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검쟁명 (琴劍爭鳴)
11화
계곡 바닥의 진동이 걷히지 않았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위 밑에서 낮은 울림이 밀려왔다. 하진혁의 거문고 현들이 가방 속에서 계속 떨고 있었다.
명원진이 사모도를 앞세워 동굴 입구로 들어섰다. 칼날에 아침 빛이 닿자 푸른 빛이 번쩍였다. 공손려가 그 뒤를 따르며 철선을 반쯤 폈다. 쇠부채 살 사이로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하진혁이 마지막으로 안으로 들었다. 등 뒤의 빛이 좁아지다 사라졌다.
동굴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 방울이 바닥의 웅덩이에 닿을 때마다 동굴 전체가 작게 울렸다. 소리의 법칙이 바깥과 달랐다. 벽에 부딪힌 소리가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여러 겹으로 겹쳐졌다.
공손려가 걸음을 멈췄다.
“이상하네요. 물소리가 너무 규칙적이에요.”
명원진도 칼을 낮추며 벽에 손을 댔다. 손바닥으로 돌의 진동을 읽는 중이었다.
“함정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동굴의 공기가 변했다.
앞서 걷던 명원진의 모습이 안개 속으로 번지듯 흐려졌다. 공손려가 손을 뻗었지만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그의 형체가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니 입구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음파가 밀려왔다. 방향도 근원도 없는 소리였다. 귀를 막아도 머릿속에서 바로 울렸다. 하진혁의 거문고 줄이 동시에 날카롭게 떨었다. 갈라질 듯한 고음이었다.
내공을 다리에 모아 중심을 잡았다. 발바닥으로 바닥을 누르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일곱 호흡. 첫 번째 들숨에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두 번째 들숨에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때 동굴 깊은 곳에서 폭포 소리가 들렸다.
다른 모든 소리를 누를 만큼 단단한 저음이었다. 미혼진의 교란된 음파 속에서도 폭포 소리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진혁은 그 소리에 귀를 열었다.
공손려는 혼자였다.
동굴 천장도 바닥도 보이지 않았다. 발밑이 확 트인 듯 허공에 떠 있는 감각이었다.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흘러왔다. 자신이 아는 곡이었다. 열 살 때 처음 배운 청성곡이었다.
피리 소리가 가까워지자 주변이 밝아졌다.
그녀 앞에 넓은 마루가 펼쳐졌다. 가문의 연습실이었다. 낡은 거문고가 벽에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하나가 그녀였다. 검은 머리를 양갈래로 땋은 어린 공손려.
아이의 손가락이 현을 짚었다. 바로 그 순간,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능은 없지만 노력은 하는군.”
“소리꾼 가문에서 저 정도 음감이라니.”
아이의 손가락이 멈췄다. 고개가 숙여졌다.
지금의 공손려는 그 광경을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 한복판에 익숙한 통증이 찾아왔다. 마석준의 배신보다 더 오래된 상처였다. 자신이 충분하지 않다는 증명을 평생 받아온 기억.
음파 진동이 그 기억을 먹고 자라고 있었다. 어린 자신의 모습이 손가락을 다시 움직이려다 멈추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웃음소리가 커졌다. 현실의 동굴이 아니라 마음속 동굴에 갇힌 기분이었다.
공손려는 숨을 들이마셨다.
“들릴 거예요. 분명히.”
철선을 접었다 폈다. 나비 모양의 쇠부채가 제 소리를 찾아 떨었다. 그녀는 청심곡의 첫 소절을 떠올리며 부챗살을 하나씩 두드렸다. 철선이 내는 맑은 금속음이 환영의 피리 소리와 다른 높이에서 울렸다.
환영을 깨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환영 속 어린 자신에게 새로운 소리를 들려주었다. 철선이 한 번 울릴 때마다 웃음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아이의 떨리는 손가락이 현을 다시 눌렀다.
단단한 소리였다.
“진혁 님! 원진 씨!”
그녀의 외침이 음파의 벽을 뚫고 퍼져 나갔다. 내공을 실은 목소리가 거문고 현처럼 공명했다.
명원진은 칼을 빼들고 있었다.
눈앞에 선풍객잔의 뒷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그가 북부 행동대장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사형이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봉투에는 제목만 적혀 있었다. ‘원진에게.’
편지를 열기도 전에 알았다. 사형이 위조 비급을 손에 넣었다는 걸.
환영 속에서 사형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평소에 앉던 바위에 걸터앉아 칼을 닦고 있었다. 명원진은 입을 열려다 멈췄다. 이것이 환영이라는 걸 알면서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형이 고개를 들었다.
“네놈이 퍼뜨린 비급 말이다.”
피가 토해지는 소리가 났다. 사형의 입가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한 놈, 겨우 한 놈 살리려고 나머지 백 명을 죽였구나.”
명원진의 손이 사모도 자루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동굴에 울리는 음파가 그 죄책감을 진동수로 바꾸어 왼쪽 팔의 열상을 찢고 들어왔다. 붕대 아래서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
명원진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의 존대였다.
“그 한 놈도 살리지 못했습니다.”
칼을 옆으로 비껴 들었다. 사모도의 무게가 오른손에 익숙하게 실렸다. 칼날이 환영 속 사형의 모습을 가르며 허공을 베었다. 잘린 환영이 안개처럼 흩어지다 다시 뭉치려 했다.
명원진은 두 번 휘파람을 불었다. 한 박자 쉬고 세 번. 과거 조직의 신호음이 동굴 벽에 부딪혀 울려 퍼졌다. 자신을 속박하던 음파 진동이 잠시 혼란을 일으켰다. 그 틈에 명원진은 소리쳤다.
“진혁! 어디 있나!”
하진혁의 귀에 두 사람의 외침이 동시에 닿았다.
공손려의 목소리는 높은 음역에서, 명원진의 목소리는 낮은 음역에서 울렸다. 두 소리가 폭포 소리와 만나 하나의 화음을 이루었다. 그 순간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음을 보지 말고 음이 되라.’
하진혁은 거문고를 등에서 내렸다. 가방을 벗기지도 않고 손가락을 현에 걸었다. 일곱 줄이 동시에 떨렸다. 이번에는 방어하기 위한 울림이 아니었다. 소리를 듣기 위한 떨림이었다.
눈을 감았다.
첫째 줄에 귀를 열자 폭포 소리가 갈라졌다. 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내는 천 개의 음이 각각 다른 떨림으로 분리되었다. 둘째 줄에서는 바람이 동굴 벽을 스치며 만드는 마찰음이 들렸다. 셋째 줄에선 명원진의 휘파람이 남긴 잔향이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넷째 줄은 공손려의 철선이 만드는 금속음과 공명했다.
다섯째 줄에 집중했다.
폭포 소리의 가장 깊은 저음이었다.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아니라 바위 자체를 울리는 진동. 그 소리가 자신의 호흡과 같은 주기로 밀려왔다. 숨을 들이쉴 때 폭포 소리가 커지고, 내쉴 때 줄어들었다.
하진혁은 손을 현에서 뗐다.
거문고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허공에 오른손을 펼치자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흘렀다. 폭포가 만든 바람이었다. 그 바람에 내공을 실었다. 숨을 내쉬듯 천천히, 그러나 끊지 않고.
손끝에 닿은 공기의 떨림이 점점 커졌다. 폭포 소리, 동료들의 목소리, 자신의 심장 박동까지. 모든 진동이 허공에 펼친 손바닥 안에서 하나로 모여들었다. 금빛 실오라기 같은 음파가 손가락 사이를 휘감아 돌았다. 실이 겹겹이 쌓여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보이지 않는 검이었다. 바람과 소리로 이루어진 검. 금검술의 궁극.
수호의 검.
손목을 비틀어 검을 수평으로 베었다. 금빛 음파가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동굴 벽에 부딪혀야 할 음파가 벽을 뚫지 않고 스며들었다. 돌 속에 숨어 있던 귀곡자의 진법 기구에 닿자 마른 대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동굴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졌다.
첫 번째 진법 기구가 산산조각났다. 푸른 안개가 만든 환영의 벽이 한쪽부터 걷히기 시작했다. 공손려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앞에 놓인 환영 속 연습실이 유리처럼 금 가며 무너졌다.
명원진도 나타났다. 사모도를 수평으로 비껴 든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왼쪽 팔의 붕대가 붉게 젖어 있었지만 서 있는 자세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진혁은 검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두 번째 베기를 이어갔다.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큰 원이었다. 수호의 검이 향한 곳은 동굴 천장 중앙. 거기에 귀곡자가 숨겨둔 두 번째 진법 기구가 있었다.
폭포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진혁의 검기에 공명한 자연의 소리가 함께 밀려 올라가 천장의 암반을 때렸다. 돌 틈새에서 쇳소리가 울리며 기구가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세 개의 환영 진법이 거의 동시에 꺼졌다. 동굴을 가득 채웠던 푸른 안개가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흩어졌다. 흩어진 안개 사이로 원래의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하 수로였다. 천장에선 여전히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이제 그 소리는 불규칙했다.
자연의 물소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벽 한쪽에서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높이 열 길은 되어 보이는 수직 낙차의 물줄기가 바위를 때리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하진혁이 서서히 손을 내렸다.
손가락 사이를 감돌던 금빛 실오라기가 흩어졌다. 검기를 거두자 동굴이 조용해졌다. 폭포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그는 돌아섰다.
공손려가 철선을 접어 허리춤에 꽂으며 걸어왔다. 옷자락이 물에 젖어 있었고 얼굴엔 미세한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숨이 차 보였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그녀는 진혁에게 다가와 멈춰 섰다.
“방금 그거…… 거문고 없이도 음을 검이 되게 한 거죠?”
하진혁이 끄덕였다.
“소리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을 뿐이다.”
“그럼 이제.”
공손려가 미소 지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명원진이 다가왔다. 사모도를 칼집에 꽂으며 왼팔 붕대를 한 번 더 조였다. 피가 번지는 속도는 늦춰진 듯했다.
“진법은 끝났나.”
여전한 반말이었지만 목소리에 날카로움은 빠져 있었다. 하진혁이 천장을 가리켰다.
“핵심 기구 둘은 부서졌다. 주변에 더 있을지 모르지만, 음파를 증폭시킬 동력은 잃었다.”
명원진이 칼자루를 한 번 쥐었다 놓았다.
“음마패와 같은 원리인가.”
“더 정교하다. 거문고의 떨림을 이용해 동굴 자체를 공명통으로 만들었다.”
공손려가 철선을 들어 바닥의 물을 가리켰다.
“이 물길이 소리를 실어 나르는 모양이네요. 낙차가 있는 곳마다 다른 음이 울리게 설계한 거예요.”
그녀가 철선으로 수면을 살짝 쳤다. 잔물결이 퍼져 나가자 천장에서 가벼운 울림이 돌아왔다. 진혁의 말이 맞았다면 이제 부서져야 할 기구가 남은 목소리를 낸 셈이었다.
하진혁이 걸음을 옮겼다. 폭포 가까이로 다가가자 물보라가 얼굴에 닿았다. 차가운 감촉이 땀과 먼지를 씻어냈다.
폭포 뒤편에 작은 공간이 보였다. 바위가 처마처럼 튀어나와 물줄기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약도에서 상(商)이라고 표시된 지점이었다.
“여기다.”
하진혁이 물보라를 뚫고 폭포 뒤로 들어갔다. 공손려와 명원진이 뒤따랐다.
물줄기 안쪽은 의외로 건조했다. 바닥에 평평한 돌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인위적으로 파낸 듯한 홈이 있었다. 그 홈 안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귀곡자가 남긴 마지막 장치였다.
명원진이 사모도를 반쯤 빼며 앞으로 나섰다.
“독침일지도 모른다.”
하진혁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아니다. 이것은 진법 기구가 아니다.”
상자에는 아무런 장치도 없었다. 뚜껑을 열자 안에서 악보 한 권이 나왔다. 표지가 낡은 가죽으로 싸여 있었고, 가죽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악보를 들어내자 그 아래에서 작은 옥 패가 나왔다. 스승의 옥 가락지와 같은 재질이었다. 패의 앞면에는 금검 두 글자가, 뒷면에는 스승의 필체로 짧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하진혁이 글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이 악보는 금검술의 바른 길이니, 사제가 제자리로 돌아오거든 전하라.”
공손려가 숨을 들이켰다.
“하 대협이 귀곡자를 위해 남긴 거였군요.”
하진혁은 말없이 악보를 가슴에 품었다. 스승은 제자의 배신을 예감하고도 바로잡을 길을 남겼다. 복수하라 하지 않고 가르침을 택한 것이었다.
폭포 소리가 뒤에서 꾸준히 울렸다. 이제 그 소리는 더 이상 함정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저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흐르는 자연의 소리였다. 환영곡은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하진혁이 상자를 닫았다. 뚜껑이 제자리에 맞춰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