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열두 번째 파동

11화

밤 11시. 스튜디오는 이미 생방송 준비 모드였다.

믹서 콘솔의 녹색 LED가 일제히 점등되고, 부스 안에서는 권태호가 페이더를 하나씩 밀어 올리고 있었다.

서지오는 스튜디오 책상 위에 편지 원본과 수첩을 나란히 펼쳐 놓았다. 언니의 마지막 편지.

크림색 종이 위의 별자리 그림이 조명 아래서 희미하게 빛났다.

유재민이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말없이 서지오의 손을 보고 있었다.

시계 위를 맴도는 검지. 유리판을 톡, 톡, 두드렸다.

“신경 쓰여?”

유재민이 물었다.

“아니.”

서지오는 손을 내렸다.

“그냥 확인하는 거야. 아직 멈춰 있는지.”

그때 부스 문이 열렸다. 권태호였다. 손에 보온병 하나. 특유의 보이차 향이 스튜디오 안으로 번졌다.

그는 편지 위의 별자리 그림을 내려다보며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해주세요, 권 선배님.”

서지오가 먼저 말했다. 권태호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별자리 한쪽 끝을 짚었다.

“이 Y. 서명이 아니야.”

“그럼?”

“시계 암호일세.”

서지오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왼쪽 손목 위로 올라갔다.

“서지윤 씨는 시간을 코드로 쓰는 버릇이 있었어. 편성표를 짤 때도, 녹음 파일을 분류할 때도.”

권태호의 손가락이 세 개의 별 사이를 따라 움직였다.

“이 별 셋은 시, 분, 초. 그리고 이 Y는……”

권태호가 서지오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영점. 시작점이야. 네 시계가 멈춘 그 시간.”

스튜디오가 조용해졌다. 콘솔 팬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2시 13분.”

서지오가 말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언니가 사라진 시간.”

유재민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럼 편지에 반복된 Y는 전부 특정 시간을 가리키는 건가.”

“그렇지.”

권태호가 끄덕였다.

“편지 본문의 이니셜들을 이 별자리 지도에 대입하면, 서지윤 씨가 실제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시간 순서대로 복원돼.”

서지오는 수첩을 펼쳤다. 언니의 손글씨. 빼곡히 적힌 숫자들 사이로 Y가 반복해서 나타났다. 매번 멈춰 버린 시계의 시간으로 회귀하는 패턴.

“언니가 이걸 왜……”

“증거야.”

유재민이 조용히 말했다.

“최명훈에게 협박당한 시점, 편지를 보낸 시점, 그리고 도망치기로 결심한 시점까지. 전부 기록한 거야.”

서지오는 편지지의 별자리 그림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별 하나, 또 하나. 십 년 전 언니의 손끝도 같은 자리를 지나갔을까.

“오늘 방송에서 이걸 풀 거예요.”

서지오가 고개를 들었다.

“언니의 시간을, 세상에 전해줄게요.”

권태호는 대답 대신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차 향기가 조금 더 진해졌다.

“그거면 됐네.”

유재민이 일어섰다. 믹서 콘솔 쪽으로 걸어가 예비 시스템 전원을 확인했다.

“내가 모니터링할 때, 네가 마이크 앞에 서라.”

“당신은?”

“나는 송출을 지킬 거야.”

그의 손이 예비 콘솔의 메인 스위치 위에 얹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밤 11시 55분.

최미경이 헐레벌떡 복도를 달려왔다. 평소와 달리 헤드폰도 걸지 않은 채였다.

“언니!”

스튜디오 문이 열리자마자 최미경이 소리쳤다.

“그 남자…… 그때 언니랑 싸우던 남자……!”

서지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진정해요, 미경 씨. 누구예요?”

“최명훈 이사요!”

최미경의 숨이 거칠었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걸 봤어요. 표정이…… 그때랑 똑같았어요. 십 년 전, 무대 뒤에서 지윤 언니한테 서류 봉투를 건네던 그 표정.”

유재민이 믹서 콘솔에서 손을 떼고 돌아섰다.

“확실해?”

“체구, 손짓, 걷는 속도까지…… 전부 기억나요.”

최미경의 목소리가 딱딱 끊어졌다.

“목격자로서 증언합니다. 그 사람이에요.”

바로 그때, 스튜디오 문이 다시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회색 양복. 빳빳한 포마드 머리. 최명훈이었다.

“생방송 5분 전인데, 다들 모여서 재미있는 이야기 중이군.”

문이 그의 등 뒤에서 천천히 닫혔다.

“내가 좀 늦었나?”

유재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어깨가 서지오의 시야를 절반쯤 가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사님.”

“일? 그냥 인사차 왔지.”

최명훈이 스튜디오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시선이 책상 위의 편지 원본에 멎었다. 그 짧은 정적 동안, 부스 안에서 권태호의 손이 믹서 아래로 내려갔다. 비상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 편지.”

최명훈이 턱짓으로 가리켰다.

“오늘 방송에서는 다루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서지오가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건 제가 결정합니다.”

“아니, 내가 결정해.”

최명훈이 손을 들었다. 리모컨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 스튜디오의 주파수 제어 권한은 이사진에게도 있어. 너희가 알고 있었나?”

그가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콘솔의 녹색 LED가 일제히 붉게 변했다. 온에어 표시등이 깜빡이다 꺼졌다.

“메인 송출이 죽었어!”

권태호가 부스 안에서 외쳤다.

“주파수 간섭이야. 외부 해킹 패턴이 아니라 내부 제어권 탈취. 확인했습니다!”

붉은 경고등이 천장에서 점멸하기 시작했다. 전파 장애 사이렌이 낮게 울렸다.

최명훈이 피식 웃었다.

“십 년 전에도 이랬지. 서지윤이 그걸 알았어야 했는데.”

서지오의 손이 멈춰 선 시계 위로 갔다. 유리판이 손끝을 차갑게 밀어냈다. 침묵이 흘렀다.

입술이 열렸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미경 씨, 방금 증언 녹음 중이에요. 권 선배님, 파일 보존해주세요.”

“이미 저장 중!”

최명훈의 미간이 좁혀졌다.

유재민이 그 틈에 움직였다. 예비 콘솔 앞으로 몸을 숙이는 그의 손이 정확했다.

“예비 송출 전환.”

목소리는 생방송 톤보다 낮고 단단했다.

“권 선배, 보조 믹서 채널 3번 살려주십시오.”

“체크!”

부스 안에서 권태호의 손이 날았다. 페이더가 재빠르게 재조정되고, 패치 패널이 클릭 소리를 냈다.

“누가 예비 회선을 만지라고 허락했나.”

최명훈이 한 걸음 다가왔다. 리모컨이 다시 올라갔다.

그 순간, 최미경이 스튜디오 의자를 밀며 길을 막았다.

“증거 인멸 시도는 추가 혐의입니다, 이사님!”

유재민은 돌아보지 않았다.

“보조 송출 안정화. 5, 4, 3……”

카운트다운이 스튜디오를 메웠다. 콘솔 위 붉은 LED가 하나둘 녹색으로 바뀌었다.

“온에어 복구!”

권태호의 외침과 동시에, 메인 모니터 스피커에서 프로그램 시그널이 흘러나왔다.

서지오는 이미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손이 마이크 스탠드를 감싸 쥐었다. 떨리지 않았다.

“밤을 건너는 파동, 열두 번째 밤입니다. 오늘은 어떤 사연보다 특별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려 합니다.”

최명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미 전파는 탔다.

“십 년 전, 이 방송국의 한 PD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내부 비리를 고발하려 했고, 그 때문에 협박을 받았습니다. 협박한 사람은 당시 편성 본부장, 지금은 이사진으로 있는 최명훈입니다.”

유재민이 예비 콘솔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손이 여전히 메인 스위치 위에 얹혀 있었다. 방패처럼.

서지오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평서형이었다. 마치 사연을 낭독하듯.

“증거를 남겼습니다. 편지와 수첩, 그리고 시계에 새겼죠. 2시 13분. 사고가 일어난 시간. 모든 편지에 반복된 이니셜 Y는 시작점을 뜻하는 암호였습니다.”

왼쪽 손목을 들어 마이크 가까이 가져갔다. 멈춰 선 시계.

“이 시계는 지금도 그 시간에 멈춰 있습니다. 제 언니의 시간입니다.”

최명훈이 뒤돌아 문으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잡았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복도 너머로 파란색 경광등이 깜빡였다. 보안팀과 경찰이었다.

“문 열어!”

“최명훈 씨.”

권태호가 부스 안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녹음 다 됐네. 현행범이야. 송출 확인했습니다.”

스튜디오 문이 밖에서 열렸다. 경찰 세 명이 동시에 진입했다. 최명훈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리모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딱딱한 플라스틱 소리.

끌려나가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서지오를 돌아봤다.

“네 언니도 이걸 원하진 않았을 거야.”

서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마이크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의 방송을 듣고 계신 모든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진실을 묻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파동은 멈추지 않습니다.”

숨소리가 마이크에 닿았다. 유재민이 예비 콘솔의 마스터 페이더를 천천히 올렸다. 목소리가 약간 더 커졌다.

“방송은 계속됩니다.”

새벽 1시경.

경찰과 보안요원이 철수하고, 최미경이 귀가했다. 권태호는 “숙직실 가서 차 한 잔 하겠네”라며 부스를 나갔다. 스튜디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먼저 의자에 앉은 건 서지오였다. 손이 시계 위로 가지 않았다.

유재민이 예비 콘솔 앞에서 돌아섰다. 그도 피곤해 보였다.

“앉아요.”

서지오가 옆자리를 가리켰다. 유재민이 걸어와 조용히 앉았다. 의자 두 개, 나란히. 방금 전까지 마이크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스피커에서는 아직 낮은 화이트 노이즈가 흐르고 있었다.

“끝났네.”

유재민이 말했다.

“응.”

“10년이었어.”

“알아.”

서지오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시선은 여전히 스피커를 향해 있었다.

잠시 후, 유재민이 몸을 기울였다. 천천히, 확실히. 예고 없이. 어깨가 먼저 닿았다. 온도, 체중, 그리고 낡은 니트의 감촉.

서지오가 눈을 감았다.

유재민의 왼손이 서지오의 오른손 위로 올라왔다. 두 손이 콘솔 앞 무릎 위에서 겹쳐졌다. 잡았다. 힘 있게, 조금 떨면서도.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얼굴을 무릎 쪽으로 기울이며 서지오가 물었다. 목소리는 약간 잠겨 있었다.

“이사 안 가.”

유재민의 대답도 낮았다.

서지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를 올려다봤다. 눈가의 흉터가 보였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다시 기울었다. 서지오도 몸을 그쪽으로 눕혔다. 이마가 그의 어깨에 닿았다. 숨소리 두 개가 스튜디오의 화이트 노이즈에 섞였다.

손은 여전히 포개져 있었다. 무릎 위에.

스피커의 노이즈는 낮고 일정했다. 파동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그 파동 안에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열두 번째 파동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