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열두 번째 파동

1화

PD실 책상 위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큐시트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한 잔은 이미 물이 다 빠져 투명한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모니터에 띄워둔 게스트 프로필은 스크롤 한 번 내리지 않은 채였다.

문이 두드리는 소리도 없이 열리고, 조연출 한 명이 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막차 편지요. 접수부에서 방금.”

서지오는 큐시트에 형광펜으로 줄을 긋다 말고 받아들었다. 일반 A4 서류 봉투. 겉면에 수신인만 깔끔한 볼펜 글씨로 쓰여 있었다. 〈밤을 건너는 파동 담당자 앞〉. 문이 닫히고 다시 혼자였다.

스탠드 불빛 아래서 손톱으로 봉합선을 뜯는데, 종이가 거친 소리를 냈다. 안쪽에서 접힌 연습장 용지 한 장이 빠져나왔다. 공책을 찢어낸 자국이 한쪽 변에 남아 있었다.

펴기도 전에 손끝이 먼저 멎었다. 둥글고 약간 오른쪽으로 기운 글씨. ㅈ과 ㅇ의 획을 연결해 쓸 때마다 생기는 특유의 리듬감. 손바닥 안쪽이 차가워졌다.

첫 줄. [지오야, 나야]

두 번째 줄로 눈이 내려갔다. [편지는 처음 써본다. 이렇게 쓰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근데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몰라서, 우리만 아는 말부터 꺼낼게.]

손가락으로 용지를 반듯하게 펴는 데 두 번 실패했다. 세 번째에 겨우 평평하게 폈다.

[도토리야, 잘 지내?]

어금니를 깨물었다. 도토리. 언니만 불렀던 별명이었다. 초등학교 때 가을 소풍에서 주운 도토리를 주머니에 가득 넣고 다녀서 붙은 별명. 엄마도 아빠도 몰랐다.

[날 찾지 마.]

시계를 봤다. 11시 53분. 왼쪽 손목의 낡은 가죽시계 초침이 흔들리지 않고 멈춰 있었다.

편지를 접었다. 손이 떨려서 정확히 반으로 접히지 않았다. 두 번 접고 다시 봉투에 밀어 넣었다. 서랍에 넣어야 했지만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2층 로비로 내려가는 복도에는 얇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서지오는 왼손에 큐시트 뭉치와 편지 봉투를 함께 쥐고 걸었다. 파우치에 넣으려다 말았다. 구겨질까 봐.

로비 자판기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 짙은 네이비 니트에 검은 슬랙스. 이마를 드러낸 깔끔한 헤어스타일. 오른손으로 캔커피를 따고 있던 유재민이었다. 모니터에서 프로필을 확인하지 않은 대가였다.

“오랜만이야, 서지오 씨.” 캔을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서지오는 그를 스쳐가듯 발걸음을 옮겼다. “PD님?” 스쳐가려던 오른쪽 팔목 앞으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자판기 불빛이 편지 봉투의 흰 표면을 스쳤다. 유재민의 시선이 봉투 겉면의 필체에 멎었다. 그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 편지.”

그의 손은 여전히 캔커피 옆에 매달려 있었다. “서지윤이 거야?”

서지오는 편지를 팔 안쪽으로 당겼다. 허나 이미 늦었다. 봉투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가 접히는 작은 소리가 났다.

“그거랑 무슨 상관이세요.”

유재민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 질문은 단순한데.” 캔커피를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필체만 봐도 알겠어. 십 년 전에 스무 통 넘게 방송국으로 보내왔던 그 글씨. 내가 못 알아볼 거라 생각했어?”

“당신이 편지 열람 권한이 있었던 적 없습니다, 유재민 씨.”

“지금 그걸 따질 때야?” 그가 고개를 숙여 서지오의 시선 높이와 자신을 맞췄다. “묻는 건 나야. 그 편지, 서지윤이 거냐고.”

서지오는 들고 있던 큐시트 뭉치로 편지 봉투를 가린 채, 손을 천천히 파우치 쪽으로 가져갔다. 유재민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대답 안 하면 끝날 줄 알아?”

그가 상체를 일으키며 제자리에 섰다. 자판기 푸른 빛이 오른쪽 눈가의 얕은 흉터 위로 떨어졌다.

서지오는 아무 대답 없이 편지를 파우치 안쪽에 밀어 넣었다. 지퍼를 올렸다. 올리는 데 한 번 실패하고 다시 잡아당겼다. 손끝이 떨리는 건 숨길 수 없었다.

“생방송 3분 전이에요.” 파우치를 가슴 쪽으로 감싸 쥐며 그를 올려다봤다. “스튜디오로 가시죠.”

유재민의 눈이 파우치를, 서지오의 손을, 그리고 마침내 눈을 응시했다. “그래.” 그가 뒤로 물러섰다. “방송 끝나고 다시 묻는 거, 기억해 둬.”

발소리가 복도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서지오는 혼자 서서 스튜디오로 이어지는 통로를 바라봤다. 가슴팍에 댄 파우치에서 편지 봉투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느껴졌다.

도토리야.

심장이 다시 느리게, 묵직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쪽에서 작가가 “PD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파우치를 한 번 더 눌러 확인하고, 서지오는 통로를 향해 걸음을 뗐다.

복도에서 스튜디오까지의 짧은 거리, 서지오의 발걸음은 통제된 리듬을 되찾았다. 진행석에 앉을 때 파우치는 여전히 가슴팍에 닿아 있었지만, 손은 이미 첫 편지를 고르고 있었다. 유재민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마이크 위치만 조정했다. 오프닝 시그널이 끝나갈 무렵, 서지오는 봉투를 열 준비를 마쳤다.

스튜디오의 온에어 불빛이 켜졌다. 빨간 원이 어둠 속에서 뭉개지듯 번진다.

진행석 맞은편, 유재민이 헤드폰을 귀에 걸고 있었다. 이마를 살짝 덮은 검은 머리칼 사이로 눈가의 얕은 흉터가 지나갔다. 나를 보는 시선은 방송 전과 다름없이 차가웠다.

오프닝 시그널이 깔렸다. 첼로처럼 낮고 느린 멜로디. 유재민이 마이크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밤을 건너는 파동, 열두 번째 밤입니다. 진행자 유재민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코너로 찾아왔습니다. ‘밤을 건너는 사연’. 청취자 여러분의 편지를 기다립니다.”

유재민이 내 쪽을 흘끗 봤다. 나는 천천히 파우치에서 첫 번째 편지를 집어 들었다. 봉투를 뜯자 싸구려 볼펜 냄새가 올라왔다. 누렇게 바랜 A4 용지에, 파란 글씨.

“첫 사연입니다. 십 년 전 오늘, 나는 누군가의 비밀을 알게 됐습니다. 그 비밀은 밤에만 피는 꽃 같았습니다. 누군가는 나를 지키려 했고, 누군가는 내 침묵을 원했습니다.”

“흥미롭군요.”

유재민이 사연을 끊었다.

“사연 속의 인물은, 침묵을 선택한 걸까요. 아니면 침묵을 강요당한 걸까요.”

“그걸 따지는 게 지금 중요한가요.”

유재민은 아주 잠깐, 한 박자 늦게 웃었다.

“PD님 생각은 어떤지.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고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 그게 강한 걸까요, 약한 걸까요.”

마이크 앞이라는 걸 잊은 듯, 그의 물음은 반말과 존대의 경계를 흔들었다. 나는 종이 가장자리를 접으며 답했다.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면 강함이고, 선택지가 없었다면 생존이겠죠.”

“날카로운 구분이군요.”

유재민이 다시 마이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스튜디오의 공기가 바뀌는 걸 느꼈다.

“청취자님들, 편지 속 주인공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열두 번째 파동이 건네는 신호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그의 시그니처 멘트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끝에 숨을 쉬지 않았다. 내가 아는 유재민의 진행 패턴과 묘하게 어긋나 있다. 그의 너무 깔끔한 애드리브와,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라고 사연 속 비유를 거의 그대로 쓴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처음 보는 편지에 대해 이런 반응이 바로 나오는 건 필자가 아닌 이상 어렵다.

“다음 사연은 내일 이 시간에 소개합니다.”

유재민이 멘트를 매듭짓고 온에어 불빛을 껐다. 엔지니어가 부스 밖에서 OK 사인을 보냈다. 방송 종료.

유재민이 헤드폰을 벗어 걸었다. 외부 마이크 선을 감는 손이 평소보다 빨랐다. 일부러 나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

“잠깐만요.”

내가 불렀다. 유재민은 이미 문 쪽으로 세 걸음쯤 가 있었다.

“사연 반응이 무척 빨랐네요. 요즘 진행자들, 저렇게 코멘트 준비하고 오나요.”

“경험이죠.”

짧은 답변이었다. 유재민이 뒤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무슨 경험 말이에요.”

“밤을 여럿 건넌 사람의 경험.”

문이 열리고 닫혔다. 복도에 발소리가 멀어졌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쪽.

나는 편지를 접지도 않은 채 손에 쥐고 부스를 나섰다. 복도 끝 계단실 문이 닫히는 소리. 위로 올라가는 구두 소리. 옥상이다.

계단은 가팔랐다. 나는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올랐다. 계단실 형광등 불빛이 깜빡였다. 세 번째 꺼질 때쯤 옥상 철문이 보였다.

문을 열자 찬바람이 턱을 때렸다.

도시의 불빛이 멀리서 컬러 노이즈처럼 일렁였다. 유재민이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담배 냄새도 없이, 핸드폰도 켜지 않은 채. 그가 나를 돌아봤다.

“여긴 왜.”

“추궁하려고요.”

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

“그 편지요. 처음 보는 거 맞아요.”

“처음 본다면?”

“아니죠. 당신은 이미 밤을 건너서 이 편지를 만난 사람 같아요. 내용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내 억측인가요.”

유재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오른쪽 눈가의 흉터가 옥상 조명 아래에서 더 깊이 패여 보였다.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서지오 PD. 항상 이렇게 집요한 편인가.”

“답이나 하세요.”

“그 편지는… 익숙한 억양을 갖고 있었을 뿐이야.”

거짓말이다. 나는 손에 쥔 편지를 번쩍 들었다. 종이가 바람에 펄럭였다.

“어떤 억양. 어떤 문장.”

“밤에만 피는 꽃.”

그가 똑바로 나를 응시했다. 방송 중과는 완전히 다른 시선이었다. 경계도, 비꼼도 아닌 체념에 가까운.

“네 언니가 자주 쓰던 말이야.”

순간 모든 레코드판이 동시에 멈춘 것 같은 정적.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재민이 한 걸음 다가왔다가 멈췄다. 손을 뻗으려다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서지오. 더 이상 파고들지 마.”

“뭐라고요.”

“네 언니는 스스로 사라진 거야.”

자갈밭에 떨어진 유리구슬처럼,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질적으로 들렸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이 이상은 말할 수 없어. 다만… 그날 밤 이후로, 그쪽 세상에 없는 사람을 쫓고 있다는 것만 알아둬.”

그가 등을 돌렸다. 옥상 철문이 열리며 계단실 형광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거기 서요.”

내 목소리는 이미 반말이었다. 유재민의 발이 멈췄다.

“당신, 알고 있는 거 다 말하고 가요. 편지도, 언니도, 그날 밤도.”

“안다. 다 안다고 친다.”

그가 어깨 너머로 나를 봤다. 미소인지 경련인지 구분되지 않는 입매.

“그런데 왜 네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철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이어졌다. 나는 잠시 달려가려다 멈췄다. 다리가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옥상 난간에 혼자 남았다.

손에 든 편지가 바람에 모서리부터 구겨지고 있었다. 푸른 볼펜 글씨가 희미하게 떨렸다. ‘나의 침묵을 원했다’라는 문장이, 마치 내 손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언니가 스스로 사라졌다.

유재민은 그렇게 말했다. 근거도 없이, 변명도 없이. 하지만 그 문장에 담긴 확신은 연기가 아니었다.

십 년 전 그날 밤, 유재민에게는 나보다 더 많은 조각이 있다. 그걸 믿는 순간 분노가 힘을 얻었다. 나 혼자 죄책감 속에 살아온 세월이 배신처럼 되돌아왔다.

나는 편지를 접었다. 천천히, 접힌 선을 손톱으로 눌러가며, 또박또박 접었다.

“됐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 이곳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만은 확실했다.

멀리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올라왔다. 유재민이 방송국을 떠나는 소리였다. 나는 옥상 난간을 한 번 더 움켜잡았다가 놓았다.

도시의 야경이 흐릿하게 번진다. 열두 번째 파동이 끝난 밤이었다. 그리고 이제 시작이다.

옥상 난간에 혼자 남았다.

손에 든 편지가 바람에 모서리부터 구겨지고 있었다. 푸른 볼펜 글씨가 희미하게 떨렸다. ‘나의 침묵을 원했다’라는 문장이, 마치 내 손안에서 살아 움직
열두 번째 파동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