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

11화

비비안이 벤치에서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관자놀이를 찌르는 통증이 발목을 붙잡았다. 손가락 끝이 저릿했다. 망토 자락을 움켜쥐었지만 다리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또야. 지금 이 순간에.

심호흡을 두 번 했다. 교정력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원작의 흐름을 바꿨기 때문이다. 이 날 셀레나가 성수를 완전히 고사시키는 게—— 본래 결말이었다.

아니. 비비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원작은 상관없어. 지금 내가 바꾸고 있는 건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

파우치 속 은루나 건조물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차가운 유리병 감촉이 정신을 붙들었다. 한 걸음 내디뎠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비비안 로즈우드.”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커스 웰튼이었다. 약제실 가운 차림에, 손에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쥐고 있었다.

“그 다리 상태로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금지 구역이에요. 셀레나가 성수 쪽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커스가 느릿하게 곁으로 걸어왔다. 실눈이 평소보다 좁아져 있었다.

“전하께서 벌써 달려가셨고요. 경비대도 배치됐습니다. 영애께서 지금 하셔야 할 일은——”

“거기 없어요.”

비비안이 똑바로 바라봤다. 짙은 녹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전하께서는 은루나 독초의 결정화 속도를 모르십니다. 흙에 스며든 뒤 3분 안에 뿌리까지 도달해요. 해독제는 저만 현장에서 조제할 수 있고요.”

마커스의 눈가가 접혔다.

“……역시 독초 도감을 통째로 외우셨군요.”

들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비비안에게 내밀었다.

“응급 해독 키트입니다. 태양이끼 포자는 없지만, 일차 중화제와 추출 도구가 들어 있어요. 제 허락 없이 쓰신 걸로 하시고.”

비비안이 주머니를 받아 쥐었다. 묵직하게 손목에 감겼다.

“감사합니다, 마커스 경.”

“감사는 나중에. 지금 가시면——”

마커스가 고개를 금지 구역 쪽으로 기울였다.

“전하께서 화내실 시간도 줄여 드리겠죠.”

금지 구역 담장은 생각보다 낡아 있었다.

왕실 온실 깊숙이 자리한 이곳은 수십 년째 일반인의 출입이 막힌 공간이었다. 선대 왕이 독초 연구를 금지한 이후, 담장 너머에는 오직 깨끗한 기도로 보살펴진 식물들만 남아 있었다.

비비안은 담장 옆 덤불 사이로 몸을 숙였다. 심장이 귀청을 때렸다. 두통은 여전했지만 다리는 움직였다. 파우치 속 은루나 샘플이 바스락거렸다.

그때였다.

금속 마개가 돌아가는 소리. 작고 날카로운—— 독사의 혀가 스치듯 날렵한 음.

숨이 멎었다.

덤불을 헤치고 시선을 돌렸다. 담장 바로 아래, 성수의 가장 굵은 뿌리가 땅 밖으로 드러난 곳. 셀레나 하워드가 웅크리고 있었다.

선홍색 머리칼이 달빛 아래 흩어져 있었다. 황금 관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손에는 작은 유리병 하나. 병의 마개가 열려 있었다.

늦었어.

비비안이 덤불을 뚫고 뛰쳐나갔다.

“멈춰요, 셀레나!”

셀레나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푸른 눈동자가 이쪽을 포착했다. 입가에 번진 미소는 온실 화재 때보다 더 차가웠다.

“로즈우드 영애. 이런 밤중에 어인 일로.”

손을 내밀었다. 병이 조금 더 기울었다.

“그 병을 내려놓으세요.”

“이거요?”

셀레나가 병을 들어 올렸다. 안에 든 액체가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다.

“3년 동안 공을 들였어요, 이 은루나 정제액 하나에. 하워드 별채에서 처음 씨앗을 심을 때부터 얼마나 많은 새들이 우리에 갇혔는지 아십니까.”

비비안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관수로에 흘려보낸 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군요. 성수가 생각보다 질겼어요. 하지만 직접 뿌리에 부으면——”

“그건 성수를 죽이는 게 아니에요.”

비비안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힘을 실었다.

“성수는 정성으로 보살펴진 식물의 생명력으로만 회복됩니다. 지금 하려는 건 독살이에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셀레나의 미소가 굳어졌다.

“식물학 지식이 대단하시군요. 하지만 그 지식이 지금 여기서 무슨 소용이죠.”

손목이 움직였다. 병이 성수 뿌리 쪽으로 던져졌다.

비비안이 몸을 날렸다.

유리병이 허공에서 빙글 돌았다. 손가락 끝에 걸렸다—— 아니, 비껴갔다. 병이 흙 위에 떨어지며 뚜껑이 열렸다. 은빛 액체가 검은 흙 위로 쏟아졌다.

“안 돼!”

흙이 지글거렸다. 은빛 액체가 스며든 자리에서 작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금방이라도 결정화될 기세였다.

셀레나가 웃었다.

“늦었어요, 로즈우드 영애.”

그 순간이었다.

“물러서라.”

쇠붙이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덤불을 가르고 나타났다. 에단이었다. 뒤로 경비대가 번개처럼 흩어졌다.

에단의 황금빛 눈동자가 먼저 비비안을 훑었다. 그다음 흙 위의 병을. 마지막으로 셀레나를 향했다. 단 세 번의 시선 이동이 전부였다.

“셀레나 하워드.”

오른손이 셀레나의 팔을 낚아챘다.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왕실 전복 및 성수 독살 혐의로 체포한다.”

경비대원 둘이 달려와 셀레나의 양팔을 포박했다. 입술이 떨렸다.

“전하, 이건——”

“이후 진술은 형사법관 앞에서 하라.”

에단이 몸을 돌려 비비안에게 다가갔다. 망토 자락이 바람에 날렸다.

“다친 데 없소.”

의문문이 아니었다.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단의 어깨에서 미세한 긴장이 풀렸다.

비비안은 오염된 흙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은루나 정제액이에요. 지금 흙 속에서 결정화되고 있어요. 시간이——”

“얼마나.”

“3분 남짓.”

비비안은 이미 마커스에게 받은 주머니를 열고 있었다. 손가락이 바빠졌다. 작은 유리 스포이트, 중화제 병, 미세 분쇄용 막자사발. 하나씩 꺼내 흙 위에 늘어놓았다.

은루나 결정체의 독성 사슬. 이황화결합을 끊으려면——

낡은 약초 도감을 펼쳤다. 마커스에게 받은 그 책. 77페이지. 손끝이 익숙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찾았다.”

“태양이끼. 은루나 천적 식물. 포자 속 효소가 이황화결합을 선택적으로 분해해. pH 5.2 이하의 산성 환경에서 활성이 극대화되고—— 여기. 금지 구역 안 습한 바위면에 자생한다고 적혀 있어.”

고개를 들었다. 성수 주변을 훑었다. 달빛이 드리운 낡은 석축. 그 아래 습기가 밴 바위 틈새. 금빛을 띤 작은 이끼 군락이 보였다.

“저기.”

일어서려 했다. 다리가 다시 후들거렸다. 에단의 손이 팔꿈치를 받쳤다.

“위치를 말해.”

“하지만 채취 방법을——”

“위치만 말해.”

에단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황금빛 눈동자가 똑바로 응시했다.

“조제를 준비하시오. 나머지는 내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바위 틈, 석축 왼쪽 아래. 금빛이 도는 이끼요. 뿌리째 뽑지 말고 잎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움직였다. 오른손에 단검을 쥔 채 바위 앞에 앉았다. 칼끝으로 이끼를 정교하게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막자사발에 중화제를 따랐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실수는 없었다.

30초. 에단이 돌아왔다. 손바닥 위에 태양이끼 잎사귀가 여러 겹 올려져 있었다.

“충분합니까.”

“네.”

이끼를 막자사발에 넣고 막자로 빻았다. 손목을 빠르게 움직였다. 즙액이 우러나자 중화제와 섞었다. 유리 스포이트로 빨아들여 오염된 흙 위에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지글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은빛으로 빛나던 흙의 입자들이 하나둘 검은색으로 변했다. 희미하게 타는 듯한 냄새가 사라졌다. 축축한 흙 내음이 올라왔다. 산성이 약간 강한—— 그러나 건강한 흙의 냄새.

스포이트를 쥔 손이 떨렸다.

“늦지 않았어요. 오염이 뿌리까지 닿기 전에 막았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흙이 무릎에 닿았다. 차가웠다.

살았다.

에단이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오른손이 흙 위의 검은 입자들을 만졌다.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가루를 집어 들었다.

“이게 중화된——”

“네. 은루나 뿌리 수지의 이황화결합이 완전히 끊어졌어요. 이제 독성이 없어요.”

약초 도감을 가리켰다. 그제야 깨달았다. 손끝이 아직 떨리고 있었다.

“앞선 사건에서 처음 채취했던 은빛 가루와 동일한 결정체예요. 그때도 은루나였어요. 태양이끼 해독제를 뿌리니 검은색으로 변하는 걸 보니—— 성수 독살이 3년 전부터 이 은루나 추출물로 이뤄졌다는 게 증명된 거예요.”

에단이 얼굴을 바라봤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이 열렸다. 바로 그때 경비대장이 다가왔다.

“전하. 셀레나 하워드의 소지품에서 추가 독초 병 두 개와 거래 장부 한 권을 확보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경비대장이 양피지 묶음을 내밀었다.

“은루나 정제 거래가 최소 8가문 이상 연루된 것으로 보입니다.”

에단이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의 흙을 털지 않았다. 손이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장부를 넘기는 손끝이 경직되어 있었다. 몇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끝이다.”

셀레나가 포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선홍색 머리칼이 어깨 위로 흘러 얼굴을 반쯤 가렸다. 경비대원들이 일으켜 세우려 하자, 고개를 들어 비비안을 똑바로 바라봤다.

푸른 눈동자가 불타고 있었다. 더 이상 우아한 미소는 없었다.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로즈우드 영애.”

칼날 같은 존댓말이었다. 쉰 목소리가 바람에 실렸다.

“그 성수는 언젠가 반드시 죽을 거예요.”

경비대원이 팔을 잡아당겼다.

“내가 아니더라도—— 뿌리가 이미 썩고 있어요. 3년 동안 스며든 은루나가 성수 깊은 곳에 자리 잡았어요.”

비비안이 흙 위에서 일어섰다. 두통은 여전했지만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뿌리가 썩었다고요.”

“네.”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표면의 독을 아무리 중화해도, 심부에 스며든 독은——”

“은루나 뿌리 수지의 심부 잔류 독성.”

비비안의 목소리가 셀레나의 말을 차분히 잘랐다. 짙은 녹색 눈빛이 가라앉았다.

“알고 있어요. 그걸 해결할 방법도.”

셀레나의 미소가 굳었다.

“이 금지 구역 안에는 오직 순결한 보호 아래 자란 식물들만 살아 있어요. 그중 하나인—— 별빛 이슬풀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비비안이 한 걸음 다가갔다. 파우치를 열었다. 은루나 건조 잔여물 샘플 유리병을 꺼내 경비대장에게 건넸다.

“심부 독성까지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약초예요. 선대 왕께서 독초 연구를 금지하신 진짜 이유이기도 하고요. 금지 구역을 남겨둔 건 이 약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기록이 있어요.”

셀레나의 얼굴에서 마지막 웃음기마저 사라졌다. 경비대원들이 양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셀레나 하워드.”

에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황금빛 눈동자가 셀레나의 푸른 눈을 내려다봤다.

“너는 오늘부로 귀족 직위가 박탈된다. 하워드 가문의 영지는 왕실에 귀속되며, 은루나 거래에 연루된 모든 가문은 평의회 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무릎 꿇은 상대를 향해 낮게 가라앉혔다.

“네가 3년간 성수를 향해 부은 것보다 더 많은 생명이 이 땅에 뿌리내릴 것이다.”

셀레나가 대답하려 입을 열었지만, 에단이 손을 들어 올렸다.

“이상. 연행하라.”

경비대원들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끌려가면서 마지막으로 비비안을 돌아봤다.

“당신은——”

말이 끝나지 않았다. 경비대원이 입을 막지도 않았다. 셀레나는 스스로 침묵했다. 그리고 끌려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금지 구역 담장 아래, 성수 뿌리 곁에 비비안과 에단만 남았다.

달빛이 고요했다. 중화된 흙 위로 새순 하나가 돋아 있었다. 아직 연약한, 연둣빛 싹.

비비안이 흙에 주저앉아 그 새순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을 뻗었다가 멈췄다. 만지면 안 될 것 같았다.

살아 있구나.

에단이 옆에 앉았다. 망토를 벗어 어깨에 덧씌웠다. 망토 안쪽의 비단 문양, 눈먼 독수리가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오늘 밤 성수를 구했어요.”

대사처럼 정제된 말투였지만, 끝이 조금 떨려 있었다.

“그걸 기억하시오.”

“전하.”

“끝난 뒤에.”

성수 뿌리에서 돋아난 새순을 가리켰다. 왼손은 여전히 흙투성이였다. 오른손으로 그 왼손을 덮으며 덧붙였다.

“끝난 뒤에. 지금은 기억해 주시오.”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망토 자락을 움켜쥐었다. 눈앞의 새순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끝난 뒤에.

에단은 성수 아래에서 홀로 남은 비비안을 마주했다. 모든 소란이 지나간 금지 구역 입구. 고요해진 대온실 깊은 곳에서, 더 이상 계약이라는 굴레에 묶이지 않은 채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비안 로즈우드.”

부드러웠다. 이전의 어떤 호칭보다도 조심스러운 음절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왕세자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당신께 전하는 진심이오.”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