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검쟁명 (琴劍爭鳴)
7화
선풍객잔 지하 은실로 내려서자 습하고 비린 공기가 코를 찔렀다. 벽면의 운모 가루가 희미하게 빛났다. 명원진이 사모도를 고쳐 쥐며 낮게 경고했다.
“공명 벽이다. 여기서 음공을 쓰면 증폭된다. 적이나, 우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쇠줄 긁는 파열음이 은실 전체를 때렸다. 공손려가 귀를 막으며 비명을 삼켰다. 어둠 저편에서 마석준이 포승을 끊어낸 붉은 손목을 내보이며 걸어나왔다. 왼손에는 세 가닥 쇠줄과 날카로운 갈고리가 들려 있었다.
“귀곡자님께서 손님 대접을 단단히 하라 하셨다.”
마석준이 쇠줄을 튕기자 금속음이 공명 벽을 타고 네 겹으로 증폭됐다. 은실 전체가 하나의 악기처럼 울부짖었다. 하진혁의 귀에서 이명이 일고 내공이 흔들렸다. 명원진이 사모도를 세로로 세워 방패 삼았지만, 쇠줄 울음이 칼날에 부딪혀 날카로운 비명으로 바뀌었다.
“이 공간에선 음공을 거두면 내 쇠줄에 찢긴다. 음공을 쓰면 네 몸이 못 버틴다.”
마석준의 손목이 뒤집히며 갈고리가 하진혁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진혁이 왼쪽으로 굴렀지만 갈고리는 어깨 옷깃을 스치며 석회 벽에 박혔다. 공손려가 철선을 펼쳐 음공을 실은 바람을 쐈으나, 공명 벽이 그 음공마저 증폭시켜 되돌아왔다. 찢어진 옷소매 아래 붉은 선이 그어졌다.
마석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양손으로 세 가닥 쇠줄을 한 번에 튕겨 내자, 합쳐진 금속음이 은실의 공명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벽이 갈라지며 석회 조각이 쏟아졌다. 명원진이 낙하물을 쳐내는 사이 쇠줄이 균열을 따라 휘둘렸다. 충격이 중첩되자 석회벽 한 면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먼지가 가라앉자 무너진 벽 너머로 실험실이 드러났다. 탁자 위에 두루마리들이 쌓여 있고, 유리병 속 검푸른 액체가 번들거렸다. 벽에는 열 장이 넘는 인체 경락도가 걸려 있었다. 마석준은 숨을 고르며 어둠 속으로 잠시 물러났다.
하진혁은 무너진 벽을 넘어 실험실로 들어갔다. 탁자 위 두루마리를 펼치자 위조 비급의 운기 궤적도가 드러났다. 붉은 선과 푸른 선이 경락을 따라 교차했고, 구결 옆에는 작은 붓글씨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기해혈에서 명문혈로 - 역방향 진행 시 경락 파열 속도 3할 가속.’
하진혁의 숨이 멈췄다. 운기 궤적의 기본 뼈대는 금검술과 정확히 일치했다. 단전에서 시작해 손소음심경을 타고 검 끝으로 기운을 모으는 경로. 두 군데 혈도만 비틀고 나머지를 역방향으로 뒤집은 복사본이었다. 금검술을 모르면 절대 만들 수 없는 구조였다.
“이것 좀 봐.”
공손려의 떨린 목소리가 탁자 구석을 가리켰다. 누렇게 바랜 한지에 적힌 필체. 하진혁은 숨을 들이쉬었다.
스승 하백운의 특유한 흘림체였다. 피를 토할 듯한 거친 획이 아니라, 깊은 밤 등불 아래 조용히 써 내려간 듯 차분한 글씨였다. 종이 가장자리는 불에 그을린 듯 까맣게 탔다.
‘가락지 안쪽 기호는 한 글자가 아니라 두 운기 경로를 겹친 것이다. 거문고 현을 울리는 내공 운용과 검기를 쏘는 운기 경로를 겹쳐보면 하나의 그림이 된다. 이것이 금검일체의 문이다. 그러나 이 길을 열면 정마의 경계가 무너진다.’
하진혁이 왼손을 올렸다. 옥 가락지 안쪽 ‘청음’ 두 글자 아래로 미세한 선들이 이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흔적이었다.
검기 경로를 그린 선과 거문고 현의 진동을 따라 내공이 흐르는 방향. 두 경로가 교차하며 하나의 완성된 운기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글자가 아니라, 금검일체 초식을 새긴 암호였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쇠줄이 날아들었다. 마석준이 숨을 고르고 재차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갈고리가 탁자 위 두루마리를 낚아채며 종이 조각을 흩뿌렸다.
“시간 끌기는 끝이다!”
마석준의 양손이 쇠줄을 교차시켰다. 금속음이 실험실 전체를 찢고 공명 벽에 부딪혀 다시 증폭됐다. 공손려가 무릎을 꿇었다. 왼쪽 귀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명원진도 사모도를 바닥에 찍으며 버텼지만 팔뚝 핏줄이 터질 듯 부풀었다.
하진혁은 스승의 메모를 품에 밀어 넣었다. 가슴께 닿은 종이의 무게와 함께 손가락에 낀 옥 가락지가 체온 이상으로 뜨거워졌다. 은은한 빛이 살아나며 허공에 경로들이 겹쳐졌다.
단전의 기운이 두 갈래로 갈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하나는 검을 쥔 오른손으로. 다른 하나는——
하진혁이 오른손의 검을 내렸다. 대신 왼손으로 등에 멘 거문고의 포장을 풀었다. 검은 옻칠 몸체가 드러나고, 왼손 약지에 감긴 옥이 현 위에서 빛났다.
“검을 버리겠다는 거냐!”
명원진의 외침을 마석준의 쇠줄이 덮쳤다. 세 갈래 금속음이 합쳐져 마지막 일격을 향해 쏟아졌다.
하진혁은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거문고의 현을 튕겼다. 순수한 음공이 현에서 퍼져나갔다. 그러나 옥 가락지에 새겨진 운기 경로를 따라 내공이 흐르자, 음파는 허공에서 굴절되며 스스로 날을 세웠다. 보이지 않는 검기가 되어 마석준의 쇠줄을 정면으로 쳐냈다.
쇠줄 세 가닥이 동시에 끊어졌다. 갈고리들이 허공에서 멈추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석준의 눈이 커졌다.
명원진이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사모도 자루로 그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석준이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했다. 명원진은 한쪽 무릎으로 등을 누르고 쇠사슬로 양손을 등 뒤로 묶었다.
“이게 무슨…”
마석준의 입술 사이로 붉게 젖은 이빨이 드러났다. 하진혁은 거문고를 내려다보았다. 현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고, 손가락 옥 가락지는 푸른 잔상을 남기며 식어가고 있었다. 단전 충격으로 다리가 약간 풀렸지만 서 있을 수는 있었다.
“검 없이 검기를 쐈다.”
공손려가 귀를 감싼 채 일어나 다가왔다. 그녀는 철선을 접어 허리춤에 꽂으며 거문고의 현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게 금검일체인가요.”
“아직 초보 경지다.”
하진혁이 손가락으로 현을 쓸자 진동이 멎고 실험실 안의 모든 소리가 가라앉았다. 공명 벽도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쓰러진 마석준이 피 묻은 입술 사이로 웃음을 새어냈다.
“위조 비급의 원리를 꿰뚫고 금검일체를 연 자… 귀곡자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신다.”
등롱 불빛이 깜박였다. 하진혁은 품에서 스승의 메모를 꺼내 세 번 접어 옷깃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 공손려가 붕대를 찢어 귀를 지혈하는 동안, 명원진은 마석준의 뒤통수를 발로 눌러 바닥에 붙였다.
“이제 낙성장이다.”
하진혁이 거문고를 다시 천으로 감아 등에 메고 검을 칼집에 꽂았다. 왼손 약지에 감긴 옥은 아직 미열을 머금고 있었다.
“귀곡자가 기다리는 곳으로.”
공손려가 붕대를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명원진은 마석준을 질질 끌며 실험실 입구 쪽으로 움직였다. 세 사람은 무너진 벽 너머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탁자 위 기록과 경락도, 유리병 속 검푸른 액체가 불빛에 번들거렸다. 지금은 그것들을 모두 챙길 시간이 없었다. 하진혁이 발을 돌리자 나머지 두 사람도 그 뒤를 따랐다.
옥 가락지의 빛이 마지막으로 깜박이고 잦아들었다. 문틀 사이로 검푸른 기름이 한 방울 떨어졌다. 돌바닥이 울렁이며 푸르스름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이 안개……”
공손려가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발밑이 사라졌다. 통로도, 벽도, 등롱도 일시에 꺼졌다. 빛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낯선 석굴에 서 있었다. 벽면 네 곳에서 푸른 횃불이 타고, 중앙 얕은 못의 수면이 잔잔했다.
공손려의 눈앞에서 물속이 갈라지며 흰 천을 두른 형체가 솟아올랐다. 나비 모양 철선을 든 여인이 그녀와 똑같은 얼굴로 걸어 나왔다.
“소리꾼 가문의 망신. 네놈 때문에 동문이 마도에 빠졌다.”
환영이 철선을 폈다. 나비 날개 사이로 낮은 음파가 퍼져나갔다. 공손려는 한 걸음 물러서며 등에 멘 현금을 끌어안았다.
명원진 앞에는 불타는 문파의 사문이 펼쳐졌다. 마당 한복판에 사모도가 꽂혀 있었다. 칼자루를 잡은 사형 위백도의 손가락이 굳어 있었다. 죽은 자의 입술만 움직였다.
“네놈이 건넨 비급이다.”
명원진의 청회색 눈동자에 횃불이 일렁였으나 그는 사모도를 뽑지 않았다.
하진혁은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가 선 곳은 폐문 비경의 폭포 앞이었다. 물소리가 뼛속까지 울리는 바위 위에, 흰 머리를 뒤로 묶은 노인이 무릎 위에 거문고를 올리고 앉아 있었다.
“왔느냐.”
청음검향 하백운이 줄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하진혁의 무릎이 저절로 굽어졌다.
“스승님.”
“그 가락지, 네 손에 맞느냐.”
하백운이 왼손을 들자 약지에 금 간 옥 가락지가 드러났다. 하진혁이 내려다본 자신의 가락지 안쪽에는 ‘청음’ 두 글자가 반짝였다.
“스승님께서 금기에 손을 댔다고 쓰셨습니다.”
“그랬다.”
하백운이 넷째 줄을 퉁겼다. 음 하나가 폭포 소리를 뚫고 퍼져나갔다.
“사제가 있었다. 녀석은 현을 울려 경락을 찢는 음공을 만들었다.”
“귀곡자…….”
“나는 그걸 막으려 금검술을 완성했다. 하지만 부족했다. 검기는 음파의 그림자만 벨 수 있었다.”
하백운의 손가락이 다시 현을 짚자 진동이 폭포를 거슬러 올라 물기둥을 반으로 갈랐다.
“그래서 내가 직접 금검술 운기법을 가르쳤다. 금기란 그거였다. 제자에게 물려줄 무공을, 마도에 빠진 사제에게 먼저 전한 것. 녀석은 그걸 뒤집어 현으로 경락을 찢는 살법으로 비틀었고 비급으로 만들어 강호에 뿌렸다.”
하진혁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일기 속 ‘곡’ 자, 부적의 뒤집힌 악보, 명원진의 역행하는 운기 궤적이 한 줄로 꿰어졌다.
“사문이 불탄 까닭은.”
“나 때문에 시작된 인연이다. 내가 끊었어야 했다.”
하백운이 짙은 갈색 눈동자로 제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락지가 다시 따뜻해졌다.
“끊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물건이 제 손에 있습니다.”
하백운이 빙긋 웃으며 거문고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폭포 뒤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그 가락지에는 금검술 마지막 초식이 새겨져 있다. ‘금강무극 음심자재’. 녀석의 음공을 부수는 술법이 아니라 소리의 근원을 바로잡는 술법이다. 증오를 베는 검은 결국 자신도 벤다. 진혁아, 네가 벨 것은 사람이 아니라 소리의 굴레다.”
하진혁이 무릎 꿇고 이마를 축축한 바위에 닿았다.
“명심하겠습니다.”
폭포가 무너지며 바위도, 물안개도, 스승의 뒷모습도 한꺼번에 흩어졌다. 푸른 빛이 꺼지고 다시 등롱이 켜졌다. 하진혁은 여전히 은실 문 앞에 서 있었으나 손바닥에 땀이 배었고 숨이 거칠었다.
철선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공손려가 무릎 꿇은 채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쥐며 말을 이었다.
“……내 동문. 내 탓이 아니라고. 네가 그랬지.”
눈가는 붉었지만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철선을 접자 등 너머에서 명원진이 사모도를 다시 메는 소리가 들렸다. 번뇌가 가시지 않은 눈동자였으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사형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진혁의 물음에 명원진의 손이 칼자루에서 떨어졌다.
“‘내 탓이 아니다’.”
죄를 짊어진 자의 손이었다. 하진혁은 고개를 돌려 부적을 바라봤다. 종이는 희미하게 진동했으나 더 이상 가락지와 공명하지 않았다.
“이 부적의 악보는 금검술 운기법을 뒤집은 것이다. 안에 원본이 있다.”
문을 밀자 부적이 찢어지며 검푸른 기름이 흘러내렸다. 좁은 은실 벽면 가득히 서가가 박혀 있었고, 중앙 탁자 위에 비급 한 권과 기록이 놓여 있었다. 하진혁이 비급을 펴자 첫 장에서 금검술과 똑같은 저변 구조의 운기법이 드러났다. 경락의 흐름만 정반대였다.
“귀곡자의 작품이다.”
서랍 속 누렇게 바랜 메모 한 장에 스승의 붓글씨가 남아 있었다.
‘금기수를 전한 날, 사제의 눈빛이 달랐다. 이 또한 내 업이다.’
하진혁이 메모를 접어 품에 넣고 비급 원본과 기록도 거둬 품었다. 왼손의 옥 가락지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선풍객잔 객실. 창밖으로 달이 기울고 있었다. 하진혁이 창가에 서서 탁자 위 비급과 기록을 내려다봤다. 공손려는 탁자 건너편에서 철선을 손질하고 있었고, 명원진은 문가에 기대어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환영곡으로 간다. 비극의 연쇄를 끊으러.”
하진혁이 메모를 접어 옥 가락지와 함께 손아귀에 쥐며 입을 열었다.
“비급의 흔적도, 사문의 한도, 그 끝에 서 있을 거다.”
공손려가 철선을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문의 일도 거기서 매듭지어야 해요.”
명원진이 벽에서 등을 떼자 청회색 눈동자가 창밖 달을 스치고 하진혁에게로 향했다. 고개 숙인 각도만으로 답은 같았다. 촛불은 흔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