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금검쟁명 (琴劍爭鳴)

3화

모닥불이 잦아들고 있었다. 명원진이 바위 아래 어둠에서 걸어나왔다. 은신용 망토를 접어 팔에 걸친 모습이었다. 불빛이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 닿자 공손려가 철선을 접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좀 전에 한 말, 빈말이 아니야.”

명원진이 모닥불 앞에 멈춰 섰다. 사모도가 등에서 무게를 실어 바위 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진서방을 칠 거면 혼자보다 셋이 낫다.”

하진혁은 등을 바위에 기댄 채 팔짱을 풀지 않았다.

“정보는.”

“한월당 말고 또 있다. 낙양 쪽 중간 유통책 하나와 진서방 본거지로 통하는 길목이다.”

공손려가 끼어들었다.

“본거지라뇨? 제가 석 달째 쫓아도 찾지 못한 곳인데, 그걸 어떻게.”

명원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네 놈이 못 찾은 거랑 내가 찾은 거랑 무슨 상관이지.”

공손려가 눈을 가늘게 떴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하진혁은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보이며 말을 막고 명원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대가.”

“대가 받으러 온 거 아니야.”

명원진이 사모도 손잡이를 한 번 두드렸다. 쇠붙이 울림이 짧게 번졌다.

“내 사형은 위백도. 사천 검문의 장문인이 될 사람이었다. 위조 비급 하나에 주화입마로 죽었다. 복수 말고 무슨 대가가 필요하냐.”

공손려의 손이 현금 줄 위에서 멈췄다.

“위백도…… 십 년 전 칠성검법으로 관서를 평정했다는 그 검객이, 위조 비급에?”

“그 검객 맞다면 믿을 거냐.”

명원진의 말투가 차가워졌다. 살기가 목소리 끝에 실려 모닥불이 한 차례 흔들렸다.

하진혁은 묵묵히 그의 손을 보았다. 사모도를 쥐는 손아귀가 힘을 줬다 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분노를 삭이는 호흡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자의 손이 아니다.

“좋다.”

하진혁이 말했다.

“한 가지. 거짓말이 들키면 내가 널 친다. 아까 말했고, 지금도 같다.”

“재미있군.”

명원진이 턱을 당기며 불빛을 등졌다.

“그럼 우선 네 놈이 가진 정보부터 까봐라. 이쪽도 아까운 걸 내놔야 할 테니까.”

공손려가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보며 철선을 폈다 접었다 했다.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어요.”

“해 봐.”

“한월당 안에 들어가 보셨다고 했죠. 보름 전에.”

“그렇다.”

“후원 별채로 통하는 문이 어디쯤 있던가요.”

명원진이 공손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 박자 느리게 대답이 돌아왔다.

“정원 가운데 회랑 지나서 오른쪽. 석등 뒤에 감춰둔 철문이다. 왜, 못 믿겠나.”

공손려는 대답하지 않고 현금 줄을 손가락으로 한 가닥 튕겼다. 낮은 음이 울렸다. 그녀가 그 음의 잔향을 듣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 더. ‘뒤집힌 악보’란 말, 들어보셨어요.”

불빛이 일렁였다. 하진혁의 손가락이 검집 위로 미끄러졌다. 그 말을 그는 일기장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익숙했다. 스승이 입에 올린 적이 있다.

명원진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위조 비급 검수를 맡은 놈들이 쓰는 은어지. 진짜 비급을 거꾸로 베끼는 방식에서 나온 말이다.”

공손려가 숨을 들이켰다.

“그걸 어떻게.”

“네가 먼저 물었잖아.”

명원진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팔짱을 끼며 하진혁에게 돌아섰다.

“한월당에서 빠져나온 필사본 하나에 그 표식이 찍혀 있었다. 진서방 놈들이 감쪽같이 지우려 한 흔적인데, 놓칠 리 있나.”

하진혁은 눈을 감았다 떴다. ‘뒤집힌 악보.’ 맞다. 스승이 검보를 가르치던 날, 덧없이 흘린 말이었다. ‘악보가 뒤집히면 음이 어긋난다. 진서방 놈들은 그 어긋남을 장사로 삼는구나.’

그 순간이 하진혁의 뇌리를 스쳤다. 스승의 목소리와 지금 명원진의 목소리는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스승의 목소리에는 비탄이 실려 있었고, 명원진의 목소리에는 능숙함이 배어 있었다. 너무 능숙했다.

“별채 청사진이라도 손에 넣은 모양이군.”

하진혁이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무슨.”

“아니다.”

그가 명원진의 말을 잘랐다.

“계속해.”

명원진이 잠시 하진혁을 노려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한월당 당주는 장우란. 최소 사 년 이상 음공을 수련한 자다. 귀를 무기로 쓰는 타입이니까, 접근할 때 발소리 죽이는 건 기본이고 숨소리도 조절해야 해.”

“대비할 무공은.”

“금검술만 있으면 반은 간다. 폭포 소리 비슷한 음역을 치면 녀석의 청력이 무뎌져.”

하진혁은 거문고 천 쪽을 내려다보았다. 폭포 소리와 현금의 공명. 폐문 비경에서 구사했던 방식과 일치했다. 그걸 명원진이 보고서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경로로 아는 건지.

“너, 금검술에 대해 알고 있었군.”

“위조 비급에 당한 놈치고 금검술 모르는 놈이 어딨나.”

명원진이 코웃음 쳤다.

“사문을 불태운 게 진서방이고, 진서방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그 무공이다. 모를 리 없지.”

공손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상당한 왼쪽 어깨가 굳어져 있음이 동작에서 드러났다.

“새벽에 출발한다고 했죠.”

“그래.”

“그 전에 제게 약도를 그려 주셔야겠어요. 후원 별채까지 가는 길, 지금 말한 석등 철문 말고도 통로가 더 있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 수다기가 사라졌다. 진지한 말투였다. 명원진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좋아. 대신 네 녀석이 가진 진서방 첩보도 전부 꺼내라. 거래다.”

공손려가 한 걸음 다가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혁은 겉옷을 여미며 일어섰다. 거문고를 등에 짊어지고 모닥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쪽으로 등을 돌렸다. 명원진이 지금껏 흘린 말들이 하나씩 머릿속에서 정렬됐다.

‘뒤집힌 악보’라는 은어. 한월당 별채 구조. 장우란의 음공 수련 연수. 금검술의 파훼법까지.

그가 보름 전 거래 상대로 가장해 안마당까지 들여다봤다면, 아는 것이 지나치게 상세했다. 저것은 단순 잠입이 아니다. 드나들며 익힌 자의 지식이다.

그래도 지금 추궁하진 않는다. 셋이 함께 가야 한월당 문턱을 넘는다. 문턱을 넘으면 그 안에서 움직이는 자가 누군지 저절로 드러난다.

“새벽까지 시간이 많지 않다.”

하진혁이 어깨 너머로 말했다.

“쉴 거면 자. 나는 경계 선다.”

그가 검을 팔에 끼고 바위 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이끼 낀 돌 위에서 작게 부서졌다.

“하진혁 씨.”

공손려가 뒤에서 불렀다.

“고마워요.”

하진혁은 대답하지 않고 인적 없는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등에는 거문고, 손에는 검. 품 안에는 스승의 일기와 한월당 목패가 함께 접혀 있었다. 새벽이 오면 이 모든 것을 펼칠 무대가, 한월당 지하 별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손려의 발견이 이어지는 찰나, 하진혁의 시선은 비급에서 공손려의 흔들리는 동공으로 옮겨갔다. 첫 장면의 의심과 결심이 이동 시간 속에서 구체적 단서로 변환되는 순간이었다. 반나절 거리를 오는 동안 품 안의 일기와 목패가 무겁게 느껴졌고, 이제 공손려의 손끝에서 밝혀지는 비급의 비밀은 단순한 함정 이상의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한월당의 그림자가 예상보다 깊고 교묘하게 드리워져 있음을, 셋은 각자의 자리에서 동시에 직감했다.

사흘째 오후, 주점은 한월당에서 반나절 거리였다.

먼지 낀 장지문 너머로 마방의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공손려는 탁자 위에 위조 비급 사본을 펼치고 손가락으로 행간을 짚으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녀의 철선이 탁자 모서리에 반쯤 펼쳐진 채 놓여 있었고, 현금은 등 뒤 의자에 걸쳐져 있었다.

“운기 순서가 보통이 아니에요.”

공손려의 손가락이 한 글자 위에서 멈췄다. 눈썹 사이 주름이 깊어졌다.

“세 번째 단락. 여기서부터 혈로가 거꾸로 꼬여요. 단전에서 시작해야 할 기를 옥침으로 먼저 올리라고 적었는데…… 이건 운기를 가르치는 글이 아니에요. 연주법이에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음률로 경락을 찢는 구조예요. 이 구결대로 수련하면 나흘 안에 고막부터 망가져요. 그리고…….”

말끝을 흐렸다. 손가락이 비급의 마지막 구절을 가렸다.

“그리고?”

하진혁이 물었다. 공손려는 비급을 덮으려다 멈칫했다.

“이 음률 패턴…… 공손가의 기초 심법에서 파생된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반존대가 사라졌다.

“누군가 우리 가문의 악보를 뜯어고쳐서 이런 걸 만들었어요. 예술의 탈을 쓴 파괴 충동이에요. 아름다워야 할 소리가 사람을 죽이는 구조로 뒤바뀌었어요.”

철선을 집어 손에 쥐는 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부채를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했다.

“공손가 사람이 관련됐다는 뜻인가.”

명원진이 구석 자리에서 끼어들었다. 사모도를 무릎에 걸친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평소처럼 냉소적이었지만, 손가락이 칼자루를 두드리는 간격이 평소보다 빨랐다.

공손려는 대답하지 않았다. 철선을 탁탁 접어 탁자 위에 내려놓고, 찻잔을 집어 입가에 대기만 했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음률이 뒤틀렸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짧게 잘라 말한 그녀의 어투는 단호했다. 비급을 밀어 하진혁 쪽으로 보내며 손을 거두었다. 더는 만지고 싶지 않다는 손짓이었다.

하진혁은 비급을 받아 들고 세 번째 단락을 읽었다. 구결의 앞부분은 정상이었다. 중간부터 옥침으로 기를 올리라는 대목에서 멈췄다.

스승의 일기에서 본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금금기수. 기의 흐름을 거꾸로 비트는 기술. 스승은 그 이름 옆에 ‘곡’이라 적었다.

“금기와 연결돼 있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공손려가 고개를 들었다.

“금기요?”

“스승이 일기에 남긴 이름이다. 금금기수. 기를 다루는 것을 금기처럼 다루는 자. 그리고 그 옆에 스승은 울 곡 자를 써 넣었다.”

명원진의 사모도 손잡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멎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으나 턱 근육이 미세하게 경직됐다.

“흥미롭군. 그 금금기수란 자가 네 스승에게 비급을 건넨 셈인가.”

“아직 모른다.”

하진혁은 비급을 접어 품 안의 일기장 곁으로 밀어 넣었다. 공손려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이내 굳게 다물렸다. 그녀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깨진 차잎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마방 주인의 고함이 들렸다. 말에 물을 먹이라는 소리였다.

주점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 공손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현금을 등에 짊어졌다.

“길을 서두르죠. 해 떨어지기 전에 한월당 앞 마을까지는 가야 하니까.”

명원진이 먼저 문을 나섰다. 사모도의 자루가 문틀에 부딪혀 짧은 목탁 소리를 냈다.

석양이 산등성이를 넘기 시작하는 길목이었다. 소나무 그늘 밑에서 하진혁이 걸음을 멈추고 개울 쪽을 가리켰다.

“물을 채우고 오겠다.”

수통을 품에서 꺼내 들고 비탈을 내려갔다. 계곡 바람이 스치는 소리 사이로 명원진의 발걸음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바위 뒤로 몸을 숙이고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부싯돌을 치는 소리. 불꽃이 튀고, 이내 실낱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종이가 타들어 갔다.

하진혁은 웅덩이에 수통을 담그며 시선만 옆으로 돌렸다. 연기가 가늘게 솟다 사라졌다. 물속에서 흔들리던 잿조각 하나가 미처 타지 않은 채 개울물에 떨어져 빙글 돌았다.

종이의 가장자리였다. 가장자리만 태워 보내고, 가운데는 따로 접어 품에 넣는 손놀림이 보였다.

그리고 잿조각에서 났다. 불에 탈 때는 향처럼 퍼지다, 물에 닿자 검푸른 빛으로 변하는 연기. 보통 먹에서는 나지 않는 색이었다. 위조 비급을 분석할 때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자 종이가 뿜어낸 것과 같은 색.

진서방에서만 쓴다는 특제 먹이었다.

명원진이 몸을 일으켰다. 하진혁은 수통을 물속에서 천천히 들어 올렸다. 마개를 닫으며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못 본 얼굴로.

개울을 건너오는 그의 발끝이 흙을 밟는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조용했다.

석양이 산등성이를 넘기 시작하는 길목이었다. 소나무 그늘 밑에서 하진혁이 걸음을 멈추고 개울 쪽을 가리켰다.

“물을 채우고 오겠다.”

수통을 품에서 꺼내 들고 비탈을 내려갔다.
금검쟁명 (琴劍爭鳴)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