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검쟁명 (琴劍爭鳴)
4화
개울에서 돌아온 하진혁의 발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 바위에 걸터앉은 공손려가 고개를 들었다.
“물은…….”
“채웠다.”
하진혁은 명원진의 등 뒤로 시선을 흘렸다. 명원진은 이미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한월당은 마을 끝 버드나무 숲 너머에 있었다. 대문 앞 화단의 흙은 최근 파헤친 자국이 선명했고, 하진혁이 발끝로 차 보자 겉흙 아래 굵은 철제 경첩이 드러났다. 명원진이 담장 서쪽 모서리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안마당 우물에서 서쪽으로 일곱 걸음, 뒤뜰로 통하는 샛문이다.”
공손려가 철선을 반쯤 펴며 속삭였다.
“보름 전에 본 걸 아직도 그렇게 정확히 기억하시나.”
“머리가 나빠서 오래 살았겠나.”
명원진이 품에서 꺼낸 쇠막대로 걸쇠를 들어 올리자 샛문이 순식간에 열렸다. 손놀림이 검객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능숙했다. 하진혁은 그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본채 후문에 들어서자 인기척은 없었다. 선반 위에는 악기 대신 빈 상자만 포개져 있었고, 공손려가 철선 끝으로 상자 하나를 밀어 열었으나 안은 비어 있었다.
“치우고 떠난 건가.”
“아니.”
하진혁이 바닥을 가리켰다. 좁쌀을 뿌린 듯한 운모 가루가 복도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은한 빛이 번쩍였다. 명원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물러서.”
운모 가루가 일제히 빛을 뿜으며 바닥 전체의 원형 진법이 붉게 타올랐다. 내공이 순식간에 교란되었다. 단전에서 막 운기한 기운이 팔다리로 퍼지지 못하고 뒤엉켰다. 마치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한 압박이 온몸을 짓눌렀다.
천장에서 쇠붙이들이 쏟아졌다. 어깨 너비만 한 원형 칼날이 사슬에 매달려 회전하며 세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공손려가 철선을 펼쳐 첫 번째 칼날을 쳐 올렸으나 오른팔이 떨렸다.
“검기로는 안 됩니다. 진법이 내공을 흩어 놔요.”
하진혁은 등 뒤의 악기를 풀어 옆구리에 끼고 손가락을 줄 위에 얹었다. 내공은 교란되어도 현은 울렸다. 그가 일곱째 줄을 튕기자 음파가 바닥을 타고 퍼졌다. 접근하던 칼날 두 개가 허공에서 부딪혀 방향을 틀었고, 쇠사슬이 꼬이며 천장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명원진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운모 가루를 쓸어 내며 진법의 배열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여섯 겹. 거미줄 형상이다.”
공손려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어떻게 아시는…….”
“닥쳐.”
명원진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표식을 그렸다. 둘째 손가락을 세 번 굽혔다 펴고, 주먹을 쥐었다가 새끼손가락만 세웠다. 동작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었다.
“제어 기둥이 세 곳이다. 네 발 앞에서 오른쪽으로 한 걸음, 문지방 밑, 그리고 계수나무 화분 받침대 뒷벽.”
하진혁은 묻지 않았다. 악기를 가로로 뉘고 손가락이 줄을 긁듯이 쓸었다. 현음이 칼날처럼 날아가 첫 번째 기둥을 후려쳐 복도 바닥의 석판을 솟구쳤다.
두 번째 음파는 문지방에 박혀 나무를 파열시켰고, 세 번째 음파가 벽에 닿자 화분과 받침대가 산산조각 났다. 진법의 붉은 빛이 번쩍이고 꺼졌다. 천장의 쇠사슬이 모두 힘없이 늘어졌고, 내공을 옥죄던 압박도 풀렸다.
공손려가 벽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명원진은 무릎의 먼지를 털며 일어나 사모도를 다시 등에 바로 했다.
서걱.
하진혁이 검을 뽑아 명원진의 목을 겨누었다. 칼끝이 움직이지 않았다. 진법 해제 직후에도 그의 오른손은 전혀 떨리지 않았다.
“어째서 네가 진서방의 포위망을 이토록 잘 아는가.”
명원진은 피하지 않았다. 청회색 눈에 칼날이 비쳤다.
“살아서 나가면 설명하지.”
“지금 말해.”
“지금은 아니다.”
명원진의 입술이 비틀렸지만, 무언가를 삼키는 듯한 근육의 경련일 뿐 미소는 아니었다.
공손려가 둘 사이로 다가서려다 멈추었다. 그녀는 맨손으로 검을 막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복도 저편에서 가죽 장화가 돌바닥을 밟는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한 무리. 적어도 일곱, 여덟은 되었다.
“뒤뜰 샛문도 발소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철선을 완전히 접고 대신 악기의 줄을 살며시 짚었다.
“안팎에서 동시에 접근 중입니다. 포위예요.”
복도는 어두웠다. 벽을 따라 달리던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뒤에서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바짝 다가왔다.
공손려가 앞장서서 달리며 외쳤다. “왼쪽이에요!”
하진혁은 거문고를 왼팔로 감싸 쥐고 오른손으로 검을 뽑았다. 명원진은 사모도를 비스듬히 짚으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셋이 한꺼번에 달려나간 곳은 돌계단이었다. 계단 끝에서 물소리가 쏟아졌다.
절벽이었다. 동트기 직전의 하늘은 아직 어둡고, 폭포는 칠흑 속에서 흰 줄기만 번들거렸다. 안개처럼 퍼지는 물보라가 옷깃에 달라붙었다. 뒤에서 복도의 문이 박살 나며 복면을 쓴 조직원 열한 명이 활과 검을 섞어 들고 쏟아져 나왔다.
공손려가 현금을 바위 위에 올리며 외쳤다. “시간을 벌 테니, 폭포 쪽으로!”
철선을 펼치자 쇠부채 살 사이로 높은 음이 울렸다. 그녀가 손목을 틀자 음파가 허공에서 굴절하며 선두 조직원의 검을 쳐내 두 명이 중심을 잃었다.
“지금이야!”
명원진은 대꾸도 없이 사모도를 휘둘러 검풍을 원형으로 퍼뜨리며 조직원들의 발을 묶었다. 하진혁은 바위 뒤로 물러서며 현을 품에 안듯이 내렸다. 손가락을 얹자 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일곱 현을 한 번에 훑었다. 음파가 검기로 바뀌었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선두의 조직원 셋이 허리를 꺾었다. 소리의 흐름이 허공에 길을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검의 궤적이 그어지는 금검술이었다.
조직원들이 흩어지며 활을 당겼다. 화살 세 발이 동시에 날아왔다.
“피해!”
하진혁이 몸을 비틀며 줄 하나를 단발로 튕기자, 촘촘하게 압축된 음파가 화살을 허공에서 부러뜨렸다. 파편이 물보라에 섞여 흩어졌다.
공손려가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조직원 하나가 뒤에서 쇠사슬을 휘둘러 그녀의 어깨를 쳤다. 철선이 날아가 바위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명원진이 그 조직원의 등을 사모도로 찍자 숨통 막힌 짧은 비명이 났다.
“감상은 나중에.”
명원진이 조직원을 걷어차며 사슬을 밟았다.
그 순간 폭포 소리가 커졌다. 바위가 울리며 절벽 전체가 하나의 악기처럼 진동했다. 하진혁의 손끝에 걸린 현이 혼자 울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힘이 줄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폭포 소리가 금검술의 음률과 맞닿았다. 내공의 흐름이 뒤집혔다.
단전이 끓어오르고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경락이 부풀었다. 하진혁은 숨을 참고 거문고를 바위에 내려놓은 뒤 열 손가락을 풀어헤치듯 모든 현을 긁었다.
열 개 음이 동시에 폭발했다. 검기가 아닌 음파가 벼랑 전체를 덮었고, 그 속에서 투명한 검날 수십 자루가 동시에 뻗어나갔다. 수련장에서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광역 초식이었다. 조직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일곱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꺾고, 둘은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하진혁의 귀에서 고막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손끝 감각이 사라졌다. 악기 현 한 가닥에서 희미한 빛이 떠올라 ‘곡(哭)’ 자 비슷한 획을 그렸다가 번개처럼 꺼졌다. 핏물이 손등을 타고 떨어졌다. 하진혁은 바위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팔로 거문고를 감싸 쥐었다.
공손려가 달려왔다. “손을 봐요. 검기가 역류한 것 같아요.”
철선을 주워 품에 꽂으며 하진혁의 손목을 잡았다. 떨림이 심했다.
“이 정도면 뼈에 금이…”
“괜찮다.”
그때 벼랑 아래 쓰러진 조직원들 사이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왼팔이 부러져 축 늘어지고 오른손으로 바위를 더듬는 자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찢어진 복면 사이로 드러난 턱과 물기에 젖은 흰 머리카락, 그러나 눈에는 살기가 남아 있었다.
명원진이 다가가 사모도 끝을 노인의 목 앞에 세웠다.
“말해. 한월당 지하 문서는 어디 있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사모도에 비친 그의 눈이 명원진을 훑으며 살기 아닌, 뭔가를 알아본 반응으로 바뀌었다.
“네, 네놈은.”
공손려는 이 순간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하진혁은 열 걸음 떨어진 바위 아래서 손목을 움켜쥐고, 귀에는 아직 폭포 소리가 날카로운 잡음으로 맴돌아 노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행동대장…”
말이 시작되기 무섭게 명원진의 왼손이 노인의 턱을 쳤다. 정권 하나로 턱뼈가 어긋나며 말은 거기서 끊겼다. 노인은 조용히 옆으로 쓰러졌다. 공손려가 철선을 손에서 굴렸다. 접었다 폈다, 세 번.
“무슨 말을 하려던 거죠.”
“미친 놈 헛소리.”
명원진은 사모도를 등에 꽂으며 노인의 소매를 발로 찢었다. 찢긴 천 사이로 종이 조각이 드러났다.
“이건…”
공손려가 한 걸음 다가서서 종이를 집었다. 가장자리는 불에 탔고 가운데 글자가 남아 있었다.
“낙성장.”
그녀가 글자를 읽었다. 찍힌 인장도 보였다. 파도처럼 구불거리는 선 안에 상하가 뒤집힌 악보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위조 비급에 찍힌 것과 같아요. 귀곡자의 인장이에요.”
공손려가 종이를 들어 하진혁에게 보였다. 하진혁은 떨리는 손을 억지로 들어 물보라에 젖어 검푸르게 번진 종이 가장자리를 만졌다.
“기억해 둬라.”
그가 손을 내렸다.
“확실히 새겨 두라고.”
공손려는 말없이 문서 조각을 접어 소매에 넣었다. 그녀는 명원진을 향해 손을 내밀지 않았다. 돌계단 너머로 살아남은 조직원들이 달아나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동이 트기 시작하며 폭포 꼭대기에 첫 햇살이 닿았다.
임시 숙소는 마을 외곽 대나무 숲 안이었다. 한월당에서 한 시진쯤 떨어진 작은 폐가로, 명원진은 별채 헛간으로, 하진혁과 공손려는 본채 방으로 들어갔다. 밤이었다. 탁자 위에 호롱불이 켜져 있고, 공손려는 식은 찻잔을 하진혁 앞에 밀어 두었다.
하진혁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앉아 있었다. 손끝 떨림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 손으로 거문고를 무릎 앞에 가로로 눕히고 현 한 가닥을 더듬었다.
공손려가 말했다. “제 눈에도 그 글자가 보였어요. 곡(哭). 맞죠?”
하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서 스승의 일기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불에 탄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넘겨 마지막 장을 펼치자, 거기에는 흐릿한 글씨로 ‘금기에 손을 댄 자가 있으니, 곧 나의 사제─’라고 쓰여 있었다. 하백운의 필체였다. 그 아래는 불타 없어져 읽을 수 없었다.
하진혁이 일기의 빈 여백을 가리켰다. 곡 자가 따로 적혀 있었는데, 오늘 새벽 악기의 현에서 번쩍인 글자와 같은 획의 기울기였다.
“스승님의 사제.”
공손려가 무릎을 세워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분께 사제분이 계셨어요?”
“들은 적 없다. 하지만 사문의 금기라면 사제만이 알 수 있는 게 있다. 선대의 비전이든, 금검술의 이면이든.”
공손려가 소매에서 문서 조각을 꺼내 펼쳤다. “이 인장을 찍은 사람이 선생님의 사제, 귀곡자라면… 낙성장은 그가 일부러 남긴 길일 수도 있어요.”
“함정이다.”
“그래도 가야 한다는 말씀이죠.”
하진혁은 대답하지 않고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식은 차를 한 모금 삼켰다.
“함정인 걸 알면서도.”
공손려가 문서 조각과 위조 비급 사본을 나란히 펼쳐 인장과 종이의 질감, 먹의 번짐을 교차해 살폈다.
“낙성장은 북쪽으로 닷새 거리예요. 과거 폐문한 악공방 터라 강호의 큰 길목과 떨어져 있고 숨기엔 더할 나위 없죠. 하지만 피해가 너무 컸으니 사흘은 쉬어야…”
“이틀이면 된다.”
하진혁이 말을 끊었다.
“사흘을 기다릴 시간이 없어.”
공손려는 더 말하지 않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별채 헛간에는 불도 켜지 않았다. 명원진은 어둠 속에 사모도를 벽에 기대고 짚더미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노인이 내뱉으려던 말.
행동대장. 일 년 반 전까지 자신을 부르던 호칭이었다. 진서방의 북부 행동대장으로, 조직이 직접 수련생을 관리하고 위조 비급을 유통하던 핵심 간부.
사형을 그 손으로 죽게 한 뒤에야 자신이 나르던 위조 비급이 사문을 집어삼킨 걸 알았다. 그 뒤로 조직에서 도망쳐 나와 홀로 추적해 왔다.
오늘 노인은 죽지 않았다. 턱뼈만 어긋났을 뿐이다. 한월당이 무너진 이상 누군가는 그를 데려가 치료할 것이고, 입이 열리면 공손려의 귀가 아니라 하진혁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내일 아침이 마지막이다. 떠나기 전에 말해야 한다.
명원진은 사모도를 쥐고 헛간 문을 밀쳤다. 대나무 숲 사이 오솔길을 걸어 본채 쪽으로 향했다. 한 걸음 떼기 전에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가슴털이 푸른빛을 띠고 등에 진서방 전서구의 가죽 띠를 두른 비둘기가 담장 위에 앉아 있었다. 다리에는 종이쪽이 묶여 있었다.
본채에서 하진혁이 걸어나왔다. 전서구를 본 순간 거문고를 짊어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뒤따라 공손려도 나와 비둘기의 종이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낙성장에서 기다리겠다. 진실을 아는 자를 데려오라.”
접힌 종이 안쪽에는 구불거리는 파도 선과 뒤집힌 악보 문양이 찍혀 있었다. 명원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하진혁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떨리던 손끝은 멎어 있었다. 검을 뽑지는 않았으나 양손이 옆구리에 붙어 있었다.
“할 말이 있나.”
공손려는 종이를 쥔 채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보았다. 비둘기가 날아올라 동트기 전의 어둠 속으로 파닥이는 소리만 남기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