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파동
9화
권태호가 콘솔 앞 의자를 돌려 앉았다. 그의 손에는 은색 테이프 한 통. 아날로그 복원 장비의 붉은 전원등이 벽면에서 깜박였다.
서지오가 문 옆에 멈춰 섰다. 옥상에서 내려온 지 십 분도 채 안 된 얼굴이었다. 유재민은 그녀 뒤에서 한 걸음 띄어 섰다.
권태호가 테이프를 데크에 밀어 넣자 릴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스피커에서 빗소리 같은 화이트 노이즈가 흐르다 끊기고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하아…
서지오의 손이 저절로 시계 유리로 올라갔다. 언니다.
“들어.”
기계적으로 평탄화된 목소리가 스피커를 찢었다. 서지윤, 마지막 경고야. 네 동생 이름이 여기 또 나오더라. 서지오의 어깨가 경직됐고, 시계를 두드리는 손끝이 멎었다.
감사 자료 접어. 안 그러면… 변조된 음성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지윤의 울먹임이 터져 나왔다. 제발… 서지오는 건드리지 마세요…
테이프가 멈췄다. 정적 속에서 서지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목소리…
방송국 내부자예요. 그것도 상당한 위치.” 권태호가 안경 너머로 그녀를 직시했다. “고위 인사로 보나.” “이사진 주변 인물일 거예요.
‘자료 접어’라는 표현, 편성 내용을 알 만한 사람만 쓸 수 있는 말투였어요.” 유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음성 변조가 완벽해. 성문 분석도 불가능하다.” “변조가 완벽하다는 건, 그만큼 장비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뜻이잖아.” 서지오의 대꾸가 예리했다.
“방송 송출 장비와 내부 통신망을 모두 이해하는 인물.” 권태호가 테이프 케이스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좁혀지긴 했군.”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어림없어. 경찰은 음성 단독 증거로 움직이지 않는다.” 유재민의 말이 냉정했다.
덜컥. 문이 열렸다. 최미경이 숨을 헐떡이며 문틀을 붙잡고 서 있었다. 평소 목에 걸고 다니는 헤드폰도 없이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얬다.
“찾았어요, PD님… 아니, 생각난 게 있어요. 10년 전, 서지윤 언니 마지막 방송날이요.” 최미경이 침을 삼켰다. “저 그때 스무 살이었는데 무대 뒤에서 소품 정리하다가 봤어요. 덩치 큰 남자, 검은 양복. 서지윤 언니 팔을 잡고 서류 봉투를 내밀었어요. ‘이거 마지막이야’… 위협하는 말투였죠. 언니가 손을 뿌리치는데 남자가 다시 잡으려고 했고.”
“왜 여태 이 이야길.” 권태호의 물음에 최미경의 손바닥이 파우치를 꾹 눌렀다. “그땐 그냥 방송국 선후배 싸움인 줄 알았어요. 저 아직 신입이었는걸요.”
유재민이 벽에서 등을 뗐다. “인상착의. 더 기억나는 게 있나.” “키가 굉장히 컸어요.
서지윤 언니가 165였는데 남자가 한 뼘은 더… 그리고 손.” 최미경이 이마를 짚었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
은색에 검은 돌이 박힌. 그걸로 관자놀이를 긁는 버릇이 있었는데 징그러워서 아직도 잊혀지질 않아요.”
서지오가 숨을 들이켰다. 손가락이 시계 유리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최미경 씨, 그 반지 다시 한 번 말해 줄래요.
은색, 검은 돌.” “네. 뭔가 인장처럼 생긴….” “이사진 비서실이야.” 서지오가 몸을 돌리며 유재민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3년 전 연말 시상식장.
비서실 사람들이 단체로 착용했던 반지. 기념품으로 제작된 거예요.” 최미경의 눈이 커졌다. “그럼 그 덩치 큰 남자가…” “비서실 소속 직원. 이제 확실해요.”
서지오가 문으로 걸어갔다. 유재민이 재빨리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어디 가려고.” “비서실이요. 당장 누군지 확인해야 해요.” “증거는.” “최미경 씨의 증언이 있잖아.” “목격 증언만으로 경찰이 움직일 리 없다는 건 너도 알지.”
서지오가 그를 올려다봤다. 충혈된 눈가가 붉게 빛났다. “내부 통신망 맹점을 악용한 협박. 증거는 방송국 안에 몰려 있는데 경찰 수사는 못 한다. 그럼 내가 직접 가서 확인이라도 하면 안 돼요?” “지금 가면 협박범이 아니라 네가 불법 침입으로 찍혀.” 유재민의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서지오의 턱이 조금 들렸다. “그럼 나보고 또 침묵하라는 얘기예요.” 한 박자. 유재민이 대답하지 않았다. 서지오의 입가가 냉소적으로 비틀렸다. “됐어요.”
그녀가 손을 뻗어 문 손잡이를 잡았다. 유재민이 손목을 막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혼자 가지 마. 네가 없으면 증거 수집도 무의미해.” 서지오의 손이 멈췄다. “연결 고리. 비서실과 협박 전화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으면 같이 갈 테니까.”
두 사람 사이 공기가 얼어붙었다. 권태호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고, 찻잔이 받침에 닿는 소리만 편집실을 울렸다.
서지오가 문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시간을 줘요. 오늘 밤 안으로.” 그녀가 유재민을 똑바로 바라봤다. 눈물 자국은 말랐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젖은 채 날카로웠다.
구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평소보다 습했다. 유재민이 먼저 내려갔고, 나는 세 계단 뒤에서 따라갔다. 철문 앞에서 그가 권태호에게 받은 마스터키를 꺼냈다. 철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리자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서 뭘 더 말하려는 거죠.”
“이야기를 끝내자고. 네 죄책감 말이야.”
공기가 얼어붙었다. 유재민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십 년 전 그 통화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너 아직 나한테 말한 적 없어. 네가 언니와 마지막으로 나눈 말이 뭐였지.”
내 손이 저절로 시계를 감쌌다. 입술이 떨리더니 참았던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날 밤, 언니한테 짜증을 냈어. 라디오 듣고 있었거든. 언니의 마지막 생방송. 끝나자마자 전화했는데 통화 중이더라고. 열 번 넘게 걸었어. 겨우 연결됐을 땐 이미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 있었고.”
시계를 쥔 손이 떨렸다.
“언니 목소리가 이상했어. 그걸 알면서도 ‘오빠랑 무슨 얘기 그렇게 오래 했냐’고 비꼬았어요. 언니는 ‘지오야, 내일 꼭 전화할게’라고만 했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언니는 그때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나는 질투심에 통화를 끊어버린 거예요.”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재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통화, 언니 쪽에서 먼저 끊었을 거야. 네가 끊은 게 아니야.”
“뭐라고요?”
“나도 같은 밤에 통화했어. 방송 끝나고 바로. 서지윤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고, 너에 대해 말했어. 오늘 지오랑 싸웠다고. 마음이 너무 무겁다고. 통화 중에 갑자기 언니가 숨을 들이켰어. 그리고 말했지. ‘재민아, 이따 다시 걸게’라고. 배경에서 차 소리가 났어. 나는 그걸 듣고도 그냥 알았다고 했다.”
유재민의 손끝이 왼쪽 눈가 거즈 근처에서 멈췄다.
“통화 끊고 삼십 분쯤 지나서 불안해서 차를 몰고 방송국으로 나왔어. 구관 주차장에서 서지윤을 봤다. 언니는 덩치 큰 남자와 함께 있었어. 지금 생각하면 그 고위 관계자였을 거다. 언니가 그 남자에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어. 남자가 받다가 떨어뜨렸고, 종이가 흩어졌다. 언니가 몸을 숙여 줍다가 갑자기 달아났어. 남자가 차로 뒤쫓았고. 나는 뛰어들었지.”
심장이 두 번 뛰는 소리가 귀까지 울렸다.
“언니를 붙잡으려고 했어. 그런데 차가 방향을 틀었고, 나는 언니를 밀치다가 바닥에 넘어졌다. 눈가가 주차장 콘크리트 모서리에 긁혔고. 그게 흉터의 진짜 이유예요. 그리고 내가 언니를 구하려다 놓친 그 순간 이후로, 서지윤은 사라졌어.”
한참 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내 입술이 바짝 말랐다.
“왜 여태껏 이걸 숨겼죠. 당신이 통화 끊은 걸 후회하는 것도, 흉터 생긴 이유도——”
“네가 나처럼 될까 봐.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걸. 그 죄책감이 인생을 먹어치우는 걸.”
나는 주먹을 쥐었다.
“그걸 왜 당신이 정해요. 내 감정을, 내가 짊어질 죄책감의 무게를. 왜 매번 당신 혼자 결정하는 거냐고요.”
유재민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평소 그렇게 날카롭던 입술이 꼭 다물린 채 떨리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철문 손잡이를 잡았다.
“이해했으니까. 그게 다예요.”
계단을 절반쯤 올라갔을 때, 지하 벽에 부딪혀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게 내 탓이야.”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계단을 다 올라 구관 복도로 나왔다. 벽에 기대자 숨이 차올랐다. 눈을 감자 주차장 콘크리트 모서리, 흩어진 서류 봉투, 언니의 뒷모습이 번갈아 떠올랐다. 눈을 떠 시계를 내려다봤다. 십 년째 멈춘 바늘.
주머니 속 편지 해독 메모가 손에 닿았다. 꺼내 펼치자 빨간 펜으로 빼곡한 유재민의 글씨와 내가 적은 메모 하나가 보였다. 구관 지하 보관함 No.7.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계단 반대편 끝, 방송국 창고 깊숙한 곳에서 보관함 7번을 찾았다. 먼지 쌓인 철제 문을 열자 골판지 상자가 하나 있었다. 겉면에 빨간 매직으로 ‘서지윤 - 2014년 방송 자료’라고 쓰여 있었다.
열자 편지들이 나왔다. 청취자 사연, 방송 원고, 엽서들. 제일 아래 진한 크림색 봉투. 앞면에 언니의 글씨로 동생에게라고 적혀 있었고, 개봉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봉투를 뒤집자 안쪽에 잉크 펜으로 깨알같이 적힌 서너 줄의 숫자가 보였다.
37.561. 126.983.
그 아래 또 한 줄.
37.552. 127.071.
그리고 바닥에 작은 낙서처럼. 탑 → 호수.
심장이 요동쳤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짚었다. 첫 번째 좌표는 한강 북단 폐공원 송신탑.
이미 갔던 곳이다. 스마트폰 지도를 열어 두 번째 좌표를 입력하자 파란 핀이 찍혔다. 방송국에서 동쪽으로 2킬로미터.
호숫가 둘레길. 작은 정자.
언니가 표시한 지도 위 두 지점. 탑과 호수. 선 하나로 이은 그 경로는 방송국 송신 안테나의 주파수 가시거리와 정확히 겹쳤다.
이건 단순한 좌표가 아니었다. 방송국을 중심으로 한 신호 경로. 사건의 무대는 방송국 내부를 넘어서, 도시의 송신망을 따라 뻗어 있었다.
새벽 공기가 볼을 때렸다. 호숫가 정자는 비어 있었고, 물안개가 수면 위를 천천히 흘렀다. 정자 기둥에 기대어 편지 봉투를 펼쳤다.
숫자들을 다시 읽었다. 탑에서 호수까지 이어지는 경로. 송신탑의 전파 도달 범위.
이 좌표들은 편지보다 먼저 쓰인 게 분명했다. 언니가 사라지기 전, 이미 무언가를 추적하고 있었다는 증거.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음이 정자의 침묵을 찢었다. 발신자 표시 제한. 손끝이 멈칫했다. 메시지를 열었다.
좌표를 읽었군요.
숨이 멎었다.
그 장소로 오세요. 진짜 편지의 주인을 만나게 해드리죠.
휴대폰을 쥔 손이 떨렸다. 정자 바깥, 호수 너머로 방송국 송신탑의 붉은 경고등이 깜빡였다. 나는 봉투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시계 초침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