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열두 번째 파동

5화

권태호가 탁자 위에 서류 봉투를 올렸다. 두께가 얇았다. 겉면에는 사설 감정소의 도장만 찍혀 있었다.

“결과 나왔네.”

내가 물을 새 없이 최미경이 먼저 손을 뻗었다. 권태호가 고개를 저었다.

“먼저 보고할 게 있어.”

봉투 안에서 A4 용지 한 장을 꺼냈다. 인쇄된 필적 감정 보고서였다.

“필적 자체는 두 번째 편지와 첫 번째 편지가 동일 인물. 그리고.”

권태호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문장 하나를 짚었다.

“필압 패턴을 분석했더니, 이 글씨를 쓰는 사람이 이 방송국 내부 고위직 문서에서 본 듯한 분위기라고 적혀 있더군.”

유재민이 팔짱을 풀었다.

“의뢰인이 그래요, 감정사가 그래요.”

“감정사.”

권태호의 대답은 한 마디였다. 곧바로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손편지였다. 봉투는 없고, 접힌 편지지만 있었다.

“이건 어제 밤, 내 개인 메일로 온 거야. 발신인은 익명 처리했고.”

최미경이 편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무슨 내용이에요?”

“두 번째 편지의 필적 의뢰 건을 알고 있는 제보자. 편지를 보낸 사람이 방송 초창기부터 근무한 인물이며, 현직일 가능성이 높다고 적혀 있어. 신호음을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

나는 편지를 집었다. 익숙한 문장은 없었다. 내용은 짧았다.

‘당신이 찾는 사람은 가까이에 있다. 다만 그에게 접근하는 자는 모두 기록된다.’

최미경이 내 손 옆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체국 소인이라도 확인해보죠. 발신지 추적이—”

최미경의 말이 잘렸다. 회의실 문이 노크 없이 열렸다.

경영본부장 민형식이었다.

회색 정장에 손에는 서류 뭉치 하나. 그는 우리를 한 번 훑고는 권태호 옆 빈 의자를 당겼다.

“다들 일찍 모였네.”

민형식이 탁자 위 보고서를 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밤을 건너는 파동〉, 다음 분기 편성에서 제외될 수도 있어요.”

내 손이 편지를 반으로 접었다.

“심야 교양물 시청률은 떨어지는 게 당연한데, 요즘 심의 민원까지 접수됐고. 편지가 계속 오는 게 프로그램을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지적이 있어서.”

민형식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본부장님.”

내가 허리를 곧게 폈다.

“민원 내용을 직접 확인하셨습니까.”

“사무국에서 보고 올린 내용이야. 당연히 확인했지. 편지 수신 건수가 많아지니까 심의 쪽에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어.”

유재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빛에 미소가 없었다.

“심의 민원이라면 구체적인 조항을 알아야 할 텐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어떤 규정을 말씀하시는 거죠.”

민형식이 그를 바라봤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유 씨, 당신은 프리랜서잖아요. 내부 편성 회의에 관여할 자격은 없고.”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권태호가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지금 이 회의는 제작진 내부 업무 공유입니다. 경영 쪽 보고는 정식 보고 라인으로—”

“권 기사.”

민형식이 손바닥으로 서류를 한 번 쳤다.

“당신 은퇴한다면서. 계속 남을 겁니까.”

권태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민형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편지 수신을 계속하면 방송 심의에 걸릴 거요. 그땐 폐지로 끝나는 게 아니야.”

문을 향해 걸어가며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심의 징계까지 가면, PD 경력에 남아요.”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복도로 멀어졌다.

최미경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접었던 편지를 테이블 밑으로 내려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거.”

최미경이 내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숨기시게요.”

“아니, 일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살짝 떨렸다.

“잠깐 바람 쐬고 올게요.”

복도로 나왔다. 벽면의 형광등이 낮게 윙윙거렸다. 열 걸음쯤 걸었을까.

팔이 강하게 잡혔다.

유재민이었다.

“회의실로 돌아가지 않아.”

그의 목소리는 억양이 없었다.

“옥상으로 가. 할 말 있어.”

내가 팔을 빼려 하자 손의 압력이 오히려 단단해졌다. 그는 복도 끝 비상구 쪽으로 나를 끌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좁았다. 철문을 열자 바람이 머리카락을 뒤로 밀었다. 도심의 소음이 멀게 깔렸다.

그가 내 팔을 놓고 문을 닫았다. 등 뒤에서 금속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뭐 하는 거예요.”

내 목소리가 제법 평평하게 나왔다.

유재민이 한 걸음 다가왔다.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흩트렸다. 이마 위로 드러난 눈가의 흉터가 흐린 빛에 스쳤다.

“민형식 얘기는 절반쯤 무시해. 경영 압박이야.”

“그걸 옥상까지 끌고 와서 할 말입니까.”

“필적 감정 결과.”

그가 한 걸음 더 좁혔다.

“당신, 저 보고서 읽으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나는 대답 대신 턱을 약간 들었다.

“지금부터 당신을 지키는 쪽으로 방식을 바꾸겠다.”

유재민의 시선이 내 눈을 똑바로 잡았다.

“묻겠다. 그날 밤, 언니가 마지막으로 어디로 가는 걸 봤는지.”

내 숨이 한 템포 늦게 나갔다.

“그 통화에서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넌 이미 알잖아.”

존대가 사라졌다.

“지금, 그걸 묻는 거야.”

그의 말투는 문어체 그대로였지만, 눈빛에 칼날이 서 있었다.

“내가 끊은 그 통화. 그게 끝이었어. 그게 내 부분이야. 네가 그날 목격한 건, 내가 모르는 다음 장면이야.”

“당신에게 무슨 자격이 있죠.”

내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나는 주먹을 쥐지 않았다. 대신 코트 안주머니 쪽으로 손바닥이 눌렸다.

“십 년이나 지나서 나타나서, 그 통화 끊었다고 실수였다고. 그 한 마디로 내가 봤던 걸 가져가려 하지 마.”

“그걸 가져가려는 게 아니라 연결하려는 거야.”

“연결.”

나는 짧게 웃었다.

“당신이 통화를 끊지 않았더라면, 언니가 달라졌을까.”

유재민의 표정이 처음으로 멈췄다. 눈 깜빡임 하나 없이, 그는 나를 응시했다.

바람이 옥상 바닥의 먼지를 쓸고 지나갔다.

그가 몸을 돌렸다. 두 걸음 떨어진 옥상 난간으로 걸어가, 손을 올렸다. 철제 난간이 낮은 소리를 냈다.

왼손 검지가 눈가 흉터 위를 스쳤다.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손톱 끝이 그 선을 따라가다, 다시 난간을 꽉 쥐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군.”

그가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그날 밤의 서지오로 서 있네.”

옥상에는 나 혼자 남았다. 유재민이 서 있던 난간 쪽 바람이 아직 그의 체온을 머금은 듯 차갑게 감돌았다.

나는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이 봉투 모서리에 닿았다. 아침에 최미경이 건넨 추가 제보 편지. 접수부에서 막 올라온 것이라고 했다. 나는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A4 용지 한 장과, 낡은 바인더에서 뜯어낸 듯한 스캔본 여러 장이 접혀 있었다.

메모는 단 한 줄이었다.

편지의 필적을 아는 자가 방송국 내부에 있다.

필적. 나는 두 번째 편지의 글씨를 떠올렸다. 언니의 손글씨를 완벽하게 흉내 냈지만, 획 끝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을 아는 사람.

스캔본을 펼쳤다. 십 년 전 언니의 업무일지였다. 날짜별로 정리된 방송 일정과 사연 요약이 빼곡했다. 마지막 페이지, 실종 일주일 전 날짜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 친 메모가 눈에 띄었다.

도토리, 오늘도 편지 도착. 답장 여부 보류.

도토리. 첫 번째 편지에 적혀 있던 코드명이었다.

나는 종이를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철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유재민이 아까 옥상에서 내 손목을 붙잡았을 때, 그의 검지가 왼쪽 눈가 흉터를 스치는 걸 봤다.

마치 상처를 확인하는 버릇처럼. 방송 중에도, 복도에서도 그는 늘 그랬다. 대화가 무거워질 때마다 손이 먼저 눈가로 갔다.

그건 단순한 흉터가 아니었다. 벌을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자신이 아직 아프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여는, 어떤 속죄의 습관.

철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왔다. 3층 복도는 조용했다. 형광등 불빛이 긴 복도를 희게 칠하고 있었다.

복도 끝 창가에 유재민이 서 있었다.

손에 쥔 담배는 불이 붙지 않은 채였다. 그가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를 굴리는 모습이 보였다. 창밖에서 흘러드는 오전 햇살이 그의 왼쪽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눈가의 얕은 선이 빛 속에서 희미하게 실루엣을 드러냈다.

내 발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봉투를 든 손을 그대로 들어 보이며 다가갔다.

“당신이 언니에게만 책임을 느끼는 게 아니었군요.”

유재민의 손가락이 멈췄다.

“지금 나한테도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짊어지려는 거죠.”

그가 몸을 완전히 돌렸다. 시선이 내 손의 봉투에 닿았다가 다시 내 얼굴로 올라왔다. 눈매 사이가 좁아졌다.

“착각하지 마요, 당신과 얽힌 건 그쪽 편지 때문일 뿐.”

말하는 동안 그의 왼손이 올라갔다. 검지가 눈가를 한 번 쓸었다. 흉터 위를 정확히 가로질렀다. 그는 자신이 그 동작을 하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흉터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다. 감추려는 표식. 누군가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을 스스로 가리고 있었다.

“이게 뭐죠.”

내가 봉투를 조금 더 들어 올렸다.

“아까 옥상에선 보여주지 않으셨죠. 추가 제보예요. 필적을 아는 사람이 방송국 안에 있다는군요. 언니의 업무일지 스캔본도 들어 있어요.”

유재민의 손이 순간적으로 움직였다. 봉투를 낚아챘다.

“이건 내가 조사할 테니.”

그는 스캔본을 반쯤 빼내 확인했다. 손가락이 마지막 페이지의 빨간 동그라미를 짚었다.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당신은 손 떼.”

“그게 당신 혼자 결정할—”

“손 떼라고.”

목소리가 낮았다. 전에 없이 거칠었다. 유재민은 봉투를 접어 자신의 코트 안주머니에 밀어 넣고는 돌아섰다.

회의실 방향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의 어깨가 단단히 굳어 있었다. 왼손이 다시 올라갔다. 눈가를 짧게 누르고 내렸다. 그 손이 바지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복도 바닥에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흉터는 지도였다. 그가 스스로를 가둔 감옥의 문. 끊임없이 손을 대 확인하는 건 문이 아직 잠겨 있음을 점검하는 의식이었다.

당신도 스스로를 가두고 있군요.

회의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유재민의 발소리가 사라졌다. 나는 창가에 선 채로 한참을 더 서 있었다.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 내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지만, 나는 왼쪽 손목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멈춰 있던 시계 유리가 차갑게 손끝을 밀어냈다.

나와 똑같이.

열두 번째 파동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