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금검쟁명 (琴劍爭鳴)

10화

동이 트기 한 시진 전이었다.

안개가 숲을 삼켰다. 바닥까지 내려앉은 습기 속을 세 그림자가 가르며 나아갔다. 하진혁이 앞장섰다. 거문고 등판의 상감이 짙푸른 빛을 머금었다.

공손려가 바로 뒤를 따랐다. 비취 비녀가 안개 속에서도 은은한 빛을 냈다. 철선을 쥐지 않은 왼손이 바위 옆 고사리를 한 번 스쳤다. 서리 맺힌 잎의 감촉이 손끝에 거칠었다.

“이 안개, 골짜기 입구에 가까워지면 더 짙어질 거예요. 바람이 막히니까.”

공손려의 목소리가 젖은 안개를 뚫고 왔다.

“음공의 흔적이야.”

명원진이 뒤에서 쏘아붙였다. 사모도는 등에 멘 채였다. 왼쪽 팔의 베인 상처는 이미 핏물이 굳었다. 오른손은 칼자루에 걸쳐 있었다.

“안개가 아니라 음파가 공기 중에 퍼진 것이다. 피부가 저릿하지?”

하진혁이 걸음을 멈추었다.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허공에 살짝 띄웠다. 미세한 진동이 손가락 뼈마디를 따라 올라왔다. 진동은 일정하지 않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파동이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저주파. 귀에 들리지 않는 영역까지 쓰고 있다.”

공손려가 철선을 반쯤 펼쳤다.

“이건 아직 준비 단계네요. 골짜기 안쪽의 큰 진동에 맞춰 공명만 시키는 용도.”

명원진이 칼자루를 놓지 않은 채 나무 위를 훑었다. 과거 조직 시절 그가 뚫었던 매복 루트가 하나 떠오른 듯했다. 눈빛이 빨라졌다.

“저쪽 가지가 부자연스럽게 꺾였다. 귀곡자의 수제자 한 명이 루트를 외워서 풀어놓은 곳이다.”

“음마곡주인가.”

하진혁의 말에 명원진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름보다 수를 겉으로 드러내길 꺼리는 자다. 음마패라는 공명판으로 소리를 증폭시킨다.”

공손려가 낮은 음으로 말을 받았다.

“궁각치우가 맞죠. 귀곡자가 주법은 가르쳤지만 주파는 못 넘긴 거야.”

“그가 나온다면 지금쯤 우리가 이미 진입한 걸 안다. 목을 조르듯 달린다고 쳐도 결국 이 길목은 피할 수 없으니까.”

명원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람에 실린 음 하나가 숲을 관통했다.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성대를 거치지 않은 기계적인 진동. 나무껍질이 갈라지는 듯한 저음이 사방에서 동시에 울렸다.

마음공(魔音功)의 전조였다.

명원진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사모도를 뽑지는 않았다. 양손바닥으로 입을 감싸 쥐고 휘파람을 짧게 두 번 불었다.

한 박자 쉬고 다시 세 번. 조직 시절 야간 수색 시 쓰던 응답음이었다. 귀곡자의 추종 세력이라면 반드시 이 신호를 구별할 줄 안다.

숲이 멈칫했다.

그 순간 아홉 개의 음이 동시에 터졌다. 나무 뒤에서, 바위 아래에서, 흙 속에서. 음파라는 이름의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세 사람의 고막을 정확히 조준했다.

공손려가 오른발을 앞으로 뺐다. 왼손은 이미 철선을 활짝 폈다. 나비 모양의 쇠부채가 한 번 접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거문고 수업 전 어린 시인들이 목청을 푸는 것처럼 짧고 정확한 음 하나.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고음 하나가 솟아올랐다. 철선 표면을 따라 흘러나온 청심곡(淸心曲)의 서두. 전통 음률의 가장 깨끗한 자리, 궁(宮)음을 길게 빼며 내공을 실었다. 음파가 부챗살 사이로 번지며 마음공의 파동을 한 겹씩 깎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얼음 조각을 갈아내듯. 적의 음파가 파열되는 소리가 숲 바닥에 흩어졌다.

명원진이 왼손 검지를 폈다.

“세 방향에서 쏜다. 일곱 호흡 간격으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음 파동이 왔다. 처음보다 한 옥타브 높았다. 공손려의 청심곡이 순간 흔들렸다. 고막이 아닌 내장을 직접 타격하는 대역의 소리. 음역을 바꿔가며 간섭을 피하려는 계산이었다.

공손려가 한 걸음 물러서며 철선을 비스듬히 세웠다. 부챗살이 벌어지며 이번에는 다섯 개의 음이 동시에 갈라져 나왔다. 치(徵)음과 우(羽)음을 번갈아 맴도는 변주곡. 마음공의 음역대를 한 옥타브 위아래로 쫓으며 틈을 찾았다.

명원진이 휘파람을 다시 불었다. 이번에는 네 번. 그것이 끝나자 왼쪽 나무 뒤에서 비명이 짧게 터졌다. 조직의 엄호 신호에 추종자 하나가 자리를 옮기다 자신의 음파에 맞은 모양이었다.

“당황하는 놈은 곡주 급이 아니다. 음마곡주 본인을 찾아야 한다.”

명원진의 청회색 눈이 안개를 뚫었다.

바로 그때 발밑이 울렸다.

음파가 아니라 진짜 물리적 진동이었다. 흙 속 깊이 박힌 돌이 갈라지는 소리. 계곡 지형을 따라 증폭된 저음파가 지표면을 타고 올라왔다. 안개 속에서 형체 하나가 솟아올랐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였다.

손에는 길이 두 자 반쯤 되는 철판이 들려 있었다. 표면에 악보 문양이 도드라져 있고, 테두리에는 귀곡자의 인장과 같은 파도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음마패(音魔牌).

사내가 한 번 흔들 때마다 음마패가 허공을 긁으며 칼날 같은 소리를 냈다. 공기 중의 습기가 진동을 따라 물보라처럼 흩어졌다. 그의 입이 귀 밑까지 찢어질 듯 벌어졌다.

“조직의 밤 운율을 기억하는가, 대장.”

음마곡주의 목소리가 배음처럼 울렸다. 성대 하나가 아니라 음마패에 입을 대고 증폭시킨 소리다.

명원진이 대꾸하지 않았다. 오른손이 사모도의 칼자루를 감아쥔 각도만으로 답했다.

음마곡주가 음마패를 땅에 꽂았다.

쉬익──.

음파가 흙 속의 지하수를 진동시켜 주변 바위를 한꺼번에 밀어 올렸다. 지표면이 사방 여섯 자 범위로 갈라졌다. 세 사람의 발이 동시에 바닥을 잃었다.

하진혁이 옆으로 굴렀다. 등에 멘 거문고가 바위에 한 번 긁혔다. 현 하나가 짧게 울었다.

곧바로 웅크린 자세에서 거문고를 품으로 당겼다. 왼손으로 현을 한 번 쓸자 거문고 전체가 웅웅거렸다. 음파가 허공을 밀며 바로 앞까지 날아온 돌조각을 쳐냈다.

오른쪽 귀 너머로 폭포 소리가 들렸다.

아직 계곡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아침 안개를 타고 낮고 무거운 물소리가 숲 바닥을 따라 전달되어 왔다. 바람에 실린 폭포 소리는 불규칙했다. 떨어지고 부딪히고 다시 솟아오르기를 쉬지 않고 반복했다.

하진혁은 잠시 숨을 고르며 거문고 현에 손을 얹었다. 스승은 말한 적이 있었다. 소리를 듣지 말고 소리가 지나가는 길을 봐야 한다고. 지금 폭포 소리는 길을 만들고 있었다. 나무와 돌과 흙을 지나 그의 손가락 아래 거문고까지 닿아오는 길.

순간 깨달음이 왔다.

스승의 일기에 적혔던 ‘금기에 손을 댔다’는 말은 단순한 기술 전수가 아니었다. 자연이 만든 소리와 인간이 인위로 만들어낸 음, 그 경계를 넘나들려 했던 시도. 바람과 물소리는 오는 대로 받아야 하는데, 사람은 그 소리에 내공을 실어 의도를 넣으려 한다.

바로 그 지점. 스승 하백운은 음과 검을 하나로 꿰는 과정에서 자연의 음률을 길들일 수 있다고 여겼다. 그 교만이 금기였다. 그리고 귀곡자는 그 교만을 훔쳐서 음파 진동의 법식(法式)으로 뒤틀었다.

목적은 같았다. 소리로 강호를 뒤흔드는 것. 그러나 길이 달랐다. 자연과 공명하는 길과, 자연을 찢는 길.

통찰이 손끝까지 번졌다.

“공손려! 왼쪽 세 번째 나무!”

명원진의 외침이 그를 현실로 불러냈다.

공손려가 외침과 동시에 철선을 왼쪽으로 틀었다. 그녀가 만든 청심곡의 음역대가 채 지워지지 않은 마음공의 잔파를 추적해 밀어냈다. 나무 뒤에 숨은 곡주 셋이 음파에 밀려 흙바닥으로 쏟아졌다.

명원진이 그 틈에 달려들었다. 사모도를 뽑지 않은 채 왼손으로 상대의 손목을 비틀었다. 칼을 쥐기도 전에 내공으로 경락을 한 방에 막았다.

“셋은 제압했다. 음마패가 문제다.”

공손려가 바위에 등을 기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이제 그쪽은 손을 대야 할 때야. 나는 계속 청심곡으로 간섭을 풀게요.”

하진혁이 일어났다.

거문고를 왼쪽 어깨에 걸쳤다. 오른손을 현에 올리자 옥 가락지 안쪽의 ‘청음(靑音)’ 글자가 손가락 마디를 가볍게 눌렀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폭포 소리가 아직 귀 안에 남아 있었다. 이제 귀로 듣지 않고도 그 길이 보였다.

음마곡주가 음마패를 땅에서 뽑아 올렸다. 철판 표면의 악보 문양이 푸른빛을 발했다. 그가 입을 벌리며 뭔가 외치려는 순간 하진혁의 오른손이 현을 튕겼다.

금검술 초식, 유음참혼(流音斬魂).

거문고의 일곱 현이 동시에 울었다. 음 하나하나가 검기로 변환되는 순간이었다. 음파가 일곱 개의 칼날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진공 상태처럼 공기가 짧게 찢어졌다.

음마곡주가 놀라 음마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철판이 검기를 막으려는 찰나, 공손려의 철선이 바람을 갈랐다. 그녀가 미세하게 손목을 꺾자 부챗살 사이로 반음(反音)이 흘러나왔다.

음마패가 스스로 내뿜은 음파를 정확히 상쇄하는 반대 위상의 파동. 금속이 달아오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음마패 표면의 악보 문양이 한 겹 벗겨져 나갔다.

명원진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입술을 말아 짧게 세 번 휘파람을 불었다. 열한 명의 곡주가 동시에 흠칫했다. 조직 시절, 행동대장이 추종자들에게 내리던 음성 명령의 잔향이었다. 셋은 그대로 내공 역류를 일으키며 주저앉았다.

하진혁이 두 번째 현을 쳤다.

이번에는 한 현이 아니라 여섯 현을 차례로 훑었다. 파동이 겹치며 검기가 소용돌이쳤다. 일곱 번째 현을 마지막으로 당겨 놓자 모든 음이 하나의 진공 칼날로 압축되었다. 폭포 소리를 닮은 낮은 울림이 거문고 몸통 안에서 일었다.

음마패의 중앙을 향해 쏘아진 검기가 철판을 관통했다. 균열이 번지는 소리가 났다.

음마곡주가 비명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음마패가 조각나 떨어지자 숲 전체의 음파 간섭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안개가 갑자기 가벼워진 듯했다.

“곡주님의 진정한 걸작은 이미 골짜기 안에 있다.”

음마곡주가 찢어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푸른 이끼 낀 바위 뒤로 그림자가 스며들듯 사라졌다. 잔당들도 하나둘 숲속으로 흩어졌다.

공손려가 철선을 접으며 조각난 음마패 쪽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떨어진 금속 파편 사이로 비단 조각이 반쯤 타서 붙어 있었다.

“약도네요. 이게.”

비단 위에는 먹으로 그린 선이 몇 개 남아 있었다. 계곡의 윤곽. 세 갈래 길. 중앙에 ‘소문(嘯門)’이라는 글자.

명원진이 바위에 걸터앉으며 왼팔의 붕대를 다시 감았다.

“음마패 안에 숨겨둔 건가. 미리 준비한 퇴로 안내도인 셈이군.”

하진혁이 파편을 좀 더 걷어올렸다. 비단 아래쪽에 찍힌 인장이 보였다. 귀곡자의 인장. 물결 문양 속에 상하가 뒤집힌 악보.

한 시진쯤 뒤, 계곡 입구의 바위 지대에서 세 사람은 멈춰 섰다.

아침 해가 안개를 완전히 걷어내고 바위 표면을 말리고 있었다. 공손려가 바위에 거문고를 내려놓았다. 청심곡 악보를 앞에 펼친 채, 떨어진 음역대를 자루에 담긴 송진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명원진은 사모도를 빼내어 포목으로 칼날을 닦았다. 칼날에 묻은 흙과 진동의 잔파가 헝겊에 검게 배어 나왔다. 한 번 닦을 때마다 칼날이 달빛 대신 아침 햇살을 받아 바로 옆 공손려의 비취 비녀를 비췄다.

하진혁이 비단 약도를 바위 위에 펼쳤다. 찢어진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선의 흐름을 따라갔다. 약도에 표시된 진법의 배치는 음률 배열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궁(宮)이 동굴 입구에, 상(商)이 폭포 뒤에, 각(角)이 수로에 놓여 있었다.

스승의 금검술보에 적혔던 초식의 배열과 같았다. 다만 한 군데, 중앙의 치(徵)와 우(羽)가 뒤바뀌어 있었다. 귀곡자는 스승의 악보를 그대로 훔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뒤집은 지점이 있었다. 바로 그곳이 음파 진동의 중추였다.

공손려가 송진 묻은 손을 헝겊에 닦으며 다가왔다.

“저 자리만 빼면 하 대협이 읽은 금검술보랑 똑같다는 거죠.”

하진혁은 끄덕였다.

“내부에 들어가면 이 뒤집힌 두 음을 바로잡아야 한다. 소리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되, 억지로 밀어 넣지 않고 자연의 흐름 속에서 상쇄해야 한다.”

명원진이 칼자루를 고쳐 쥐며 일어났다.

“그럼 폭포와 동굴에선 우리가 시간을 버는 셈이다. 네놈이 중추에 닿을 때까지.”

말투는 여전히 반말이었지만 목소리는 이전처럼 비꼬지 않았다. 공손려가 짧게 웃으며 철선을 허리춤에 꽂았다.

“소리를 검이 아니라 흐름으로 놓는 모양이네요.”

하진혁이 거문고를 등에 메고 계곡 입구를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발바닥이 바위를 딛는 순간, 골짜기 깊은 곳에서 음파 진동이 울려 퍼졌다. 공기의 진동이 아니라 땅속 물길을 타고 올라온 저주파의 떨림. 세 사람의 거문고 현들이 동시에 스스로 웅웅거렸다.

공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금검쟁명 (琴劍爭鳴)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