눈이 내 얼굴을 스쳤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정유진도 입을 열지 않았다.
뒤에서 문이 닫혔다. 유재현이 닫은 것인지, 공기 흐름인지 알 수 없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증거 조사실의 형광등이 낮게 울고 있었다.
맹주원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았다. 코를 두 번 꾹 누르고 다시 안경을 썼다. 그 앞에는 우상일 사건의 근무 일지 원본과 디지털 기록 출력본이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원본은 누렇게 바랜 종이에 볼펜으로 기입된 수기 일지였다. 출력본은 회사 측에서 제출한 전산 기록 프린트물. 두 문서의 날짜는 동일했다. 작년 10월 14일.
맹주원은 오른손 검지를 원본의 한 줄에 대고 천천히 내렸다.
기계 점검 완료 시각: 16:10.
왼손으로 출력본을 끌어당겼다. 같은 항목.
작업자 퇴근 기록: 17:37.
“——47분.”
맹주원이 중얼거렸다.
점검 완료 후 작업자가 47분 동안 현장에 더 있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퇴근 기록 옆 서명란에는 우상일의 이름이 없었다. 다른 작업자 두 명의 서명만이 희미한 연필로 남아 있었다. 우상일의 퇴근 시각은 다른 란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출력본을 넘겼다. 전산 기록상 작업 종료 시각은 17:12로 되어 있었다. 종이 일지와 25분 차이.
“종이는 열일곱 시 삼십칠 분. 전산은 열일곱 시 십이 분.”
맹주원은 포스트잇을 뜯어 출력본의 해당 칸 옆에 붙였다. 볼펜으로 작게 ‘시각 불일치’라고 적었다. 이어서 원본에도 같은 포스트잇을 붙였다. 글씨는 더 작았다. ‘47분 공백 + 전산 25분 차이.’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두 번 눌러 유재현의 번호를 찾았다. 신호음이 두 번 가고 연결됐다.
“——재현 변호사. 맹주원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맹주원은 그 침묵의 무게를 헤아리지 않았다. 그저 원본 일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근무 일지를 대조했습니다. 회사가 제출한 원본과 디지털 기록이 다릅니다. 시각이 두 개입니다. 기계 점검과 작업자 퇴근 사이 47분 공백—— 그리고 전산 기록은 이 시간차를 메우려는 듯 25분 앞당겨져 있습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유재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확실합니까.”
“원본과 출력본을 동시에 보고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사본 준비해 주십시오.”
맹주원은 전화를 끊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포스트잇이 붙은 두 문서를 파일에 끼웠다. 파일 겉면에는 ‘우상일 건 증거목록 3-1’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무실에 남은 유재현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몇 초간 움직이지 않았다.
왼손이 오른쪽 커프스를 찾았다. 한 번 누르고, 곧바로 손을 내렸다. 만년필을 집어 서랍 속에 떨어뜨리듯 넣었다.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집무실에 작게 울렸다.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정유진 변호사.”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정유진이 들어서며 유재현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처럼 밝지 않았다.
“우상일 씨 추가 면담 긴급히 잡아. 내일 중으로.”
“——알겠어요. 그런데 방금 전……”
정유진이 말을 흐렸다. 서이언 통역사님이 다녀갔다는 말은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유재현은 그녀가 말하지 않은 문장을 알고 있었다. 묻지 않았다.
“추가로, 서이언 통역사에게 공식 이메일 보내.”
“어떤 내용으로?”
“우상일 사건 통역 지속 요청. 통역사 변경 없이 동일 배정 유지. 공식 라인으로 발송해.”
정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다 문가에서 잠시 멈췄다.
“선배.”
“——.”
“……아니에요. 이메일 바로 보낼게요.”
문이 닫혔다. 유재현은 혼자 남은 집무실에서 창밖을 바라봤다. 유리 너머로 도심 빌딩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왼손 검지가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커프스 단추를 찾았다가, 닿기 전에 멈추었다.
법원 로비의 대리석 바닥이 오후의 빛을 받아 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유재현의 로펌에서 보낸 이메일이었다. ‘우상일 사건 수어 통역 지속 요청의 건’이라는 제목 아래, 짧고 형식적인 문장. 답장은 하지 않았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폈다. 볼펜 끝이 종이에 닿았다.
근무 일지 시각 불일치.
우상일 회피 패턴과 연결 가능성——A구역, 작업 종료 시점 전후의 행적.
볼펜을 내려놓고 로비 창밖을 바라봤다. 법원 정문 앞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상일이 현장 조사 때 보호구 보관함을 응시하던 시선. A구역이라는 단어 앞에서 오른손 엄지를 왼손으로 감싸쥐던 손동작. 그리고 지금 맹주원이 발견한 47분의 공백.
무언가가 그 시간 속에 있었다.
수첩을 덮었다.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휴대폰 화면에 알림이 하나 떠올랐다.
부재중 전화: 우상일.
시간은 오후 5시 38분. 로비 시계가 마감 3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우상일은 단 한 번도 내게 직접 연락한 적이 없었다. 면담은 항상 유재현의 사무실을 통해서만 이루어졌고, 통역석 밖에서는 그와 개인적 대화를 나눈 일조차 없었다.
손가락이 통화 기록 위에 멈추었다.
법원 로비가 조용히 어두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