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열두 번째 파동

10화

옥상 철문이 열리고 바람이 몰려들었다. 유재민은 난간에 기댄 채였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너도 여기였구나.”

그의 목소리는 바람에 반쯤 묻혔다. 나는 두 걸음 거리에서 멈췄다. 주머니 속에서 편지 봉투 모서리가 손가락에 닿았다.

“그 메시지. 읽었어요.”

유재민의 등이 굳었다.

“좌표를 읽었다고. 진짜 편지의 주인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언제 왔나.”

“정자에 있었을 때요. 발신자 표시 제한이었고, 협박범의 말투였어요.”

유재민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옥상 비상등이 그의 얼굴 절반만 비추고 있었다. 눈가 흉터가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선으로 빛났다.

“서지윤이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 있어.”

숨이 멎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한테는 말한 적 없죠.”

“‘도토리야. 너한테 꼭 전해달래.’”

유재민의 입술이 그 말을 뱉자,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졌다. 언니가. 마지막 순간까지.

“왜 이제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전화를 끊은 건 나였으니까.”

시계줄이 손목을 조였다. 무의식적으로 검지로 유리를 톡톡 두드리다 멈췄다. 유재민의 시선이 내 손목에 박혔다.

“그 시계. 아직 멈춰 있나.”

“뭐가.”

“시간을 봐.”

손목을 들어 올렸다. 시계 바늘은 여전히 2시 1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재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2시 13분.”

그가 한 발 다가왔다.

“내 흉터가 생긴 시간이랑 똑같다. 새벽 2시 13분.”

바람이 발밑을 휩쓸었다.

“그게 무슨.”

“지금 이 시간에 알게 되다니.”

유재민의 손이 자신의 왼쪽 눈가로 올라갔다. 손끝이 흉터를 더듬었다.

“서지오. 따라와.”

“어딜.”

“네가 알아야 할 곳이다.”

구관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비상등만 깜빡이고 있었다. 유재민이 먼저 걷고 나는 세 계단 뒤를 따라갔다. 시계는 아직 손에 쥔 채였다.

지하 창고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유재민이 손잡이를 돌리자 썩은 종이 냄새와 오래된 전자기기 특유의 금속 냄새가 밀려왔다. 선반마다 먼지 쌓인 릴 테이프, 진공관, 낡은 믹서들이 쌓여 있었다.

“이쪽은 언니의.”

구석에 놓인 작은 책상. 그 위에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 이름표에 ‘서지윤’이라고 적혀 있었다. 편지 봉투 몇 개, 낡은 스테이플러, 빈 커피 컵.

“여기에 왜 이런 걸.”

“방송국에서 개인 물품 정리를 안 했어. 사라진 직원의 짐을 버릴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유재민은 책상 앞에 섰다. 나는 바구니 옆에 놓인 의자 등받이를 짚었다. 앉지 않았다.

“말해요.”

“서지윤은 그날 밤 나에게 전화해서 말했어. 최명훈이 편지를 모두 알고 있다고. 방송을 중단시키겠다고 협박했다고.”

“최명훈.”

“당시 방송본부장이야. 지금도 이사진으로 있어.”

편집실 녹음에서 들었던 목소리. 고위 인사라는 느낌. 민형식의 배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손끝이 시계 유리를 더 세게 쥐었다.

“언니는 그걸 견디고 있었던 거예요. 혼자서.”

“그 전화에서 서지윤은 ‘재민아 가지 마’라고도 했어. 하지만 방송 사고 때문에 난.”

유재민의 목이 한 번 꺾였다.

“끊었어.”

창고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전화를 끊자마자 후회했다. 내가 뭘 저지른 건지 알았어. 곧바로 주차장으로 뛰어내려갔고, 서지윤은 이미 없었어. 근처를 수색하면서 호숫가 정자까지 갔지.”

말이 빨라졌다. 손가락이 흉터를 다시 짚었다.

“내가 도착했을 땐, 그녀가 호수에 빠져 있었어.”

숨이 턱 막혔다.

“미끄러진 거야. 정자 쪽 돌계단에 이끼가 끼어 있었고. 난 뛰어들었어. 그런데.”

유재민의 손끝이 왼쪽 눈가에 멈췄다.

“그녀를 붙잡으려고 할 때 바위 모서리에 얼굴을 부딪혔어. 눈가가 찢어지고 물속에서 피가 번지기 시작했지. 그 짧은 순간 손을 놓쳤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끝까지 수색했어. 30분 넘게. 하지만.”

“찾지 못한 거예요.”

“응.”

유재민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떨림은 손끝까지 이어져 흉터 위를 맴돌았다.

“그게 진짜 이유였군요. 그 상처.”

“서지윤에게서 받은 마지막 선물 같은 거야. 나를 용서하지 말라는.”

“오만하네요.”

유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그걸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은 건, 네가 그걸 알면.”

“날 지키려는 거였어요? 그게 무슨 자격으로.”

서지오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반말이었다.

“네가 안다면 죄책감을 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걸 당신 혼자 결정한 거야.”

절단하듯 말했다.

“나한테 10년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언니에 대해. 그날 밤에 대해. 당신 흉터에 대해.”

“그래.”

“왜.”

유재민은 답하지 않았다. 창고 구석의 진공관 장비가 낮은 진동음을 내고 있었다.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냐고.”

유재민의 눈이 나를 향했다. 눈가 흉터가 비상등 아래서 실금처럼 반짝였다.

“내가 그녀를 구하지 못했어.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사고 현장을 떠난 사람이 바로 나야. 경비를 부르지도,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지. 호수에 빠진 여자를 구하려다 실패한 남자. 그런 놈이 무슨 얼굴로 너 앞에 설 수 있었겠어.”

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도 모르게 내 무릎도 접히고 있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이 손바닥에 닿았다.

“입을 열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서지윤이 사라진 다음에도 살아 있는 놈으로 남을 수 있을지. 그걸 10년 동안 모르고 있었어.”

우리 사이에 놓인 먼지 쌓인 선반들이 침묵을 더 키웠다. 나는 손에 쥔 시계를 바라봤다. 멈춘 초침. 언니가 마지막으로 내게 준 선물.

“당신.”

유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당신도 언니의 시간 속에 갇혀 있었네. 나처럼.”

유재민의 손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손가락이 콘크리트의 금을 따라 움직이다 멈췄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한 뼘 정도. 하지만 아무도 그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내 시계는 10년 동안 2시 13분이야. 당신 얼굴의 흉터도 2시 13분이고.”

나도 바닥을 짚은 채 앉아 있었다.

“언니는 같은 시간에 우리 각자한테 뭔가를 남겼네요.”

유재민이 눈을 감았다. 흉터가 접히는 모양이 낯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됐어요. 지금.”

내 대답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이미 아는 것들로 충분해요.”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묵 속에 머물렀다. 창고 깊은 곳에서 낡은 진공관 장비가 은은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새벽 2시 40분. 시계 초침은 멈춰 있었지만, 우리 사이의 무언가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무렵, 흩어진 유품을 분류하던 유재민이 뚜껑이 닫히지 않는 상자 하나를 내 앞으로 밀었다. 나는 무심코 그 안을 뒤적이다 손끝에 닿은 낡은 가죽 수첩을 집어 들었다.

창고 바닥은 차가웠다. 콘크리트 냉기가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지만 자릴 옮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재민이 건넨 말——언니를 구하려다 실패했다는 고백——이 아직 허공에 떠 있었다.

“언니가 남긴 게 여기 더 있을 거예요.”

상자 뚜껑을 열었다. 먼지 냄새가 확 끼쳤다. 낡은 방송 대본, 고장 난 헤드폰, 그리고 바닥 깊숙이 박힌 작은 수첩. 가죽 표지가 닳고 모서리가 말려 있었다.

“이거……”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자 앞표지 안쪽에 언니의 글씨가 보였다. 서지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도토리에게 Y의 별자리 지도를 전해줘.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유재민이 다가왔다. “뭐가 적혀 있지.”

수첩을 넘겼다. 날짜별로 정리된 목록이 빼곡했다. *3월 12일.

최명훈 실장, 첫 협박 편지. 5월 3일. 두 번째 협박 편지.

조사 자료 폐기 요구.* 페이지마다 같은 이름이 반복됐다. 최명훈, 최명훈, 최명훈.

“언니가…… 기록하고 있었어요.”

10년 동안 협박당한 내용을 몽땅 받아 적은 거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표지를 다시 짚었다. Y의 별자리 지도. 두 번째 편지, 네 번째 편지, 그리고 편지 봉투 구석마다 찍혀 있던 그 별 모양 Y.

“서명이 아니었어.”

유재민이 수첩을 빤히 내려다봤다.

“Y는 별자리 지도를 가리키는 거였군.”

“언니는 혼자서 암호를 만들었어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나는 멈춰 있던 시계를 품에서 꺼내 손목에 찼다. 여전히 바늘은 2시 13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 시계는 끝난 시간이 아니라, 시작해야 할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혼자가 아니에요.”

수첩을 품에 안았다. 유재민과 눈이 마주쳤다.

“알아.”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나도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

그때, 창고 철문이 삐걱 열렸다.

권태호였다. 손에 갈색 서류 봉투 하나를 쥔 채, 평소보다 조금 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시간은 새벽 3시 50분쯤이었을 거다.

“자네들 여기 있었군.”

숨을 한 번 고르고, 봉투를 내밀었다.

“10년간 가지고 있던 거야.”

나는 봉투를 받아 열었다. 안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었다. 최명훈의 협박 내용이 담긴 녹취록 전문, 그리고 손때 묻은 크림색 편지지. 언니의 마지막 편지 원본이었다.

그 편지지를 펼치자, 본문 위쪽 여백에 연필로 별자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세 개의 별이 선으로 이어지고, 그 끝에 작게 ‘Y’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서지윤 씨가 남긴 암호 해독 키야.” 권태호가 느릿하게 말했다. “편지 속 이니셜은 전부 이 지도에 대입하게 돼 있어.”

“어떻게 이걸……”

권태호는 잠시 창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형광등 한 개가 깜빡이고 있었다.

“사고 직후, 최명훈이 찾아왔어. 발설하면 방송국 전체가 위험해진다고 협박했지. 하지만 나는 서지윤 씨의 마지막 녹음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어.”

그가 안경을 벗어 닦았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파일을 숨기고, 증거를 지켰네. 그리고 이제 자네들이 준비됐다고 판단했어.”

나는 편지지와 수첩을 나란히 가슴 앞으로 모았다. 시계 유리가 형광등 불빛을 반사했다.

“감사합니다, 권 선생님.”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나는 말했다.

“다음 방송에서 이 암호를 풀 거예요. 세상에 진실을 전해주겠어요.”

유재민을 돌아봤다. 그가 조용히 끄덕였다.

“그게 나와 언니, 그리고 당신을 위한 마지막 파동이에요.”

새벽 첫 빛이 창고 지하 창 틈으로 스며들었다. 어디선가 권태호의 낡은 녹음 파일 속에서, 서지윤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려 퍼지는 듯했다. 파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열두 번째 파동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