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

10화

아침 햇살이 약제실 창문을 비스듬히 갈랐다.

비비안은 책상 위 낡은 약초 도감을 손끝으로 짚었다. 77페이지. 은루나 결정체 사진 옆에 희미한 연필 글씨가 남아 있었다.

태양이끼. 금지 구역 계곡. 검은이끼풀 서식지와 공존.

"밤새 잠은 주무셨소?"

마커스가 약초 냄새 밴 가운 차림으로 다가왔다. 손에는 김이 나는 차 두 잔. 비비안은 고개를 저었다.

"자료 검토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 부분 좀 봐주시겠어요."

마커스가 도감 너머로 목을 길게 빼고 들여다봤다. 실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아, 태양이끼. 선대 스승님께서 마지막으로 채집 기록을 남기신 약초지."

"여기 표기된 서식지는 현재도 유효한 겁니까."

"아마도요. 30년 전과 기후가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까."

비비안이 도감을 덮으며 마커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금지 구역 출입 허가를 요청드립니다."

마커스의 미소가 반 박자 늦게 사라졌다.

"로즈우드 영애. 금지 구역은 장난이 아니오."

"압니다."

"약제사 권한 없이 들어갔다간 체포되는 정도가 아니오. 그곳엔——"

"독초 연구 금지법에 묶여 지난 30년간 아무도 손대지 못한 구역. 그리고 현재 성수의 생사가 그 구역 안에 있는 천적 식물에 달려 있다는 것도 압니다."

마커스가 차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도자기 잔이 살짝 부딪혔다.

"그걸 혼자 가시겠다?"

"전하께서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니——"

비비안이 도감을 품에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권한으로 갈 수밖에요."

마커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약초 쓴내가 밴 손가락으로 서랍을 열어 노란 양피지를 꺼냈다.

"이미 준비해뒀소."

"……네?"

"어젯밤 전하께서 집무실을 떠나신 뒤 혼자 남으셨단 소릴 들었소. 그때부터 각오했어요."

양피지를 책상 위로 밀었다. 약제사 임시 권한 위임장. 서명란에 마커스의 이름.

비비안이 숨을 들이켰다.

"웰튼 경."

"단, 조건이 하나 있소."

마커스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실눈 사이 회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셀레나 하워드의 개인 온실을 먼저 조사할 것. 그 여자의 별채보다도 더 깊숙한 곳에 있소이다. 은루나 재배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요."

비비안의 눈썹이 올라갔다.

"하워드 영애의 온실 위치를 어떻게——"

"3년간 몰래 흙 시료를 채취해 온 사람입니다. 하워드 가문이 왕실 온실 후원금을 내기 시작한 날부터 쭉."

비비안이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종이의 마른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셀레나의 개인 온실. 거기서 찾으면 된다.

"가겠습니다. 지금 당장."

마커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행운을 비오, 로즈우드 영애.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

"무슨 일 있어도 온실 안에서 허투루 숨 들이쉬지 마시오. 은루나는 건조 상태에서도 포자 독성이 남아 있으니까."

비비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손에 쥔 위임장이 바스락거렸다.

돌아서서 약제실 문을 나서는 순간, 뒤에서 마커스의 낮은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전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아마 날 죽이려 들 거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 제가 막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셀레나 하워드의 개인 온실은 왕실 정원 서쪽 담장 너머에 숨어 있었다. 덩굴 장미가 벽면을 뒤덮은 오래된 유리 건물. 일반 귀족의 온실로 위장돼 있었지만, 비비안은 들어서자마자 이질감을 느꼈다.

습도가 너무 낮다. 일반 관상용 온실의 40퍼센트 수준.

가지치기 가위를 허리춤 파우치에서 뽑아 들었다. 입구에서 세 걸음 안쪽, 바닥 타일의 배수구 방향이 보통 온실과 반대로 기울어져 있었다.

관수 시스템을 역으로 설계한 거야. 물을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특정 구역으로만 모으는 구조.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온실 한가운데쯤 이르렀을 때였다.

코끝을 스치는 씁쓸한 향.

비비안의 손이 멈췄다.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은루나다.

냄새의 원천은 구석에 놓인 건조대. 대나무 발로 가려진 선반 위에 작은 유리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뚜껑 하나를 열자 건조된 잎사귀 조각이 드러났다. 은빛을 띤 회색.

건조 상태인데도 향이 이렇게 진하다. 정제 수준이 상당해.

심장이 두근거렸다.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파우치를 더듬어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마커스에게 받은 샘플 보관용 면포. 은루나 건조 잔여물을 조금 떠서 싸는 순간——

코를 찌르는 향.

그리고 뇌리를 스치는 기억.

사교계 연회. 선홍색 실크 드레스. 황금 관.

셀레나 하워드가 손에 쥐고 있던 자수 손수건.

바로 이 향이었어.

비비안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면포를 파우치에 넣었다. 건조대 아래쪽 서랍을 열자 두꺼운 장부가 나왔다. 가죽 표지에 금박으로 '재배 일지'라고 찍혀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빼곡한 필체가 드러났다.

3년 전 4월. 은루나 종자 파종. 관수 시스템 연결 완료.

2년 전 9월. 뿌리 수지 첫 채취. 순도 87퍼센트.

올해 3월. 성수 뿌리 주변 결정체 석출량 증가. 목표치 도달.

비비안의 숨이 멎었다.

성수 뿌리 주변. 결정체. 이건——

"그걸 왜 네가 읽고 있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우아했지만 얼음장 같았다.

비비안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입구에 셀레나 하워드가 서 있었다. 선홍색 머리를 평소처럼 높게 틀어 올렸지만, 손에는 향수병 대신 작은 유리병을 쥐고 있었다. 짙은 보랏빛 액체가 담긴 병.

셀레나의 푸른 눈이 건조대 위쪽을 훑었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로즈우드 영애께서 남의 온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드시는군요. 가문의 격이 이렇게까지 떨어지셨습니까."

"이쪽이 물을 차례인 것 같은데요, 하워드 영애."

비비안이 일지를 가슴 쪽으로 당기며 물러섰다. 유리병을 든 셀레나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3년 전부터 성수에 은루나 뿌리 수지를 주입했다. 정기적으로. 관수 시스템을 통해. 전부 여기 기록돼 있습니다."

셀레나의 미소가 굳어졌다.

"그게 증거가 될 거라 생각해?"

"손수건에서 나는 향도 마찬가지고요."

비비안이 한 걸음 더 물러섰다. 등 뒤로 작업대가 닿았다.

"은루나 정제 향을 매일 휴대하셨죠. 사교계 연회 때도, 평의회 때도. 그게 취미였다면 설명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셀레나가 한 걸음 다가왔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네까짓 게 감히——"

말투가 갈라졌다. 우아하던 존댓말이 순간 거칠어졌다.

"내가 얼마나 오래 준비했는지 알아? 3년이야. 에단 왕세자가 감히 계약 운운하기 1년 반 전부터야."

유리병을 들어 올렸다. 보랏빛 액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이제 와서, 몰락 가문 출신 따위가——"

"그 따위가 성수의 뿌리에서 당신의 은루나 결정체를 채취했습니다."

비비안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체온에 반응해 푸른 인광을 띠더군요. 흥미로운 성질이에요. 마커스 경의 고대 약초 도감 77페이지에 정확히 같은 현상이 기록돼 있었습니다."

셀레나의 눈이 커졌다. 푸른 눈동자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마커스 웰튼? 그 미친 약제사가——"

"당신의 손수건 향과 은루나는 동일 물질입니다. 오늘 확보한 이 건조 잔여물과도 일치하고요."

비비안이 파우치에서 면포를 꺼내 보였다.

"실험용 새 부검 기록도 거래 장부에 있더군요. 독성 검증 용도였겠죠. 이걸 평의회에 제출하면——"

"집어치워!"

셀레나가 팔을 휘둘렀다. 유리병 뚜껑이 튕겨 나가며 보랏빛 액체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타일이 닿자마자 지글거리는 소리. 연무가 피어올랐다.

비비안이 재빨리 소매로 코를 가렸다. 숨을 멈췄다.

미친. 이건 휘발성——

관자놀이에 날카로운 통증이 스몄다. 교정력이었다.

이 순간에——

다리가 휘청였다. 작업대 모서리를 붙잡았다. 시야가 일렁였다.

셀레나가 비웃으며 손을 뻗었다. 일지를 낚아채려는 순간——

"비비안!"

온실 입구가 박살 났다. 유리 파편이 쏟아졌다. 검은 제복 형상이 연무 속을 뚫고 달려들었다.

에단이었다.

"물러서."

짧은 명령과 함께 에단이 비비안 앞을 가로막았다. 오른손이 뒷주머니를 향했다. 셀레나가 병을 다시 휘둘렀다.

"뛰어들 줄 알았어, 전하!"

유리병이 에단의 발치에 떨어졌다. 깨지는 순간 보랏빛 액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셀레나가 뒤돌아 내달렸다. 선반을 걷어차자 약병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램프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쾅.

불길이 일었다.

은루나 건조 잔여물에 옮겨붙은 불은 순식간에 천장까지 치솟았다. 유독 연기가 공기를 채웠다.

에단이 비비안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움직여."

"일지를——"

"지금이 아니야!"

에단이 비비안을 번쩍 안아 올렸다. 왼팔로 허리를 감싸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슴 쪽으로 눌렀다. 비비안의 손에는 장부와 면포가 쥐여 있었다. 에단이 달리기 시작했다. 불길이 선반을 집어삼키고 건조대를 무너뜨리는 소리가 등 뒤로 밀려왔다.

비비안이 고개를 돌리려 하자 에단의 팔이 더 단단히 조여 왔다.

"숨 들이쉬지 마."

무너지는 유리벽을 어깨로 뚫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찬 공기가 폐부를 때렸다. 잔디밭에 구르며 에단이 비비안을 감싸 안았다. 제복 소매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른손 손등에 붉은 화상 자국이 번지고 있었다.

"전하——"

"조용히."

에단이 비비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황금색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숨이 거칠었다.

"어디 다쳤어."

"……아닙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교정력 두통은 미약한 맥박처럼 남아 관자놀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에단의 손이 그녀의 팔을 훑었다. 왼쪽 팔꿈치에 찰과상이 보이자 미간이 좁아졌다.

"왜, 혼자——"

목소리가 끊겼다. 에단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마커스의 서명이 찍힌 노란 양피지가 비비안의 파우치에서 삐져나와 있었다.

"……웰튼이."

짧은 한마디 속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몄다. 분노. 두려움. 그리고 안도.

비비안이 일지를 가슴에 안았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증거는 확보했습니다. 셀레나 하워드의 3년간 은루나 재배 기록. 새 부검 실험 데이터. 관수 시스템 연결 내역까지 전부——"

"네가."

에단이 말을 잘랐다. 손은 여전히 비비안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러다 죽을 뻔했어."

"죽지 않았습니다."

"이걸로 몇 번째야."

비비안이 대답하지 못했다. 에단의 손등 화상이 눈에 들어왔다. 붉게 부풀어 오른 살갗이 제복 소매에 닿을 때마다 그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다가 멈췄다.

계약 범위를 벗어난 행동이다.

그 순간 에단이 손을 거두었다. 대신 자신의 망토를 벗어 비비안의 어깨에 둘렀다. 검은 천에서 그의 체온이 스며들었다.

"더 이상——"

에단이 말을 멈췄다. 목울대가 움직였다.

"계약 때문이 아니다."

비비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망토 속에서 손가락이 일지 끈을 움켜쥐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은."

에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상당한 오른손을 등 뒤로 감추며 경비대를 향해 손짓했다.

"우선 온실 화재 진압과 셀레나 추적이 먼저다."

"전하."

"내 말은——"

다시 한 번 말이 끊겼다. 에단이 비비안을 내려다봤다. 아침 햇살 아래 황금색 눈동자가 유난히 깊게 빛났다.

"……끝난 뒤에."

그 말을 끝으로 에단이 돌아섰다. 경비대장이 달려오며 외쳤다.

"전하! 온실 뒷문으로 여인이 한 명 뛰쳐나갔습니다! 손에 작은 병을——"

"쫓아라. 전원 배치해."

에단의 목소리가 다시 냉철하게 가라앉았다.

"셀레나 하워드는 왕실 전복 및 성수 독살 혐의로 수배한다. 생포가 원칙이나 저항 시——"

잠시 뜸을 들였다.

"제압을 허가한다."

경비대가 흩어졌다. 비비안은 망토를 여민 채 벤치에 앉아 있었다. 두통은 여전히 맥박처럼 뛰었지만, 손에 쥔 일지의 무게가 그것을 상쇄시켰다. 파우치 속 은루나 건조 잔여물이 작게 바스락거렸다.

셀레나의 손수건 향기. 3년간의 기록. 성수 뿌리 결정체.

이제 증거는 충분하다.

에단이 벤치 쪽으로 걸어왔다.

"괜찮으면 약제실로 가라. 마커스가 상처를 봐줄 거다."

"전하께서는요."

에단이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붉게 부어오른 화상 자국이 망토 밖으로 드러났다.

"지휘가 끝나면 따라가겠다."

그 말에 담긴 미묘한 무게를 비비안은 놓치지 않았다. 지휘가 끝나면. 끝난 뒤에.

"……알겠습니다."

비비안이 벤치에서 일어섰다. 망토 자락이 발목에 닿았다. 그때였다.

경비대원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숨을 헐떡이며 에단에게 보고했다.

"전하! 금지 구역 쪽 담장 너머로 셀레나 하워드로 추정되는 인물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단이 뛰기 시작했다. 외마디 명령이 허공에 남았다.

"성수부터 막아라. 지금 당장!"

비비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관자놀이의 통증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금지 구역. 성수를 영원히 잠들게 할——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교정력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었다. 비비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늦지 마.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