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열두 번째 파동

2화

철문이 닫힌 지 한참이 지났다.

나는 손에 든 편지를 접어 파우치 안에 밀어 넣었다. 유재민의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계단으로 향했다. 한 계단 내려설 때마다 무릎이 울렸다.

옥상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을 때,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그는 아직 거기 있었다. 벽에 기대어, 마치 내가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자세로. 비상계단 입구 쪽 기둥에 어깨를 붙이고 담배도 없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안 갔어요.”

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프로페셔널하게 통제된 톤이었다. 그게 더 이상했다.

“갈 생각이 없었으니까.”

유재민이 몸을 일으켰다.

“이런 식으로 회피할 거면 처음부터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말았어야죠.”

“회피가 아니라 선택이야.”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복도 조명이 눈가의 얕은 흉터를 지나갔다.

“네가 따라올지 안 올지, 그 선택을 네게 맡긴 거다.”

나는 파우치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럼 대답하세요. 당신이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가 뭐죠. 십 년 동안 실종 신고 하나 취소되지 않은 사람이, 왜 스스로 사라졌다고 단정하는 거예요.”

유재민의 시선이 내 왼쪽 손목으로 떨어졌다. 멈춰 있는 낡은 가죽시계. 그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날 밤, 서지윤이 나에게 전화를 했어.”

복도가 조용해졌다. 위층에서 에어컨 실외기 소리만 웅얼거렸다.

“방송 끝나고 30분쯤 뒤였나. 목소리가 평소랑 달랐어. 누군가에게서 도망치고 있다고 했고, 곧 모든 걸 끝낼 거라고…….”

유재민의 턱 근육이 굳었다.

“내가 전화를 끊었어. 방송 사고였다. 부스 밖에서 엔지니어가 급하게 부르는 바람에.”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눈을 절대 피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어. 그리고 사흘 뒤, 서지윤은 사라졌다.”

내 손끝이 시계 유리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무의식적인 버릇이었다.

“……당신이 그걸 왜 지금까지.”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의 대답은 지나치게 빨랐다. 미리 준비한 문장 같았다.

“하지만 네가 그 편지를 받았어. 십 년 만에, 서지윤의 필체로. 이건 더 이상 나 혼자 묻어둘 얘기가 아니야.”

나는 편지 봉투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래서 제안이 뭐예요.”

“편지를 감정하자.”

유재민이 벽에서 등을 뗐다.

“내가 아는 필적 감정사가 있어. 서지윤의 편지를 이십 통 넘게 봤고, 지금도 그 글씨를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믿지 않을 테니까, 제삼자의 감정을 받자.”

“조건은요.”

“감정 결과가 진짜라면, 너는 이 편지의 출처를 추적하는 모든 과정에 나를 포함시킨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정제된 문어체였지만, 마지막 문장 끝이 살짝 까슬했다.

“거짓된 희망으로 네 시간을 갉아먹는 걸, 이제는 보고만 있지 않을 거야.”

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유재민이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편지가 진짜라면 네 말이 맞고, 가짜라면 내 말이 맞는 거라는 계산. 그리고 그 계산 너머에 있는, 십 년 동안 이 남자를 붙잡은 것이 단순한 죄책감만은 아니라는 직감.

“좋아요.”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감정 결과 나올 때까지. 그 후는 다시 생각하죠.”

유재민이 내 손을 잡았다. 짧고 형식적인 악수였다. 그의 손바닥은 차가웠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둘 다 아직 안 갔군.”

권태호가 보온병을 든 채 다가왔다. 두꺼운 뿔테 안경 너머로 우리를 번갈아 봤다.

“얘기 끝났으면 자료실 좀 가보지. 서 PD.”

“자료실이요?”

“십 년 전 백업 테이프. 그쪽 업무랑 섞여서 내 보관함에 들어가 있었어.”

권태호가 보온병 뚜껑을 돌려 열며 담담하게 말했다.

“마지막 파동 방송분. 서지윤 씨 통화 녹음도 같이 묶여 있네.”

내 손목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멈춘 시계인데도.

자료실의 공기는 보관용 방습제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권태호가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이쪽이야.”

그가 보관 선반에서 덕트 테이프가 감긴 낡은 상자를 꺼냈다. 라벨이 바래서 글씨가 흐릿했다. ‘12회-백업-본방+예비’.

“들어 봐.”

권태호가 아날로그 믹서가 딸린 구형 플레이어에 릴 테이프를 걸었다. 내 귀에 헤드폰을 씌워 주고, 믹서의 페이더를 올렸다.

테이프가 돌아갔다.

처음에는 공백이었다. 긴 침묵. 그리고 서지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나야.”

숨소리가 가팔랐다. 바람이 마이크에 부딪히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실외였다.

“나 지금…… 나 지금 누군가한테 쫓기고 있어. 내 말 잘 들어.”

거기서 목소리가 끊겼다. 하지만 테이프는 멈추지 않았다. 빈 소리라고 생각했던 구간에서, 아주 작게 겹쳐진 대화가 흘러나왔다.

“……그걸 왜 이제 와서……”

“……입 다물지 않으면 끝이야. 선택은 네 몫이고……”

두 번째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 남자였다. 발신음인지 수신음인지는 구분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통화 중에 겹쳐 녹음된 대화였다.

헤드폰을 벗었다. 손끝이 저렸다.

“이 구간…….”

“들었어. 예전엔 몰랐어.”

권태호가 믹서의 노브를 내리며 중얼거렸다.

“디지털 변환하면서 잡음 제거하니까 살아나더군. 원본에선 완전히 묻혀 있던 소리야.”

“이게 협박이라는 걸 알고 계셨어요?”

“몇 시간 전에야 알았어. 네가 편지 가져온 날 밤, 예감이 좀 들어서 다시 돌려 본 거야.”

권태호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쩔 거지.”

나는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상자에서 꺼냈다. 손이 떨리지 않게 천천히. 권태호가 내민 외장 하드에 파일을 복사하는 동안, 나는 헤드폰 줄을 손가락으로 감았다 풀었다 반복했다.

“이 파일,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가져가. 어차피 네 거나 마찬가지야.”

복사가 끝났다. 나는 하드 드라이브를 파우치 안에, 편지 봉투 옆에 밀어 넣었다. 지퍼를 올리고, 한 번 더 눌러 확인했다.

자료실을 나설 때쯤 몸이 조금 떨렸다.

복도 창문 너머로 동틀 무렵의 하늘이 옅게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잠시 서서 그 빛을 바라봤다. 편지와 녹음 파일이 같은 파우치 안에 있었다. 십 년 전 언니의 마지막 목소리와, 지금 막 도착한 편지.

열두 번째 파동이 끝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었다.

아침 햇살이 국장실 창문을 비스듬히 가르고 있었다.

서지오는 손에 든 파일 한 장을 탁자 위로 밀었다. 유재민의 고정 게스트 계약서 초안이었다.

“이게 뭡니까, 서 PD.”

“보시면 압니다.”

국장이 안경 너머로 서류를 훑었다. 이마에 주름이 세 개 잡혔다.

“프리랜서 하나 고정으로 묶자고? 예산은?”

“제작비에서 조정합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국장이 서류를 밀어냈다. “유재민은 사고 친 전력이 있는 사람이야. 생방송 중에 욕설하고, 스폰서 광고 거부하고. 그 인간 데려왔다가 방송국 이미지에 금 가면 책임질 거야?”

“책임집니다.”

“어떻게.”

서지오는 가방에서 녹음 파일이 담긴 USB를 꺼내 국장 앞에 놓았다.

“이건.”

“십 년 전, 이 방송국에서 녹음된 테이프입니다. 어젯밤 복원했고요.”

국장의 눈빛이 바뀌었다. USB를 집어 들지는 않았다.

“그게 유재민과 무슨 상관이지.”

“유재민 씨가 이 녹음에 등장하는 인물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이걸 밖으로 가져가는 것보다 방송국 안에 묶어두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협박이야?”

“보고입니다.”

국장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십 초쯤 침묵이 흘렀다.

“네가 지금 이 프로그램 접겠다고 할 거지, 내가 거절하면.”

“예.”

“미쳤군.”

서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국장은 창밖을 한 번 보고, 다시 서지오를 봤다.

“계약 기간은.”

“석 달. 연장은 상호 합의.”

“출연료는?”

“회당 책정된 게스트 예산에서 십 퍼센트만 올렸습니다.”

“싸게 부려먹겠다는 소리네.”

“필요하면 제 월급에서 깎습니다.”

국장이 헛웃음을 흘렸다. 서류 맨 끝 장으로 넘겨 볼펜을 집었다.

“사고 치면 니 목이 날아가는 거다.”

“알고 있습니다.”

국장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종이를 다시 서지오 쪽으로 밀며 한 마디 덧붙였다.

“유재민 저 자식, 어딘가에 꼭 사고 치고 다니더라. 네가 감당할 수 있겠나.”

서지오는 서류를 챙기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미 감당 중입니다.”

점심 무렵, 휴게실 자판기 앞. 최미경이 믹스커피 두 잔을 뽑아 한 잔을 서지오 앞에 내밀었다.

“PD님, 계약서 도장 찍었다면서요. 진짜 유재민 씨랑 붙어서 하실 거예요?”

“할 거예요.”

“와.” 최미경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술을 축였다. 평소 수다는 사라지고, 뉴스를 읽을 때처럼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서지오가 고개를 들었다. 최미경의 손가락이 종이컵 테두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십 년 전, 그날 밤. 방송 끝나고 정리하러 스튜디오 복도 지나가는데요.”

말이 멈췄다. 최미경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이었다.

“서지윤 언니가 복도 끝에서 누군가랑 싸우고 있었어요. 아니, 싸운다기보다… 언니가 막 밀치듯이 소리 지르고, 상대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뭐라 뭐라.”

서지오의 손이 멈췄다.

“그걸… 봤어요?”

“네. 근데 저 너무 겁먹어서. 신입이었고, 그 남자가 덩치가 엄청 컸어요. 어깨가 복도 폭의 반은 차지하는 것 같았고.”

최미경이 종이컵을 내려놨다.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지금껏 말 못 했어요. 죄송합니다.”

서지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믹스커피의 단내가 코끝을 찔렀다. 자판기 모터 소리가 낮게 웅웅거렸다.

“그 남자 얼굴은.”

“못 봤어요. 뒷모습뿐. 검은 점퍼에… 체격만 기억나요.”

서지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최미경 씨.”

최미경의 눈이 커졌다. 혼날 거라 예상했는지 어깨가 굳어 있었다.

“괜찮아요. 이제부터 들을 이야기가 더 많을 테니까.”

서지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든 커피는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저녁, 서지오의 집 현관.

유재민이 검은 더플백 하나를 든 채 문턱에서 멈췄다.

“좁네.”

“둘이 살 집 아니니까요.”

“알고 왔어.”

그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가방을 벽 쪽에 내려놓고,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소파는.”

“없어요.”

“침실은.”

“하나.”

“침대는.”

“하나.”

유재민이 짧게 웃었다.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구분되지 않는, 입술만 올라간 모양새였다.

“바닥에서 자란 뜻이군.”

“담요는 드릴게요.”

서지오는 노트북을 식탁 위에 펼쳤다. USB를 꽂자 화면에 오디오 파일 하나가 나타났다. 파일명은 '161121_백업'.

“이게 뭔지 설명부터 들을까.”

“어젯밤 권태호 선배한테서 받은 녹음 테이프의 디지털 사본이에요.”

유재민의 눈빛이 살짝 좁아졌다.

“권태호. 그 노엔지니어가 왜.”

“십 년 동안 보관하고 있었대요. 사고 로그에 안 남은 보조 녹음이라고.”

서지오가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파일이 재생됐다. 처음에는 공백음, 그리고 희미하게 방송 시그널 멜로디가 깔렸다. 한참 뒤, 여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금 당장 와야 해. 아니면…”

남자의 낮은 음성이 그 말을 잘랐다. 스피커에서는 구체적인 문장이 뭉개져 들렸다. 서지오가 볼륨을 올렸다.

“협박이야.” 유재민이 말했다.

“네.”

남자의 대사가 이어졌다. “…네 동생, 서지오. 괜찮을 거라 생각하지 마.”

서지오의 손가락이 멈췄다.

자신의 이름이 테이프 속에서 흘러나왔다. 십 년 전, 이 목소리는 분명 내 이름을 거론했다.

유재민의 표정도 굳어졌다. 그는 식탁에 손을 짚은 채 스피커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협박성 대화가 몇 마디 더 이어진 뒤, 갑자기 배경음이 바뀌었다.

철제문이 닫히는 소리.

무겁고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 바람을 가르며 닫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손잡이를 꾹 눌러 닫아야만 나는 특유의 둔탁한 떨림.

서지오는 그 소리를 알고 있었다.

방송국 옥상의 철문.

유재민의 시선이 천천히 서지오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 사이로 짧은 숨만 한 번 들이켰다.

서지오는 파일을 멈추지 않았다. 소리가 끝나고 무음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손목의 낡은 시계 유리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유리창에 희미하게 얼룩진 지문이 번졌다.

“그 남자.” 서지오가 입을 열었다. “방송국 내부를 아는 사람이에요.”

열두 번째 파동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