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검쟁명 (琴劍爭鳴)
2화
산길은 사흘째 접어들며 차츰 폭이 줄었다. 하진혁은 바위 틈 이끼를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등에 진 거문고가 낮은 진동을 냈다.
사흘 전, 반탄 일기장의 마지막 장에서 스승은 ‘폐문 청음’이라는 구절을 남겼다. 금검술 수련의 마지막 단계를 적은 듯 보였으나, 하진혁은 그 글자가 가리키는 지명을 알고 있었다. 청음검향에서 동쪽으로 사흘 길. 봄이면 눈 녹은 물이 절벽 아래로 쏟아지는 폐문 비경.
진서방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스승이 마지막으로 기록한 수련지일 뿐이다.
저녁 노을이 절벽 위 소나무 사이로 비스듬히 꽂힐 무렵, 폭포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굵은 물줄기가 바위를 때리는 소리가 계곡 전체를 흔들었다. 그 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금속성 음파가 불규칙하게 떨리며 누군가의 비명과 겹쳤다. 하진혁은 손가락으로 검자루를 두드리며 바위 그늘을 따라 폭포 앞으로 달렸다.
물보라가 안개처럼 번진 절벽 아래, 셋이 한 사람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흑의에 복면을 한 사내들. 휘두르는 장검에서는 검날을 타고 은은한 진동음이 흘러나왔다.
음공을 결합한 검법이다. 쫓기는 쪽은 여자였다. 화려한 색동옷이 흙투성이로 찢겨 있고, 어깨 보호대는 반쯤 떨어져 나갔으며, 손에는 나비 모양의 철선을 쥔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비취 비녀가 기울어 땋은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그냥 가시지, 정말.”
헛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입가에 핏줄기가 번져 있었다.
“정보를 어디까지 흘렸지.”
복면 중 하나가 검 끝을 겨누며 물었다. 음파가 검신을 타고 낮게 울렸다.
“그쪽이 먼저 말하는 게 예의 아닌가. 진서방이 여기까지 사람 풀다니, 나 참 인기 있네.”
여자는 웃었지만 숨소리가 깊지 못했다.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하진혁은 등에서 천을 벗겨냈다. 검은 옻칠의 현금이 드러나고, 왼손으로 현을 짚고 오른손 검지를 첫 번째 줄에 걸었다.
세 복면이 동시에 움직였다. 하나는 여자에게 달려들고, 나머지 둘이 좌우로 갈라져 검을 뽑으며 달려왔다. 검날에서 새된 음파가 튀었다. 하진혁이 줄을 쳤다.
낮은 음 하나가 폭포 소리를 뚫고 퍼져나갔다. 파동이 검을 든 두 복면의 발밑을 쓸었다. 바위 조각이 튀고 흙이 물결처럼 일었다.
두 사내가 걸음을 멈추며 중심을 낮췄다. 하진혁은 걸어 들어갔다. 두 번째 줄을 울리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음파가 칼날처럼 굽어져 선두의 검을 쳤다. 쇠붙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세 번째 떨림.
음파는 더 날카롭게 갈라져 여자를 노리던 복면의 등판을 때렸다. 내공이 실린 파동이 흑의를 찢으며 피를 뿜어냈다. 복면이 비틀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음공으로 음공을 받아치다니…….”
여자가 중얼거리며 바위에 기대었다. 손에서 철선이 떨어질 듯 흔들렸다. 남은 둘이 서로 눈짓을 나누고는 동시에 도주했다.
다친 복면 하나를 부축하며 폭포 뒤편 좁은 길로 사라졌다. 하진혁은 현금을 내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따라잡을 거리는 아니었다.
여자에게 다가갔다.
“움직일 수 있나.”
고개를 들었다. 갈색 눈동자가 충혈되어 있었다. 숨을 가다듬으며 입가의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덕분에 살았네요. 나는 공손려, 소리꾼 가문이에요.”
하진혁은 품에서 한월당 목패를 꺼내 보였다.
“이걸 아나.”
공손려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월당 목패. 우리 가문에서 위조 비급을 조사하던 중에 같은 걸 봤어요. 진서방 하부 조직이지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었다. 왼쪽 갈비뼈를 감싸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안을 하지요. 나는 지금 갈비뼈 쪽이 안 좋고, 당신은 정보가 필요해 보이고.”
“조건은.”
“내 부상을 치료해 주는 동안, 내가 모은 진서방 정보를 모두 공유하겠어요. 폐문 비경 안에 피신처가 있어요. 거기서 말하죠.”
하진혁은 잠시 눈을 바라보았다. 거짓은 없었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아직 갚지 않은 자의 눈빛도.
“좋다.”
등에 현금을 다시 짊어졌다. 공손려가 바위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 하진혁이 팔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다 팔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폭포 소리가 계곡에 가득했다.
노을이 절벽을 붉게 물들이고, 물보라 사이로 희미한 무지개 조각이 떠올랐다. 공손려가 폭포 옆 좁은 바위 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쪽으로. 폭포 뒤에 동굴이 있어요.”
하진혁은 팔을 부축한 채 바위 길로 접어들었다. 물보라가 두 사람의 옷을 적셨다.
폭포 소리가 평지를 덮었다. 물보라가 바람에 실려 흩어지고, 이끼 낀 바위 사이로 차가운 습기가 번졌다. 공손려는 옷깃을 여미며 숨을 고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거래를 하자는 거예요.”
하진혁은 돌아보았다.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조건.”
“진서방을 쫓고 계시죠? 저도 그래요.” 공손려는 철선을 접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정보를 나누면 서로 이득 아니겠어요?”
물안개가 두 사람 사이로 흘렀다.
“석 달째예요. 위조 비급의 유통 경로를 추적한 지. 작은 가게 셋과 중간 유통책 하나까지 찾았는데, 그때마다 한 발 먼저 정보가 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죠.”
“배신자.”
“그렇게 단정할 순 없어요. 하지만.” 손이 철선 자루를 쥐었다 놓았다. “같은 가문에서 배운 동문들 중에 의심스러운 이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특히 한 사람, 소문이 이상한 쪽으로 퍼질 때마다 그 자리에 있었죠.”
“이름.”
“말할 수 없어요. 아직 증거도 없고, 같은 스승 밑에서 자란 사람을 의심만으로 입에 올리는 건 도리가 아니죠.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하진혁은 품 안의 목패를 손끝으로 한 번 눌렀다가 손을 뺐다.
“정보 공유. 각자 가진 것을 모두 털어놓는다. 숨기는 순간 거래는 끝이다.”
공손려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동행인가요?”
“그렇다.”
“좋아요.” 철선을 허리춤에 꽂으며 옷매무새를 가볍게 정리했다. 제법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먼저 제 정보부터 꺼낼게요. 진서방 거점 중 하나로 알려진 곳, 한월당이라는 전각이 있어요. 남쪽, 낙양에서 사흘 거리. 겉으로는 필방으로 위장했고 주문 제작한 목패가 출입 증표래요.” 시선을 좁히며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아까 괴한들이 남기고 간 단서랑 겹치나 봐요. 표정이 달라졌어.”
하진혁은 품에서 목패를 꺼내 보였다. 한월당이라 음각된 글자가 물안개에 젖어 더 진하게 드러났다.
“이미 가지고 있군요.” 공손려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 목패, 누구에게서 얻은 거죠?”
“죽은 자다.”
한 박자 침묵이 흘렀다. 폭포 소리만이 그 공백을 채웠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철선을 펼쳐 부채처럼 부쳤다. 바람이 한 번, 땋은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은 내게 복수의 무게를 보여줬어요. 나는 당신에게 추적의 길을 줄게요.” 말투에서 반존대가 사라지고 무게가 실렸다. “단, 조건이 하나 있어요. 진서방 안에서 만나는 모든 문서와 흔적은 함께 확인한다. 혼자 움직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하진혁은 등에 닿는 나무의 온기를 느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좋다.”
“선선하네요?”
“네 부상 때문이다. 혼자 두고 갈 수 없다.”
공손려는 잠시 말을 잃었다. 바람이 다시 불어 물보라를 날렸다. 젖은 뺨을 닦지 않고 피식 웃었다.
“그 말, 진심이죠? 진심이면 앞으로 잘 부탁해요, 동행자.”
“출발한다. 해가 지기 전에 산길을 벗어나야 한다.”
공손려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문의 현금을 옆구리에 끼웠다. 부상 때문에 자세가 조금 기울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두 사람은 폭포를 등졌다. 산길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 가지 더. 동문에 대한 이야기, 잊지 않았어요. 정보가 샌 경로를 찾으면 그때 다시 말할게요. 지금은 다만 씨앗만 심어 둡니다.”
하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걸음이 반 박자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졌다. 산길이 시작되는 바위 곁에서 품 안의 스승 일기를 손끝으로 짚었다.
한월당 목패와 겹쳐진 두께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복수의 무게는 혼자 질 때와 둘이 질 때가 달랐다. 더 무겁고, 덜 차가웠다.
공손려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철선을 부치는 규칙적인 소리가 폭포 소리에 섞여 멀어졌다.
폭포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바위 뒤편, 이끼 낀 공터의 모닥불 앞에 공손려가 현금을 무릎에 걸친 채 앉아 있었다. 하진혁은 세 걸음 떨어진 곳에 검보 필사본을 접어 두었다.
바로 그때, 북쪽 수풀이 갈라졌다. 인기척도 없이 사내가 모닥불 반경 다섯 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은신용 망토를 두른 거구. 등에는 길이 여섯 자의 사모도가 비스듬히 얹혀 있었다. 공손려의 손이 철선으로 날아갔고, 하진혁이 일어서며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경계가 늦었군.”
명원진이 망토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불빛이 청회색 눈동자에 닿았다.
“누구냐.”
“명원진. 사형을 위조 비급에 잃은 사람이다.”
사형이라는 말에 공손려가 미세하게 숨을 들이켰다.
“거기서 더 오지 마라.”
하진혁이 반 걸음 앞으로 나섰으나 명원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모닥불 맞은편에 이르러서야 쭈그려 앉아 불을 쬐었다.
“진서방을 쫓고 있겠지. 하나씩.”
공손려가 철선으로 손목을 꺾었다.
“그걸 어찌 아시는지.”
“반나절 전, 산길에서 주화입마 시체 하나 치웠더군. 한월당 목패를 빼낸 솜씨가 아까워서 하는 말인데, 너 혼자 들어가면 반 시진 만에 주검이다.”
하진혁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보았다. 도를 쥐지 않은 왼손 손바닥에도 수년 이상 수련한 굳은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네 사형은 누구에게 당했지.”
“그게 왜 궁금하지.”
“이유를 댄 건 네 쪽이다.”
손이 검자루에서 떨어졌다. 명원진은 잠시 침묵했다.
“위백도. 도문의 장문인이다. 삼 년 전, 위조 비급을 진본인 줄 알고 수련했다가 사경을 헤맸어. 회복된 뒤 직접 추적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했고.”
공손려가 고개를 들었다.
“위백도…… 단봉산 아래 그 문파 말인가요.”
“이제 없다. 그때부터 진서방을 쫓았다. 너희보다 오래 됐다.”
“증거는.”
명원진은 품속에서 비급 조각 하나를 꺼내 불빛 아래 던졌다. 하진혁이 집어 들었다. 열에 일곱은 맞고 셋은 반대로 써 있었다. 앞서 산길에서 목격한 위조 비급의 패턴과 같았다. 조각을 자신의 품에 넣었다.
“정보를 내놔라.”
“동맹을 받아들이는 거냐.”
“정보를 보고 판단한다.”
명원진이 피식 웃으며 불길에 손을 비볐다.
“한월당은 진서방의 아래 거점이다. 겉으로는 악기와 악보를 거래하는 상단인데 후원 지하에 별채가 하나 더 있어. 진짜 거래는 그쪽에서 이뤄진다. 당주는 장우란. 겉보기엔 점잖은 늙은이지만 손끝에서 최소 사 년 이상의 음공이 묻어나더군.”
설명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내부 구조까지 꿰고 있는 말투가 귀에 걸렸다.
“언제 봤지.”
“보름 전. 거래 상대로 가장하고 안마당까지 들여다보고 나왔다. 하루 더 기다렸다가 새벽에 갈 거면 나도 가겠다.”
공손려가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정보가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필요 없다.”
말을 끊고 명원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따라와도 좋다. 한 가지. 거짓말이 들키면 그 자리에서 내가 널 친다.”
명원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미있군. 그럼 합의다. 새벽에 움직인다.”
사모도의 손잡이를 한 번 두드리며 일어서서 공손려를 향해 턱짓했다.
“그쪽, 부상이 덜 나았으면 한월당 앞에선 뒤에 빠져 있어.”
“참견은…….”
“조언이다.”
명원진은 말을 자르고 바위 아래 어둠 쪽으로 걸어가 은신용 망토를 다시 뒤집어썼다. 감시자처럼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 시선을 두고 몸을 기댔다.
하진혁은 검보 필사본을 천 안쪽 깊숙이 밀어 넣고, 반탄 일기장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손끝으로 글자를 더듬었다. 스승의 죽음을 추적하는 길에 낯선 복수자가 끼어들었다. 일기장을 품 안의 목패와 함께 포개어 넣으며 겉옷을 여미는 손길에 힘을 주었다.
공손려가 현금 줄 위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 한월당 별채 구조를 너무 정확하게 알던데. 그런 생각 안 들어요?”
하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마당까지 들여다봤다.’ 보름 전 거래 상대로 가장했다면 바깥채에서 만났어야 한다. 그런데 안마당 구조를 읊은 것은 드나들어 본 자의 말투였다. 검을 팔 옆에 두고 등을 바위에 기댔다. 눈을 감지 않고 어둠 너머 명원진의 방향을 향해 의식을 열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