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검쟁명 (琴劍爭鳴)
5화
전서구가 날아오른 어둠 속에서, 하진혁이 검을 뽑았다.
칼날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적막을 찢었다. 그가 걸쳐 입은 검은 무복의 소맷자락이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에서 스스로 펄럭였다. 칼끝이 명원진의 목을 겨누었다.
어둠 속에서도 푸르스름한 달빛을 삼킨 쇠가 싸늘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손끝은 떨리지 않았다. 한월당에서 진법을 깨부수고도 남은 힘이 손목에 실려 있었다.
공손려가 숨을 삼켰다. 바위산 밑, 발밑의 고사리 잎이 그녀의 몸짓에 스친 바람에 떨렸다.
“네 무공.”
하진혁의 검 끝이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원한이라도 매만지듯, 바람의 결을 타고 검날이 낮게 울었다. 밤공기가 쇠에 부딪혀 가느다란 소리를 냈다.
“한월당 지하 진법을 보기도 전에 수신호로 해제점을 찍었다. 네 무공에는 위조 비급의 운기 궤적이 섞여 있다. 말해라.”
그의 음성은 조용했지만, 마디마디가 날이 서 있었다. 공손려는 그 말의 무게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반 발짝 뒷걸음쳤다. 등줄기에 차가운 땀이 배어 나왔다.
명원진은 뒷걸음치지 않았다. 사모도를 등에 멘 채 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청회색 눈동자가 칼날에 비쳤다.
달빛이 거기에 닿아 흔들렸다. 그 눈빛은 공포도, 당혹도 아니었다. 오래된 죄를 마주하는 자의, 어쩌면 차라리 안도에 가까운 담담함이었다.
“네놈이 행동대장이냐.”
하진혁의 목소리는 낮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검자루의 무명실이 손바닥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가 내뿜는 살기(殺氣)가 서릿발처럼 공기를 갈랐다.
“그래.”
명원진의 대답은 한 마디였다. 그 짧은 음절이 공손려의 가슴속으로 날아와 박혔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가 반 걸음 앞으로 나서며 철선을 쥔 손을 올렸다.
“잠깐만요. 지금 뭐라고….”
철선이 바람에 부딪혀 미세하게 찰랑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자기 귀에도 낯설었다. 믿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 사람은 먼저 부정부터 한다. 그녀가 그랬다.
“물러서.”
하진혁이 시선을 옮기지 않고 말했다. 공손려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검 끝이 담겼다가 명원진의 얼굴로 옮겨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겨우 다섯 걸음. 그 짧은 틈에 쌓인 시간은 아득했다.
“아니요.”
공손려가 두 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어깨가 스치고 발밑에 작은 돌멩이들이 굴렀다. 철선을 접어 허리춤에 꽂고 맨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검날을 감쌌다. 뼈가 드러나도록 앙상한 칼날 위로, 살아 있는 온기가 올라탔다.
“그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예요.”
검날이 손바닥을 베었다. 처음에는 얇은 선처럼, 이내 굵은 핏줄기로 번졌다. 피가 하진혁의 검을 타고 흘러 바위에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돌 위에 퍼지는 핏방울의 무늬가 달빛 아래 짙은 보랏빛으로 젖어 들었다. 하진혁의 눈이 그 핏방울을 좇았다.
검 위로 흐르는 붉은 물길을 그는 잠시 멍하니 응시했다. 공손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그 떨림이 칼날을 타고 전해져 왔다.
“비켜라.”
“비키지 않을게요.”
공손려의 목소리가 떨렸다. 입술이 파르르 경련하고 눈가가 붉어졌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가자 피가 빨라졌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둘 다 제게는… 그런데 이대로면 안 돼요. 우리 다 같이 왔잖아요.”
그녀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아직 알 수 없는 진실과, 막 무릎을 꿇으려는 사람과, 칼날을 거두지 않는 사람이 모두 제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 그게 이토록 아플 일인지 처음 알았다.
“같이?”
하진혁의 입술이 비틀렸다. 검 끝이 밀리지 않았다. 한 치가 아니라 반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손등에 검푸른 핏줄이 돋았다.
“진서방 행동대장과 같이 가자고? 우리 사문을 멸문으로 몰아넣은 위조 비급을 나르던 자와.”
낱말 하나하나가 이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공손려의 손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려 그의 손목까지 적셨다. 따스한 피가 식기도 전에 밤바람에 식어 끈적하게 굳어 갔다.
명원진이 고개를 들었다. 검을 겨눈 자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으며,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아가씨.”
공손려가 뒤를 돌아봤다. 명원진은 그녀에게 고개를 저었다. 입꼬리에 걸린 비릿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언제나 한 꺼풀 너머를 감추는 듯하던 얼굴에서 그 껍질이 벗겨졌다. 그 아래엔 오직 사죄와 단념뿐이었다.
“비키시오.”
평소와 다른 말투였다. 낮고 무거웠다. 공손려의 손이 검날에서 미끄러졌다.
피가 손목을 타고 소매 속으로 스며들었다. 차갑고 묵직한 액체가 팔 안쪽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그녀를 현실로 붙잡았다.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며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명원진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육중한 체구가 바위 바닥에 닿자 작은 돌들이 굴러 떨어졌다. 무릎이 닿은 자리에 미세한 금이 갔다. 사모도가 등에서 기울어 땅에 닿았다.
그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자신의 왼쪽 가슴께를 겨누었다. 칼끝이 달빛을 받아 눈을 찔렀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일 년 반.”
명원진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바싹 마른 목울대를 억지로 울리는 소리였다.
“내가 진서방 북부 행동대장이었다. 위조 비급을 만들고 유통하는 놈들 중에서도, 직접 수련생을 관리하고 문파에 침투시키는 일을 맡았다.”
검을 쥔 하진혁의 손목에 힘줄이 불거졌다. 칼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분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쇠의 신음이었다.
“사형은.”
“죽었다.”
명원진은 하진혁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 한 방울의 거짓도 어른거리지 않았다.
“내가 나른 위조 비급 때문에 죽었다. 행동대장 시절, 진서방의 모든 내부 문서와 비급 샘플을 관리하는 게 내 임무였다. 그중 하나가 사문으로 흘러 들어갔는지도 몰랐다. 사형이 주화입마로 죽은 뒤에야 알았다.”
그의 목소리가 중간에 갈라졌다. 손가락 마디가 더 세게 단도를 움켜쥐었다. 붉은 흉터가 손등 위로 번진 듯했다.
“그 뒤로 도망쳐 나와 추적했다. 위조 비급에 섞인 운기 궤적이 내 무공에 남아 있는 건, 조직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수련했기 때문이야. 한월당의 진법과 암호를 꿰뚫은 것도 그 때문이고.”
공손려가 입을 가렸다. 피 묻은 손이 입술에 닿았다. 철렁한 비릿함이 혀끝에 감돌았다. 하진혁의 검은 여전히 명원진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칼날 위에 굳어 가는 피가 얇은 막을 이루었다.
“사정이 있었다는 말로 끝내려는 거냐.”
“아니.”
명원진이 단도를 거꾸로 쥐고 가슴께로 가져갔다. 칼끝이 가죽 갑옷을 뚫었다.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가 밤의 적막을 잘랐다.
“네가 나를 베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듣고 쳐라. 그 작자는… 위조 비급을 만드는 자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명문 정파의 검보처럼 기반 구조가 견고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마치 예술에 가까운 집착으로 비급을 만든다. 그게 그자의 방식이다.”
하진혁의 눈빛이 변했다. 살기만 가득하던 눈동자에 처음으로 불꽃 같은 의문이 스며들었다.
“그자가 누구냐.”
“귀곡자다. 진서방의 모든 위조 비급은 그자의 손에서 나온다.”
명원진이 숨을 들이켰다.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다. 그자의 숨통을 내 손으로 끊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하진혁이 검을 들어 올렸다. 칼날이 달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 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 굳었다. 공손려가 비명을 삼키며 앞으로 뛰쳐나오려 했다. 그러나 하진혁의 검이 내려찍히기 전에, 명원진이 먼저 단도를 옆구리에 꽂았다.
가죽이 찢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피가 검은 무복을 타고 흘러내렸다. 밤하늘 어딘가에서 올빼미가 울음을 멈췄다.
명원진은 신음조차 하지 않았다. 단단한 복근이 칼날을 물고 움찔거렸다. 그 통증을 견디며 오히려 눈빛은 더욱 또렷해졌다.
“이걸로 네 사문에 바친 제물로 삼아라.”
명원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핏기가 빠져나간 얼굴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바람이 불자 풀 냄새와 쇠 냄새가 뒤섞였다.
“그리고 내가 죽어야 할 자는 따로 있다. 귀곡자를 먼저 찾게 해다오.”
하진혁의 검이 멈췄다. 칼끝이 명원진의 가슴에 살짝 닿은 채로 시간이 멈춘 듯했다. 검 위의 피가 마지막 한 방울을 향해 천천히 흘러내렸다.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매 자락이 흔들리고 발밑의 낙엽이 굴렀다. 왼손 약지의 옥 가락지가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고요한 밤, 그 작은 빛만이 유일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듯했다.
“그 가락지….”
공손려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빛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속에 무언가 아물지 않은 기억이 스쳤다. 하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이 굳게 닫혀 있고 눈동자만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검을 거뒀다. 칼집에 꽂히는 소리가 바위산에 메아리쳤다. 쇠와 쇠가 맞물리는 그 냉철한 소리가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진혁이 돌아섰다. 등 뒤로 걸친 현금의 윤곽이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칠흑 같은 실루엣 사이로 현의 끝이 바람에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네 죄를 사해준 게 아니다.”
하진혁이 걷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차가웠다. 발밑의 마른 풀들이 바스러졌다.
“진짜 원수를 찾는 데 네 정보가 필요할 뿐이다.”
명원진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단도를 옆구리에서 뽑아내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무복으로 눌렀다.
천에 배어든 붉은 빛이 금세 검은 옷감 속으로 번져 어둠이 되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다만 숙인 눈꺼풀 아래로 오랜 짐을 조금 덜어낸 듯한 빛이 잠시 스쳤다.
공손려는 하진혁의 등 뒤에 멈춰 섰다. 입술이 달싹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검에 베인 손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찢어진 소매를 찢어 손바닥을 칭칭 감았다. 천이 피를 빨아들이는 대로 붉게 물들었다. 눈빛이 두 사람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반 걸음 뒤에 선 그녀의 발밑에 제 그림자보다 더 짙은 무언가가 깔렸다.
“죄송합니다.”
명원진이 입을 열었다. 하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선풍객잔을 아시오?”
하진혁의 발걸음이 멎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밤하늘을 향해 선 그의 뒷모습은 현금의 윤곽과 함께 한 폭의 절벽 같았다.
“진서방의 숨겨진 전초 기지다. 낙성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거기서 그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요.”
바람이 거세졌다. 야산의 키 작은 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굽혔다. 잎사귀들이 부서지듯 부딪히고 먼지가 일었다.
하진혁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명원진의 옆구리 상처에 닿았다가, 다시 길을 향했다.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검을 거둔 손은 주먹을 쥐지 않았다.
“선풍객잔으로 간다.”
현금을 멘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줄이 긴장하며 낮은 진동을 울렸다.
“이번 한 번만 믿는다.”
하진혁이 걸음을 옮겼다. 공손려가 피 묻은 손을 가슴께로 올리며 그 뒤를 따랐다. 상처가 욱씬거렸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따라붙었다.
명원진은 상처를 누른 채 일어나 사모도를 등에 바로 했다. 옆구리를 감싼 손가락 사이로 진물이 조금 배어나왔다. 고개를 한 번 더 숙이고는, 두 사람의 뒤를 이어 걸었다.
어둑한 초저녁의 야산에 세 개의 발자국 소리가 겹쳐졌다. 각자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져 땅 위의 낙엽들을 쓸어 날렸다. 그 길 위에 붉게 젖은 발자국이, 한 걸음 한 걸음 어둠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