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검쟁명 (琴劍爭鳴)
1화
잿더미는 이미 식었다. 손바닥을 대자 차갑고 거친 감촉이 전해졌다.
하진혁은 무릎을 꿇고 앉아 검게 그을린 서까래 파편을 하나씩 치웠다. 사흘째 밤이었다. 장례는 끝났다. 사형들과 사제들의 시신은 산기슭에 묻었고, 스승의 묘는 검향각 터 바로 뒤 언덕에 썼다. 폐허에는 이제 뼈만 남은 기둥과 무너진 담장, 그리고 재만이 있었다.
그의 손이 무언가에 닿았다.
거문고였다.
반쯤 탄 천에 감겨 있던 스승의 유품. 길이 여섯 자, 오동나무 공명판은 그을음에 덮였지만 뒤틀리지 않았다. 괘와 안족은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줄은 끊어져 너덜거렸다.
하진혁은 천을 벗겨내고 거문고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묵직했다. 그는 손바닥으로 공명판의 재를 닦아내며 하백운이 이 악기를 연주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늦은 밤 검향각 마루에 앉아 느린 곡조를 타던 손. 그 손은 이제 흙 속에 있었다.
뒤집자 밑판에서 이음새가 드러났다.
원래라면 보이지 않을 선이었다. 그러나 불에 탄 접착제가 수축하며 틈이 벌어져 있었다. 하진혁은 숨을 멈추고 손톱을 그 틈에 밀어 넣었다.
작은 저항.
판이 들렸다.
이중 바닥이었다. 공명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얇은 목판 아래, 폭이 손바닥만 한 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는 푸른 비단 보자기에 싸인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하진혁은 책을 꺼냈다. 표지는 상아색 한지. 불길은 여기까지 닿지 않았다.
『금검술보(琴劍術譜)』.
스승의 친필이었다.
그는 거문고를 옆에 내려놓고 책을 폈다. 숯검정 묻은 손가락을 옷자락에 닦아내고서야 종이에 손을 댔다.
첫 장.
“소리는 물결이다. 검 또한 물결이다. 소리가 허공의 물결을 만들 듯, 검은 살의의 물결을 만든다. 이 둘을 하나로 꿰는 것이 금검술의 시초다.”
하진혁의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였다. 구절 하나하나를 삼키듯 읽어 내려갔다. 두 장, 세 장.
초식의 그림과 구결이 이어졌다. 현을 튕겨 검기를 쏘는 법. 음파로 방어막을 치는 법.
소리와 소리의 마디 사이에 칼날을 감추는 법. 그가 배운 적 없는 것들이었다. 스승은 살아생전 이 책의 존재를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책의 후반부로 넘기자 필체가 변했다. 초반의 정갈한 해서체가 아니었다. 빠르게 휘갈긴 행서체로, 여백에는 작은 주석들이 빼곡했다.
그 주석 중 하나를 읽던 손가락이 멎었다.
하진혁의 호흡이 가늘어졌다. 눈꺼풀이 몇 번 깜빡였다.
주석은 특정 구결의 운기 방식을 가리키며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구절은 위본(僞本)의 그것과 흡사하나, 혈맥의 흐름을 역행시킨다. 위본을 따른 자는 반드시 일곱 호흡 안에 담혈(痰血)을 토한다.”
위본. 거짓 책.
하진혁은 알고 있었다. 사문이 멸문당하기 직전, 사형이 손에 쥐고 있던 비급을. 겉보기에는 완벽한 구결이었으나 수련한 지 사흘 만에 사형은 피를 토고 쓰러졌다. 다른 문파들도 같은 비급으로 망했다. 모두 위조된 것이었다.
스승은 이미 그 위조 비급을 분석하고 있었다.
금검술보 말미, 주석은 위조된 구결과 진본의 차이를 일일이 대조하며 왜곡 지점을 기록해 두었다. 아홉 군데. 모든 위조는 같은 패턴을 따랐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핵심 운기 구결을 정확히 반대로 바꿔 놓은 것이다.
하진혁은 책을 덮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종이 위에 꽂혀 있었다.
복수의 첫 실마리. 스승은 죽기 전 이미 그 길을 닦아 놓았다. 금검술보에 담긴 분석은 스승이 위조 비급 유통의 배후를 추적하고 있었음을 뜻했다. 그리고 그 추적이 끝나기 전에 사문은 망했다.
그가 책을 다시 보자기에 싸려는 순간, 거문고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지르륵.
공명판 안쪽 구석에서 무언가 굴러떨어져 잿더미 위로 떨어졌다.
옥가락지였다.
불투명한 백옥. 안쪽 면에 미세한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하진혁은 가락지를 집어 들고 달빛에 비추었다. 두 글자. '청음(靑音)'.
스승이 늘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도, 검을 휘두를 때도, 거문고를 탈 때도. 한 번도 빼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 안에.
하진혁은 가락지를 손바닥에 감췄다. 그 손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주먹 안에서 옥이 체온을 빨아들였다.
그때 발끝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잿더미 속에서 튀어나온 책 한 권. 표지는 이미 타서 형체를 잃었고 속지는 반쯤 남아 있었다. 일기장이었다. 스승의 글씨로 빼곡했던 모양이나, 불길이 먹어치운 부분은 읽을 수 없었다. 살아남은 쪽에는 '폐문 청음(閉門聽音)'이라는 구절과, 누군가와 주고받은 약속에 관한 짧은 문장만이 남아 있었다.
누구와 무엇을. 그 앞뒤는 재가 되어 있었다.
하진혁은 검보와 일기장, 거문고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허파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손가락이 스승의 옥가락지를 만지작거렸다.
복수. 그 단어는 달빛 아래서 소리 없이 무게를 더했다. 스승은 침묵 속에 분석을 마쳤고, 그는 침묵 속에 칼날을 갈기로 했다.
동트기 직전, 산길에는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하진혁은 폐허를 등지고 비탈을 내려가다 걸음을 멈췄다. 바람에 실려 온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내공이 뒤틀리며 터져 나오는 파동. 그 끝에 짐승도 사람도 아닌 비명이 섞여 있었다.
그는 품속의 검보와 옥가락지 위치를 손끝으로 확인하고 소리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쇠비름 덤불 사이로 비틀거리는 사내가 보였다. 오른손은 허공에 검초식을 그리고 왼손은 제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입가에 거품이 섞인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 사내가 휘두른 손바람에 길가 아카시아 가지가 우지끊 꺾였다. 위조 비급으로 벽을 뚫으려다 내기가 역류한 증세였다.
하진혁은 십 보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검보 속 초식을 떠올렸다. 거문고 없는 맨몸이었지만, 손바닥이 허공을 스치면 소리는 만들 수 있었다.
사내가 돌아보았다. 핏발 선 눈이 초점을 잃고 있었다. “누구냐.”
하진혁은 대답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 뒤는 절벽이었다. “거기까지다.”
사내가 달려들었다. 주화입마에 빠진 몸짓은 빠르고 무거웠다. 하진혁은 허리를 낮춰 사내의 옆을 파고들며 손바닥으로 검지를 그었다. 손끝에서 날카로운 공명이 일었다. 검기가 실린 음파가 사내의 앞섶을 찢고 가슴을 쳤다.
사내가 비틀거리며 세 걸음 물러났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젖히고 괴성을 질렀다. 내공이 터져 나오며 바위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절벽 아래 한참 만에 물소리가 들렸다.
“비급, 누구에게 받았나.”
사내가 실소를 흘렸다. “사 주었다. 비싸게.”
“어디서.”
사내의 눈동자가 한순간 초점을 찾았다. 통증이 이성을 일깨운 듯 입술이 떨렸다. “한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무릎이 꺾였다. 내상이 폐맥까지 침범한 것이다. 하진혁은 한 걸음 다가서서 손바닥으로 사내의 이마를 쳤다.
단전에 맺힌 마지막 뒤틀린 기운이 빠져나가고 사내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는 잠시 후 바위에 부딪히는 탁음 하나뿐이었다. 그마저 이내 폭포 소리에 잠겼다.
하진혁은 절벽 끝에 떨어진 천 조각을 집어 들었다. ‘한월당’이라 적힌 목패와 은자 몇 닢이 떨어졌다. 목패에는 대나무 무늬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주문 제작임을 뜻하는 각인이 찍혀 있었다.
첫 추적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목패를 품에 넣었다. 손끝에 남은 떨림은 내공 소모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사내를 찌른 순간의 감각이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가죽을 찢는 감촉과 살을 파고드는 저항, 그리고 마지막으로 맥이 풀리는 무게감. 복수의 손맛은 비계를 뜯어내는 것처럼 비린내가 났다.
그는 손을 털고 폐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녘이 조금씩 푸르게 물들고 있었다.
폐허로 돌아왔을 때 동이 트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서까래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꽂혔다. 한쪽 벽에 기대어 놓은 거문고는 천에 감긴 채 그대로였다.
하진혁은 잿더미 속에서 반쯤 타고 남은 궤짝을 열었다.
반탄 일기장은 검보 아래 포개어져 있었다. 표지가 그을렸으나 속지는 온전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장을 넘겼다.
스승의 글씨는 작고 빽빽했다. 대부분 금검술의 구결과 내공 운용의 요점을 기록한 것이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필체가 달라졌다. 더 흐트러지고 압력이 강했다.
‘비급의 진본과 위본을 비교함. 위본은 필획을 흉내 냈으나 운기 경로를 세 군데 비틀었다. 제조한 자가 단순한 모사자가 아니다. 금검술의 요해를 아는 자다.’
그다음 장에는 몇 줄 띄워 적힌 구절이 있었다.
‘금금기수에게 비급을 건넨 날, 저녁 무렵.’
하진혁의 손이 멈췄다. 금금기수(金禁忌手)라는 글자 옆에 작은 글씨 하나가 더 적혀 있었다. 곡(哭). 마치 글자를 쓰고 나서 떨리는 손끝으로 찍은 듯, 획의 끝이 갈라져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 글자를 짚었다. 스승이 비급을 무언가와 바꾸어 넘겼다는 뜻인가. 아니면 빼앗겼다는 것인가. ‘곡’은 누구의 울음인가.
일기에는 이후 열흘간 아무 기록이 없었다. 그 열흘 뒤, 청음검향은 불탔다.
그는 천천히 일기장을 닫았다. 스승의 죽음에는 분명 불이라는 단순한 재앙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위조 비급을 만든 자는 스승의 지인이거나, 적어도 금검술을 아는 자다. 그리고 금금기수라는 이름을 스승은 마지막까지 기록했다.
하진혁은 일어서서 거문고를 등에 짊어졌다. 품 안의 목패가 갈비뼈에 닿아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한월당. 그곳으로 가면 닿을 것이다. 위조 비급을 흘리는 자, 금금기수라는 이름의 주인, 그리고 스승이 울며 기록한 날의 비밀 모두에.
햇살이 완전히 폐허를 덮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산길로 들어섰다.
비탈을 내려가며 다시 한 번 일기장을 펼쳤다. 금금기수 옆, 곡 자의 획이 아침 햇살 아래 더 진하게 드러났다. 먹이 번진 자국이 아니라, 붓을 찍지 않고 여러 번 덧그은 흔적이었다.
손이 떨렸다. 손가락 마디에 힘을 주어 일기장을 접어 품에 넣는 순간, 산길 저편 바위 뒤에서 그림자가 한순간 스쳤다. 거리는 이십여 보. 사람인 듯, 바람에 흔들린 나뭇가지인 듯, 순간이어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진혁은 뒤돌아보았으나 이미 그림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바위 아래 흔들리는 풀잎 하나가 무언가가 거기에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목패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한월당.”
발걸음이 다시 산길을 박차고 내려갔다. 등에 진 거문고가 햇살에 반사되며 한 줄기 빛을 허공에 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