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열두 번째 파동

7화

방송이 끝난 지 이십 분쯤 지났다.

권태호가 믹싱 콘솔 전원을 내리다 말고 손을 멈췄다.

“둘 다, 잠깐.”

서지오가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대로였다. 유재민은 콘솔 아래 절단된 배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권태호가 안경을 벗어 카디건 소매로 닦았다.

“보여줄 게 있네.”

“지금이요?”

“그래. 구관 자료실.”

권태호의 손이 콘솔 측면을 짚었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십 년 묵은 물건이야.”

유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구관 자료실은 이 건물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 폐쇄된 지 삼 년째, 출입하려면 별도 키가 필요했다. 권태호가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최미경에게 짧게 스튜디오 정리를 부탁하고, 셋은 복도로 나왔다.

구관 복도는 형광등 절반이 나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권태호의 발걸음만 규칙적이었다. 서지오는 한 손으로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유재민은 조금 떨어진 뒤에서 따라왔다.

자료 보관실 철문 앞에서 권태호가 열쇠를 돌렸다. 녹슨 경첩이 끽, 소리를 냈다. 먼지 냄새. 권태호가 벽 스위치를 올리자 노란 백열등이 깜빡이며 켜졌다.

방 안은 좁았다. 사방이 서류 캐비닛이었다. 권태호는 맨 안쪽으로 걸어가 무릎을 굽혔다. 바닥 타일 한 장을 손톱으로 떠냈다.

거기 작은 금고가 있었다.

“이런 곳이.”

유재민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권태호는 대답 없이 다이얼을 돌렸다. 철컥. 문이 열렸다. 금고 안에는 스티로폼 포장에 싸인 DAT 테이프 한 개, 그리고 검은 플라스틱 케이스.

권태호가 테이프를 두 손으로 꺼냈다.

“지윤 씨 마지막 생방송.”

서지오의 호흡이 멎었다.

“방송 마스터예요?”

“아니. 당시 방송국 규정이 좀 달랐어. 송출용 녹음과 별개로, 엔지니어 재량으로 계통 하나를 더 물릴 수 있었지. 점검용 보조 녹음.”

권태호가 테이프 옆구리의 라벨을 엄지로 쓸었다. 종이 라벨이 누렇게 바랬다. 거기 펜으로 적힌 날짜.

십 년 전, 언니가 사라진 날.

“왜 이제야….”

서지오의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권태호가 고개를 저었다.

“들이밀기엔, 애매한 물건이었어. 기계적 결함으로 생긴 사본이고, 내부 규정상 소지는 위반이었지. 무엇보다… 증거로선 부족했네.”

유재민이 한 걸음 다가섰다.

“증거라는 건, 무슨 내용인지 아신다는 뜻이군요.”

“들었어. 딱 한 번만.”

권태호의 눈이 잠시 허공을 더듬었다.

“듣고 나서, 스스로도 없었던 걸로 치고 싶었나 봐.”

권태호가 캐비닛 서랍에서 낡은 DAT 플레이어를 꺼냈다. 먼지를 털고 전원을 연결하는 손길이 빨랐다. 기계가 윙, 하고 돌기 시작했다.

테이프를 삽입했다.

서지오와 유재민은 좁은 책상 앞에 나란히 섰다. 권태호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에서 첫 음이 흘러나왔다.

서지윤의 목소리.

“오늘도, 밤을 건너는 파동의 끝에서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벽이 오기 전 마지막 한 곡 들려드릴게요.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꼭 필요했던 하루였을 거예요. 네, 당신 말이에요.”

서지오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책상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목소리가 너무 선명했다. 십 년 전 오늘이, 바로 이 순간에 살아 있었다.

음악이 시작되고, 잔잔한 간주가 흘렀다. 이어서 방송 종료 시그널.

보통 녹음은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테이프는 계속 돌아갔다.

스피커에서 종료 신호가 가라앉은 뒤, 조용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서지윤의 숨소리.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때, 스튜디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서지윤 씨, 그걸 어디에 숨겼는지 말하지 않으면.”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가족도 끝이야.”

서지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녹음은 선명했다. 협박범의 발음 하나, 띄어쓰기까지 잡아냈다.

“방송국 안에서는 아무도 당신 편이 아니야.”

서지윤이 말했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지오는… 제 동생은 건드리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서지오의 무릎이 먼저 꺾였다. 바닥 타일이 차가웠다. 유재민은 움직이지 않았다.

미동도 없었다. 다만 왼손이 올라가 눈가 흉터 위를 짚었다. 손가락이 그 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테이프가 멈췄다.

정적.

“그 목소리….”

유재민의 입술이 굳게 다문 채였다. 손가락이 흉터 끝자락에서 멎었다.

“당시 방송국 사람이야.”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러나 그 건조함이 오히려 확신을 드러냈다.

서지오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입을 열었다.

“내가 그때 다투지만 않았어도.”

말이 조각났다.

“전화만 받았어도….”

유재민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가 서지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시선이 같은 높이에서 만났다.

“그건.”

짧은 한 마디.

“제 잘못이에요, 서지오 씨.”

권태호가 돌아섰다. 등 뒤로 서서 스피커 전원을 내렸다.

“그 전화를 끊은 건 저였고.”

유재민의 손이 서지오의 떨리는 손목 위에 얹혔다.

“그녀를 구하지 못한 것도 저예요.”

서지오의 손이 움찔했다. 하지만 뿌리치지 않았다.

유재민의 손은 따뜻했다. 권태호가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벽 쪽을 보고 섰다. 다만 서지오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소리가, 손가락이 천천히 유재민의 손 위에 겹쳐지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한참 뒤 서지오가 말했다.

“…됐어요.”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그것뿐인 말이었다. 유재민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권태호가 돌아섰다. 손에 검은 플라스틱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원본 DAT는 이거 하나야. 디지털 백업은 USB에 담아뒀고.”

케이스를 서지오에게 내밀었다.

“오늘부로 인계하겠네.”

서지오가 받아 들었다. 손끝이 아직 떨렸다.

“왜 저한테.”

“당사자가 가질 권리지.”

권태호가 말했다. 간결했다. 그 이상의 감정은 목소리에 없었다.

“하지만 한계도 알아둬. 성문 분석 하기엔 테이프가 너무 낡았네. 협박범 목소리의 주파수 패턴은 남았지만, 동일 인물 특정까지는 어려워.”

유재민이 일어서며 물었다.

“방송국 내부 수발신 기록은요.”

“없어. 그게 규정이니까.”

권태호가 고개를 저었다.

“역으로 말하면, 범인은 그걸 알았어. 그래서 더 대담하게 움직였고.”

유재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파일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면….”

“미끼로 쓸 수 있겠지.”

권태호가 유재민의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지오가 고개를 들었다.

“공개하는 건 너무 위험해요. 태호 선배님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요.”

“전면 공개가 아니야.”

유재민이 말했다.

“제한된 채널. 협박범이 이 파일을 알아차릴 만한 경로로만 살짝 흘리는 거지.”

“그걸 어떻게.”

“다음 생방송. 사연 소개 코너의 시간 배분을 조정하고, 익명 제보자의 음성 변조 인터뷰를 한 토막 삽입해.”

권태호가 끄덕였다.

“가능하네. 제작진만 알면 돼. 청취자는 그냥 콘텐츠로 듣겠지.”

“하지만 협박범은 달라.”

유재민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자기 목소리야. 뼛속까지 기억할 거고, 그럼 움직이겠지.”

서지오가 USB를 손바닥 안에서 꼭 쥐었다. 유재민의 손은 아직 그녀의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보관실 철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서지오의 발걸음이 조금 비틀렸다. 유재민이 팔을 내밀었다. 서지오가 잠시 망설이다 그의 팔을 짚었다. 권태호가 열쇠로 문을 잠갔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민형식이었다.

그가 걸음을 멈추더니 세 사람을 훑었다.

“무슨 긴한 일이라도 있나.”

서지오의 손이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USB와 DAT 케이스 모서리가 손바닥을 찔렀다.

권태호가 앞으로 나섰다.

“은퇴 전 인수인계 자료 정리 중.”

민형식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서지오의 굳은 얼굴, 유재민의 차가운 눈빛, 그리고 방금 잠근 보관실 철문. 그 시선이 마지막으로 서지오의 꼭 쥔 손에 닿았다.

“그런가.”

민형식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자정이 다 돼 가는데 인수인계라. 성실하군.”

발걸음이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시선의 온도는 한동안 남아 있었다. 서지오의 손등에 맺힌 식은땀처럼.

1층 계단.

서지오와 유재민이 나란히 내려왔다. 권태호는 보관실 문 앞에 남았다.

서지오의 걸음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유재민이 팔을 한 번 더 내밀었다.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짚었다.

“내가 운전할게요.”

유재민이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긴.”

짧은 대화였다. 둘 다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계단을 다 내려와 로비 바닥에 발이 닿을 때.

민형식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 PD.”

서지오의 발이 멈췄다. 유재민이 그녀 곁으로 바짝 붙었다.

민형식이 천천히 다가왔다.

“좀 전에 보관실에서 뭘 찾은 거요.”

서지오의 손에서 USB를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바닥에 DAT 케이스가 땀에 젖어 있었다.

“요즘 방송국에 이상한 편지들이 돈다는 소문도 있고.”

민형식의 말이 느렸다.

“조심해야 할 거요.”

유재민이 대신 대답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서 PD는 제가 모실게요.”

민형식의 눈이 유재민에게로 향했다. 몇 초의 침묵.

“그럼.”

민형식이 엘리베이터로 돌아섰다. 문이 닫혔다.

서지오의 손이 마침내 풀렸다. 손바닥에 USB 모양으로 붉은 자국이 찍혀 있었다. 유재민이 그 손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비를 가로질러 주차장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자정을 막 넘긴 방송국의 텅 빈 현관에 울렸다.

열두 번째 파동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