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검쟁명 (琴劍爭鳴)
8화
푸른 안개가 걷혔다.
사라진 줄 알았던 안개가 되살아났다. 이번엔 양상이 달랐다. 안개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사문의 대청이 불타고 있었다. 서까래가 무너지고 단청이 부풀며 검게 그을렸다.
하진혁은 그 한복판에 서 있었다.
스승 하백운이 대청 마루에 앉아 있었다. 등 뒤로 불길이 번졌지만 얼굴은 평온했다. 손에는 거문고가 놓여 있었다. 현이 끊어져 있었다. 일곱 줄 중 셋은 끊어지고, 넷은 성한 채 불빛에 반짝였다.
“금검술의 근본은 금강무극이다.”
스승의 입술이 움직였다. 대들보 타는 소리보다 그 음성이 또렷했다. 하진혁이 한 걸음 다가서자 발밑의 마루가 무너졌다. 떨어지지 않았다. 허공에 선 채 스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심자재. 소리는 마음에서 나니, 마음을 가두면 소리도 갇힌다. 마음을 비우면 소리가 바로 검이 된다.”
스승이 끊어진 현을 손끝으로 쓸었다. 소리는 없었다. 대신 거문고 몸통에서 푸른 빛이 배어 나와 하진혁의 왼손 약지를 감쌌다. 옥 가락지가 뜨거워졌다.
“네 복수는 내 과오에서 비롯되었다. 사제에게 금기수를 전한 날, 나는 이미 그 눈빛이 달랐음을 알았다.”
불길이 스승의 옷자락에 닿았다. 하진혁이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스승의 모습이 불길과 함께 흩어지며 안개가 되었다.
“그러므로 복수하지 마라. 바로잡아라.”
안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더는 불길도, 대청도, 스승도 보이지 않았다. 푸른 안개뿐이었다. 그 안개가 누군가의 숨소리처럼 들이쉬고 내쉬었다. 귀곡자의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아름답지 않으냐.”
하진혁은 눈을 감았다. 옥 가락지가 아직 뜨거웠다. 여덟 글자가 손가락을 조여왔다. 금강무극 음심자재.
마음을 놓은 순간 소리가 검이 되어 퍼졌다.
눈을 감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호흡을 들었다. 숨을 들이쉬자 기해혈에서 내공이 일어났다. 숨을 내쉬니 단전에서 명문으로 이어졌다.
그 흐름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진혁은 운기하지 않았다. 그저 기가 가는 대로 두었다.
내공이 경락을 따라 물처럼 흘렀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물길처럼.
왼손 약지의 가락지가 가볍게 떨렸다. 일곱 줄의 현이 눈앞에 펼쳐졌다. 끊어진 줄도, 성한 줄도 나뉘지 않았다.
일곱 개의 빛줄기만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하진혁이 오른손 검지를 들었다. 현 하나를 튕겼다.
소리가 났다. 푸른 안개가 찢겼다.
둘째 현을 튕겼다. 찢긴 안개 사이로 석굴 천장이 드러났다.
셋째 현을 튕기자 안개가 비명을 질렀다. 귀곡자의 목소리였다.
“그걸 어떻게!”
하진혁이 눈을 떴다. 석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허공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왼손 약지의 가락지에 푸른 잔광이 흘렀다. 등 뒤에서 공손려의 숨소리가 들렸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 명원진의 거친 기침 소리도 섞여 있었다.
안개가 둘로 갈라지며 석굴 안쪽이 드러났다. 제단 위에 올빼미 가면을 쓴 자가 서 있었다. 구부정한 어깨, 목부터 손등까지 번진 검은 비늘 문신. 가면 구멍 너머로 탁한 노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금강무극 음심자재라…… 사형은 결국 그걸 전했군.”
귀곡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른손에 쥔 피리가 떨리고 있었다.
공손려가 철선을 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귀곡자의 환영에 갇혀 있었던 탓에 손끝이 아직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철선을 부채처럼 펼쳐 들었다.
“선배님 환영술의 균열. 이제 보이네요.”
속삭이듯 내뱉았다. 철선으로 허공을 긋자 쇳소리가 났다. 예리한 금속음이 석굴 안에 퍼지자 귀곡자의 가면이 살짝 뒤로 젖혀졌다.
명원진이 벽에 기댄 채로 사모도를 들어 올렸다.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왔지만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눈에서 번뇌가 사라지고 칼날 같은 집중이 들어서 있었다.
“조직 암호. 역순으로 읽는 악보 구절.”
사모도로 바닥을 한 번 내리쳤다. 쇠와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일곱 번의 운율로 석굴을 때렸다. 공손려의 철선 소리와 겹치자 석굴 벽면의 안개가 물결처럼 출렁였다.
귀곡자의 발밑 제단에 금이 갔다.
“둘이서 내 술법의 역음을 찾다니. 대단하군.”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 어린 감탄이었다. 귀곡자가 피리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역음은 역음일 뿐. 완전한 파훼는 되지 못한다.”
피리에서 음 하나가 흘러나왔다. 공손려의 철선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명원진의 사모도가 바닥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멈칫했다. 둘의 호흡이 빨라졌다. 피리 소리가 그들의 내공 운기를 교란하고 있었다.
하진혁이 일어섰다.
왼손을 허리께로 올리자 옥 가락지의 잔광이 다시 살아났다. 마음을 거둬낸 순간 소리가 칼날로 태어난다. 그는 손을 뻗어 허공을 짚었다.
거문고는 등에 멘 채였다. 현에 손이 닿지 않았다. 그래도 손가락을 튕겼다.
소리가 났다.
현이 없는 곳에서 검기가 일어났다. 푸른 빛의 호선 하나가 피리의 음을 가로질렀다. 귀곡자의 피리에서 소리가 끊겼다.
허공에 뜬 검기는 굴 안의 잔존하는 안개를 전부 빨아들였다. 안개가 검기 끝에 모여 푸른 칼날이 되었다. 그 끝이 귀곡자의 목 앞에서 멈췄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귀곡자가 피리를 내렸다. 가면 아래서 숨이 새어나왔다.
“그래. 그게 금검술의 완성이다.”
목소리에서 연극조가 사라졌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은 음색만 남았다.
하진혁이 검지를 거두자 허공의 검이 세 갈래로 갈라져 귀곡자의 양어깨와 무릎을 짚었다. 귀곡자의 몸이 제단 위로 주저앉았다. 피리가 바닥에 떨어져 굴러갔다. 가면이 벗겨졌다.
대머리에 검은 비늘 문신이 온몸을 덮은 사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탁한 노란색 그대로였다. 웃고 있었다.
“사형의 제자치고 상당하군. 하지만…… 소리의 근원을 거스르면 대가는 따르는 법.”
말이 끝나자마자 제단 아래에서 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석굴 바닥이 진동했다. 공손려가 철선을 접으며 하진혁 쪽으로 몸을 붙였다.
“함정입니다.”
명원진이 사모도를 땅에 박으며 버팀목을 만들었다. “출구가 무너지기 전에 나간다.”
하진혁은 귀곡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품에서 스승의 메모를 꺼내어, 제단 위에 떨어진 올빼미 가면 곁에 내려놓았다.
“이 또한 네 업이다.”
귀곡자의 탁한 눈동자가 메모를 향했다. 노란 눈이 떨렸다.
하진혁이 돌아섰다. 공손려와 명원진이 굴 입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등에 멘 거문고를 한 번 짚었다. 끊어진 현은 없었다. 일곱 줄 모두 성했다.
석굴 붕괴 와중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귀곡자를 하진혁 일행이 무너진 잔해 속에서 끄집어냈다. 공손려가 철선으로 굴 입구를 막은 낙석 더미 사이를 확보했고, 명원진이 사모도로 버팀목을 세워 완전 매몰을 막았다. 그 와중에도 귀곡자는 거문고 현이 울리며 생성된 잔향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환영이 무너진 바닥에 올빼미 가면이 뒹굴고 있었다.
하진혁의 검 끝이 가면을 밀어내자 귀곡자의 민낯이 드러났다. 탁한 노란 눈동자가 동굴 천장을 향해 깜빡였다. 검은 비늘 문신은 목에서 손등까지 이어져 있었고, 대머리 위로 핏줄이 실뭉치처럼 얽혀 있었다.
“청음검향 하백운…… 네놈의 사백이다.”
명원진의 목소리가 굴속에서 메아리쳤다. 귀곡자의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여 하진혁의 얼굴에 닿자 입술이 벌어졌다.
“네 스승은. 나를 버렸다.”
하진혁의 손에서 검이 움직이지 않았다. 귀곡자가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로 웃었다.
“금검술 진짜 묘미는 음이 흘러야 검기가 산다고 했다. 그걸 나는 몸으로 깨달았다. 사형은 네놈 따위에게나 주입했겠지. 하지만 내 재능을 알아본 건 사형이 먼저였다.”
하진혁이 검을 한 치 낮췄다.
“금기수.”
“그래. 금기수.” 귀곡자의 탁한 눈동자가 반짝이며 이글거렸다. “사형이 먼저 손 내밀었다. 사제 간에 금기를 나눠주겠다고 속삭였다. 나는 받아들였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주지 않았을까. 금검술보를 내게 건네는 대신, 제자를 들여서 모든 걸 쏟아부었다. 나는 그 옆에서 사형의 그림자로 늙어가는 신세였다.”
하진혁의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갔다. 왼손 약지의 옥 가락지가 희미하게 떨렸다.
“금기에 손을 댄 건 스승이었다.”
“그래. 네 사문이 불탄 것도, 위조 비급이 강호를 휩쓴 것도. 전부 거기서 시작이다.”
귀곡자가 상체를 비틀며 허리춤에서 사람 뼈로 만든 작은 피리를 꺼냈다.
“사형이 알아줬다면 나는 진짜를 만들었을 거다. 보라. 모든 게 뒤집힌 위조에서만 내 이름이 살아났다. 이게 내 예술이다.”
하진혁이 품에서 스승의 일기를 꺼내 누렇게 바랜 마지막 장을 펼쳤다. ‘금기수를 전한 날, 사제의 눈빛이 달랐다. 이 또한 내 업이다.’ 손가락이 ‘사제’라는 글자에 닿았다.
이제 알았다. 스승이 남긴 ‘곡’ 자는 위조 비급의 창시자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붙인 낙인이었다. 제자를 키운 죄가 아니라, 사제에게 금기를 전한 날부터 이미 시작된 과오의 기록이었다.
일기를 접어 품에 넣었다.
“버림받은 게 분하다는 이유 하나로. 강호의 문파를 멸문시켰다.”
귀곡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탁한 눈동자에 처음으로 핏발이 섰다.
“멸문? 그깟 모방품에 속은 것들은 원래 그 정도 깨달음밖에 없는 쓰레기들이다.”
피리가 입술에 닿기 직전, 귀곡자의 손목이 안쪽으로 꺾였다. 피리 아랫부분에 숨겨진 침이 튀어나와 자신의 목줄기를 향했다. 공손려가 숨을 들이켰다.
하진혁이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왼손이 거문고 현 위로 올라갔다. 손가락 여섯 마디가 일곱 현을 스쳤다. 내공이 손끝에서 현으로 스며들자 동굴의 공기가 진동했다.
현 하나. ‘공(空)’ 음이 터졌다.
음파가 귀곡자의 손목을 덮쳤다. 침을 쥔 손이 경련하듯 펼쳐졌다. 피리가 바닥에 떨어져 두 동강 났다.
귀곡자가 비틀거리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하진혁이 두 번째 현을 튕겼다. ‘치(徵)’ 음이 귀곡자의 배꼽 아래 세 치 깊이로 파고들었다.
잔여 내공이 음파에 뒤섞여 역류했다.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내공이……”
“네 단전은 이제 텅 비었다.”
하진혁이 거문고에서 손을 떼며 일어섰다. 명원진이 귀곡자의 뒤로 돌아가 깨진 피리 조각을 발로 밀어냈다.
“자결조차 허락하지 않는 게 네 방식이냐.”
귀곡자의 목소리에서 연극조가 사라졌다. 앙상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하진혁은 대답하지 않고 검을 칼집에 꽂았다.
석굴 입구. 동이 트기 한 시진 전, 산바람에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명원진이 왼쪽 팔에 붕대를 감은 채 귀곡자를 결박한 세 겹 매듭을 확인했다.
“인근 화산파까지는 반나절 길이다. 인도 후 합류한다.”
하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곡자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공손려가 철선을 등에 지며 입을 열었다.
“마석준이 선풍객잔에서 한 말이 기억나요. 재능을 알아봐 준 분이라고. 아까 그 자백을 듣고 보니, 그 재능이라는 게 결국 똑같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었단 생각이 들어요. 내 동문도, 저 자도. 전부 버림받았다는 독으로 스스로를 갉아먹은 거죠.”
하진혁이 등을 돌렸다. 동쪽 하늘이 서서히 붉어지고 있었다.
“스승도 다르지 않았다. 금기를 전한 것조차 그 독에서 시작됐을지 모른다.”
공손려가 고개를 들었다.
“환영곡에 답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음이 되는 것.”
하진혁이 왼손 약지의 옥 가락지를 만졌다. 스승이 마지막 환영에서 남긴 한마디였다. 품 안의 일기에도 없었고, 금검술보에도 없었다. 오직 기억 속에서만 울리는 음성이었다.
“스승이 그 의미를 온전히 깨달았다면 사제에게 금기를 전하지 않았을 거다. 그 과오의 끝을 확인해야 한다.”
명원진이 귀곡자를 일으켜 세우며 사모도를 고쳐 메었다.
“내 손에 피가 마르지 않았어도, 그 끝을 보는 일은 함께하겠다.”
공손려가 철선을 품에 안듯이 고쳐 쥐며 걸음을 뗐다.
“셋이 함께 가요. 비극의 씨앗이 시작된 곳으로.”
바람이 세 사람의 옷깃을 동시에 쓸었다. 하진혁이 옥 가락지를 한 번 더 만졌다. 손끝에 전해지는 작은 떨림. 스승이 마지막으로 전한 그 말을 몸으로 이해할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동쪽 산등성이 너머로 첫 햇살이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