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열두 번째 파동

8화

구관 자료 보관실. 먼지 냄새가 여전히 코를 찔렀다.

서지오의 손에서 USB 자국이 채 가시지 않았다. 권태호가 벽 쪽 서류 캐비닛을 열고 낡은 방송 로그를 꺼냈다. 최미경이 그 옆에서 네 번째 편지를 펼쳤다.

“협박범이 ‘폐쇄된 구관’을 말했어요.”

서지오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구관은 지금 폐쇄된 곳이 여기뿐.”

권태호가 로그북을 넘겼다. 10년 전 송신탑 점검 기록이 빼곡했다. 유재민이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 암호.”

유재민의 손가락이 편지 가장자리의 숫자들을 짚었다. 37. 126. 탑 모양 낙서.

“위도와 경도야. 한강 북단, 폐공원 송신탑.”

서지오의 시선이 편지로 꽂혔다. 유재민이 편지를 내려놓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발신인이 널 유인하고 있어.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알아요.”

“그런데도 갈 생각이지.”

서지오가 대답하지 않았다. 유재민이 한 걸음 다가섰다.

“가지 마.”

유재민의 손이 서지오의 손목을 감쌌다. 서지오의 손목시계 아래,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유재민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절대 혼자 가지 마.”

서지오가 고개를 들었다. 유재민의 눈.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표정이 거기 있었다. 집요함이 아니었다. 그 너머의 것.

두려움이었다.

“잡겠습니다.”

권태호가 로그북을 덮으며 말했다.

“송신탑은 방송국 관할 구역이야.”

최미경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경찰에 알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이건 명백한 협박이고, 위치까지 특정됐는데—”

“경찰은 안 돼.”

서지오가 손목을 빼지 않은 채 말했다. 유재민의 손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증거가 부족해요. 음성 변조에 테이프는 노후됐고… 편지 필적만으론 체포영장이 안 나와요.”

“하지만.”

“내가 가야 해요.”

유재민의 손이 풀렸다. 대신 편지와 해독 메모를 접어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네가 가면 안 돼.”

“유재민 씨.”

“내가 간다.”

짧은 정적. 권태호가 안경을 벗어 닦았다.

“커피 좀 타올게요.”

서지오가 보관실을 나섰다. 손목에 유재민의 손 온도가 남아 있었다.

구관 복도. 형광등이 깜빡였다.

자판기 앞까지 걸어가다가, 서지오는 발을 멈췄다. 자료 보관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최미경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진짜 혼자 가시게요?”

“붙잡아줘.”

유재민이었다. 낮고 빠른 말투.

“서 PD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쫓아오려고 할 거야. 방송국에 발 묶어둬.”

“어떻게요? 선배가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요?”

“못 들으면 붙잡아. 자물쇠든 거짓말이든.”

서지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자판기 유리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창백했다.

유재민이 복도로 나왔다. 외투를 입고 있었다. 서지오와 눈이 마주쳤다. 한 박자. 유재민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커피는?”

“……안 마셔요.”

유재민이 걷기 시작했다. 서지오가 그 뒷모습에 대고 입을 열었다.

“혼자 가지 마요.”

유재민의 발이 멈추지 않았다. 복도 끝 계단으로 사라졌다.

서지오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손바닥에 USB 자국이 다시 얼얼했다.

최미경이 보관실에서 뛰어나왔다.

“선배님!”

서지오가 돌아섰다.

“송신탑 위치, 정확히 어디예요.”

“한강 북단 폐공원. 옛 방송국 중계탑 있는 곳이요. 그런데 선배님, 유재민 씨가—”

“알아요.”

서지오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최미경이 팔을 붙잡았다.

“안 됩니다! 혼자 가시면 위험해요. 지금 전화해서 권 선배님—”

“최미경 씨.”

서지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반말이었다.

“놔.”

최미경의 손이 멈칫했다. 서지오가 그 틈에 팔을 뺐다.

“권태호 선배님한테 연락해요. 경찰 말고.”

“선배님!”

서지오가 비상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구두 굽 소리가 빈 계단통에 울렸다.

한강 북단 폐공원. 새벽 2시가 조금 넘었다.

송신탑은 녹슨 철골 그대로였다. 강바람이 탑을 때리면 낡은 볼트가 덜컹거렸다. 유재민은 탑 아래서 발을 멈췄다.

“시간을 딱 맞췄군.”

어둠 속에서 민형식이 걸어나왔다. 방송국 출입증이 목에 걸려 있었다. 유재민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서지오는 안 왔나.”

민형식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쉽군. 직접 봤어야 하는데.”

“보낸 편지 전부 당신이 썼나.”

“일부는. 서지윤의 필적을 베끼는 건 어렵지 않았지. 보안팀 시절에 익숙해져서.”

민형식이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보안팀이 편지 검열을 했죠.”

“맞아. 서지윤이 방송국으로 부친 편지 전부. 그걸로 그녀를 압박했지. 방송국 내부 비리 서류를 감추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유재민의 턱이 굳어졌다. 민형식이 유재민의 왼쪽 눈가를 가리켰다.

“그 흉터. 그날 서지윤을 구하려다 실패한 흔적이지.”

유재민의 손이 저절로 눈가로 올라가다 멈췄다.

“네가 전화를 끊은 직후였어. 그녀는 옥상으로 도망쳤고, 거기서…”

민형식이 어깨를 으쓱였다.

“넌 늦었어. 지금도 그렇고.”

“테이프를 가져왔나.”

“여기.”

유재민이 외투 안주머니에서 테이프를 꺼냈다. 검은 플라스틱 케이스. 민형식의 눈이 거기 고정됐다. 유재민이 한 걸음 앞으로 내밀었다. 손끝이 민형식의 손에 닿기 직전.

유재민의 다른 손이 민형식의 팔을 낚아챘다.

민형식이 반응했다. 테이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의 체중이 부딪혔다. 민형식의 팔꿈치가 유재민의 왼쪽 눈가를 정확히 가격했다. 흉터 위, 뼈와 피부가 맞닿은 경계.

유재민의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한쪽 무릎이 꺾였다. 그래도 민형식의 팔을 놓지 않았다.

“그날도.”

유재민의 목소리가 비틀렸다. 피가 눈가에서 볼을 타고 흘렀다.

“이렇게 막아섰다.”

민형식이 뿌리치려 몸을 비틀었다. 유재민이 체중을 실어 밀어붙였다. 철골에 등이 부딪히는 소리가 탑 전체에 울렸다.

“서지윤을…”

유재민의 손이 민형식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흘러내리는 피 사이로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리고 지금은 서지오를.”

송신탑 아래로 서지오의 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을 비추었다.

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원 안으로 서지오가 뛰어들기까지, 송신탑 아래는 철골에 부딪히는 숨소리와 피비린내만이 두 남자를 묶고 있었다.

송신탑의 붉은 경고등이 깜빡일 때마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서지오는 달렸다. 폐공원의 갈라진 아스팔트가 운동화 밑창을 잡아당겼다. 유재민의 외침이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그날도 이렇게 막아섰다. 서지윤을… 그리고 지금은 서지오를.

민형식이 유재민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있었다. 유재민의 눈가에 핏물이 배어 있었다. 왼쪽 눈두덩이 찢어져 어둠 속에서도 붉게 번들거렸다.

서지오가 민형식의 등을 두 팔로 밀쳤다.

“놔요!”

민형식이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그의 팔꿈치가 서지오의 어깨를 쳤다. 서지오가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서 PD!”

민형식이 서지오를 향해 다가섰다. 손바닥에 쥔 USB를 집어 올리려 허리를 숙인 순간이었다.

유재민이 몸을 던졌다. 두 팔로 서지오를 감싸 안고 돌아누우면서, 그의 등이 민형식과 바닥 사이에 끼었다. 둔탁한 충격음. 서지오의 뺨에 유재민의 피 묻은 눈가가 닿았다.

“괜찮냐.”

유재민의 목소리가 귀 옆에서 낮게 떨렸다. 서지오가 눈을 떴다.

흉터. 왼쪽 눈가의 낡은 흉터가 피에 젖은 채로 희미하게 드러났다. 십 년 전 생긴 상처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가 고의로 숨긴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민형식이 쓰러진 유재민 위로 다시 손을 뻗으려던 순간, 붉은 빛이 공원을 휩쓸었다. 사이렌. 멀리서 경광등이 송신탑 아래를 비췄다.

최미경이 경찰 두 명을 이끌고 뛰어왔다. 숨을 헐떡이며 손전등을 비췄다.

“PD님! 유재민 씨!”

민형식이 일어서려는 것을 경찰이 제압했다. 수갑 채우는 금속음이 공원에 날카롭게 울렸다.

서지오는 유재민의 팔에서 빠져나와 무릎을 세워 앉았다. 손이 저절로 올라가 유재민의 왼쪽 눈가에 닿았다.

“이게…”

손끝이 흉터를 더듬었다. 피가 묻어나 손톱 밑으로 번졌다.

“언니 때문에?”

유재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말 대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서지오를 똑바로 바라봤다.

최미경이 떨리는 손으로 물티슈를 건넸다. 서지오는 받지 못했다. 손이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이런 식이었어요.”

서지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차갑고 건조한 톤.

“당신이 자꾸 내 앞에 나타난 이유. 그 집요하게 들이대던 태도.”

유재민은 침묵했다.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턱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새벽 4시 반. 방송국 옥상.

철문을 열자 바람이 먼저 밀려들었다. 서지오는 난간까지 걸어가 멈췄다. 유재민이 두어 걸음 뒤에서 기다렸다. 왼쪽 눈가에 거즈가 붙어 있었다.

경찰서에서 두 시간 가까이 진술서를 썼다. 민형식이 편지 발송과 협박 전화 모두를 시인했다. 십 년 전 내부 감사 자료를 서지윤이 우연히 확보했고, 그걸 빌미로 그가 협박했다는 진술. 서지윤이 그에게서 도망치던 중 실종됐다는 것까지.

서지오는 돌아서지 않았다. 난간에 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이제야 알겠다.”

바람이 옷자락을 펄럭였다.

“당신이 왜 그렇게 나한테 집요했는지.”

침묵. 유재민의 구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언니와 닮았으니까. 그걸 지키는 게 속죄라고 생각했으니까.”

서지오가 천천히 돌아섰다. 충혈된 눈. 허나 목소리는 더욱 건조해졌다.

“그런데 왜 그걸 말하지 않았지.”

유재민이 입을 열었다. “말하면… 네가 그 흉터를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걸 당신이 정해?”

서지오의 반말이 바람을 뚫었다. 차갑고 예리했다.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질지, 뭘 견딜 수 있을지. 그걸 왜 당신 혼자 결정해.”

유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일순 흔들렸지만, 곧 평소의 침착함으로 돌아왔다. “네 말이 맞다. 오만이었다.”

서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십 년째 멈춘 시곗바늘. 언니의 시계.

“나 혼자 걸을 시간이 필요해요.”

다시 존대로 돌아왔다. 유재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오가 옥상 문으로 걸어갔다. 손잡이를 잡고 힘껏 당겼다.

문이 닫혔다.

유재민은 난간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철문 닫히는 소리가 바람에 삼켜졌다. 그는 손끝으로 왼쪽 눈가 거즈를 가볍게 만졌다. 붕대 아래 낡은 흉터가 있었다.

그날도 바람 많이 불었지. 서지윤이 옥상 문을 잡고 내게 소리쳤다. 재민아 가지 마.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계단. 한 층 내려간 곳.

서지오가 멈춰 섰다. 손이 저절로 눈가로 올라갔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닦아도 젖은 자국이 다시 번졌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접힌 메모를 꺼냈다. 유재민이 경찰서에서 건넨 편지 해독 메모. 반으로 접힌 종이에 빨간 펜으로 암호 해석이 빼곡했다.

서지오는 그것을 다시 접었다. 한 번, 두 번. 끝까지 작게 접어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왼손이 시계 유리를 검지로 두드렸다. 톡. 톡.

그리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텅 빈 방송국 건물에 울렸다.

열두 번째 파동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