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

2화

왕실 알현실은 이미 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리석 기둥마다 걸린 왕실 문장 아래로 각 가문의 대표들이 모여 있었고, 수도 체류 귀족 전원이 참석했다. 비비안이 들어서자 모든 시선이 꽂혔다. 그녀는 로즈우드 가문의 문장이 수놓아진 진청색 드레스를 입고 어깨를 곧게 편 채 걸었다. 중앙 단상 앞의 에단은 검은 예복에 왕세자 휘장을 고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고, 둘의 시선이 짧게 마주치자 그가 턱을 살짝 끄덕였다.

왕실 공보관이 단상에 올랐다. “본 공표를 통해, 크로포드 왕세자 전하와 로즈우드 백작가의 비비안 영애 간 계약 약혼이 체결되었음을 알립니다. 계약 조건은 성수 회복이며, 완전 회복 시 계약 해지와 함께 로즈우드 백작가령이 반환됩니다.”

공보관이 양피지를 치우기도 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셀레나 하워드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선홍색 생머리를 황금 관으로 틀어 올리고 진홍색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손에 작은 향수병을 쥔 채 귀족들 사이를 가르며 중앙으로 향했다.

“왕세자 전하의 배필로 말씀드리기엔, 그 가문의 현 상태를 다시 한 번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즈우드 백작가라면 현재 영지도 없는 몰락 가문이 아니십니까. 재정 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요.”

비비안은 대답하지 않고 에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셀레나 후작. 이 계약은 혼인이 아니라 성수 회복을 위한 조치다.”

“그럼 더더욱 이해할 수 없군요. 왕실 대온실에는 삼 대째 성수를 관리해온 약제사들이 있습니다. 왜 하필……”

“그 약제사들이 성수의 원인조차 진단하지 못했다.” 에단이 말을 잘랐다. 황금색 눈동자가 셀레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로즈우드 영애는 성수를 살릴 유일한 인물이다.”

셀레나의 손에 쥐어진 향수병이 살짝 기울었다. “유일하다고 단언하실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감히 여쭙니다.”

“내가 인정했다.” 짧은 한 마디가 알현실을 침묵시켰다. 에단은 이미 시선을 거둔 채였다. “이상 논의는 끝이다.”

그가 비비안에게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비비안이 그 손을 잡자 차가운 가죽 너머로 단단한 손가락이 느껴졌다. 셀레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입술이 바르르 떨렸지만, 이내 더 차가운 형태로 미소가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그녀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그 짧은 순간 푸른 눈동자가 비비안을 스치며 날을 세웠다.

“축하드립니다, 로즈우드 영애.” 존댓말이었지만 끝 음절이 칼날 같았다. 셀레나는 뒤돌아섰고, 구두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며 알현실 문을 향해 멀어졌다.

에단이 비비안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따르라.” 알현실 측면 복도를 지나자 귀족들의 웅성임이 멀어졌다. “셀레나 후작은 저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으로 간주하는 듯하군요.” 비비안이 손을 빼내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을 거다. 그 여자가 성수 회복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

“증거가 있으십니까.” 비비안이 그의 측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에단이 잠시 침묵했다. 복도 끝 대온실 유리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확신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비비안은 한숨을 삼켰다.

대온실 문이 열리자 습한 열기와 흙내가 밀려들었다. 성수는 어젯밤 응급 처치 덕분에 잎이 더 말라붙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시든 상태였다. 비비안은 주변을 둘러봤다. 한밤중 발자국은 이미 말라 흔적이 희미해져 있었다.

“어젯밤에 여기 온 적이 있느냐.” 에단이 성수 앞에 서서 물었다. 비비안은 파우치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며 대답했다. “한밤중에요. 잠이 오지 않아서 다시 확인하러 왔습니다.”

“혼자였느냐.”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비비안이 무릎을 굽혀 성수 북쪽 뿌리 근처를 가리켰다. “누군가 저보다 먼저 와 있었습니다. 바닥에 젖은 발자국이 있었고, 이것도요.”

그녀의 손끝이 흙 위의 은빛 가루를 가리켰다. 어젯밤보다 더 안쪽, 뿌리에 더 가까운 위치였다. 에단의 턱 선이 굳어졌다. “어제 낮에 채취한 것과 같느냐.”

“육안으로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비비안은 손끝으로 은빛 가루를 살짝 찍어 코 가까이 가져갔다. 씁쓸하면서도 날카로운 금속성 향이 올라왔다. “이건 자연적으로 생성된 곰팡이 포자가 아니에요. 포자라면 유기물 분해 냄새가 나야 하는데, 이건 금속 희석물 특유의 자극성 향이에요. 누군가 이걸 인위적으로 정제했어. 성수 관수용으로 희석한 거라고 볼 수밖에 없어.” 말투가 완전히 바뀌어 반말로 빠르게 읊조리는 비비안을 에단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은루나인가.” 비비안이 고개를 들었다. “전하께서는 그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 순간 대온실 유리문 밖으로 근위 기사가 급히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전하. 약제실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마커스 경께서 성분 분석 의뢰 건으로 긴급히 뵙고 싶다고 합니다.” 비비안이 손끝의 은빛 가루를 유리병에 조심히 털어 담고 코르크로 막아 손바닥 안에 쥐었다. “마커스 약제사님께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에단이 근위 기사를 돌아보며 지시했다. “지금부터 대온실 출입을 통제하라. 약제사들도 내 허락 없이는 들이지 마라. 비비안 영애와 약제사 마커스만 예외다.” 근위 기사가 경례하고 물러났다.

에단이 다시 비비안을 향했다. “네 질문에 대답할 시간이다.”

“은루나를 어떻게 아셨느냐는 질문 말입니까.” “그 질문부터.” 에단이 대온실 한쪽 작업대에 손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나무 표면을 천천히 두드렸다. “사흘 전, 근위 기사 중 한 명이 별관 구역 순찰 중 의심스러운 약병을 발견했다.”

“내용물은 무엇이었습니까.” “은빛 액체였다. 분석을 의뢰했지만 약병은 그날 밤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약병을 발견한 기사는 다음 날 전출 명령을 받았다. 본인이 자원했다더군.”

비비안의 눈이 커졌다. 손에 쥔 유리병이 차갑게 식은 듯 무거웠다. “그게 당신이 아까 하신 말씀의 의미군요.

성수 회복을 바라지 않는 자가 따로 있다.” 에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댈 수는 없다. 확신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 증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비비안이 유리병을 들어 올렸다. 은빛 가루가 병 안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범인은 성수 곁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습니다. 어젯밤 제가 목격한 발자국이 증명합니다.”

“그래서 마커스를 부른 거다.” 에단이 작업대에서 손을 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성분 분석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너는 어떤 추측도 확정하지 마라. 추측만으로 움직이면 상대가 먼저 움직인다.”

비비안은 유리병을 파우치 안에 조심히 넣고 고개를 들었다. “전하께서 감시를 붙이신 이유를 이제 알겠습니다.” “보호와 감시다.” “아닙니다. 저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여기에 저 혼자 남겨두면 제가 범인의 다음 목표가 될 거라고 예상하셨군요.” 에단이 대답하지 않고 대온실 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마커스가 도착하기 전에 저 발자국 흔적을 기록해둬라. 젖은 상태에서 찍혔으면 흙 성분이 달라졌을 거다.”

비비안이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알겠습니다, 전하.”

오후 늦게, 비비안은 왕실 약제실로 향했다. 파우치 안에는 은빛 가루가 든 유리병이 실려 있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노크하자 느릿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들어오시지요.”

마커스 웰튼은 절구를 빻다가 고개를 들며 싱긋 웃었다. “수행원 한 분은 문 밖에 두고 오셨군요.”

비비안은 유리병을 꺼내 작업대 위에 올렸다. “분석을 부탁드립니다.”

마커스는 병을 촛불 아래로 가져갔다. 회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 물건이로군요.

성수 주변에서 채취한 의심 물질이 올 거라고.” 그는 가루를 유리판에 옮기고 시약을 떨어뜨렸다. 첫 방울에 옅은 푸른빛, 두 번째엔 거품이 일었다. “은 계열 확실하군요. 상당히 정제된……”

“잠깐만요.” 비비안이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미세한 녹색 입자가 따로 뭉쳐 있었다. “유기 용매에 희석한 흔적이에요. 액체에 녹였다가 증발시킨 거죠.”

비비안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은 성분 자체는 문제가 아니에요. 관수용 물에 희석할 때 어떤 용매를 썼느냐가 관건이죠. 이 독초 계열은 천적 식물인 검은이끼풀과 접촉하면 비활성화돼요. 하지만 성수에 직접 적용하기엔 위험 부담이 커요.”

마커스가 흘낏 쳐다봤다.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손가락이 작업대 모서리를 쓸었다. “검은이끼풀이라…… 그걸 여기서 꺼내는 이름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데.”

“아시는 게 있으신 모양이군요.”

“글쎄요. 오래된 약제사라면 누구나 아는 정도.” 그는 유리병 마개를 닫아 밀어주고는 서랍을 한 뼘 열었다가, 생각을 바꾼 듯 깊숙이 밀어 넣었다. “검은이끼풀을 보시려면 전하의 허가가 필요할 겁니다. 그 온실은 폐쇄 구역이니까.”

“공식 요청하겠습니다.” 비비안은 유리병을 파우치에 넣었다. “도움 감사합니다, 웰튼 경.”

마커스는 이미 절구로 손을 돌리고 있었다. “감사는 나중에. 결과가 좋은 쪽으로 나오면 그때.”

저녁 식사 후, 별관 서재. 촛불이 책장을 어슴푸레 비추는 방에서 에단은 창가에 기대 서 있었다. 비비안은 정리한 메모를 손에 든 채 멈춰 섰다.

“약제실 분석 결과입니다.”

에단이 탁자를 가리켰다. “앉아라.”

비비안은 메모를 펼쳤다. “은 계열 금속 가루에 유기 용매로 희석한 흔적이 확인됐습니다. 관수 경로로 주입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해결책은 검은이끼풀입니다. 이 가루 계열의 천적 식물로, 접촉 시 독소 분산 구조를 차단해 비활성화시키죠. 다만 성수에 바로 적용하면 이식 충격이 우려됩니다.”

에단이 천천히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검은이끼풀 재배 온실은 폐쇄 구역이다.”

“알고 있습니다. 마커스 경에게 들었어요. 그래서 공식 허가를——”

“내일 내가 직접 안내하겠다.”

비비안이 고개를 들었다. 에단의 황금색 눈동자가 촛불 아래서 잠시 흔들렸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입술을 열려는 순간, 에단이 먼저 시선을 창문 쪽으로 돌리며 손가락으로 탁자 모서리를 한 번 두드렸다.

비비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모를 접어 파우치에 넣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하.”

일어나 인사했지만 에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을 돌린 채 창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비비안은 문을 닫고 빗장을 건 뒤에야 긴 숨을 내쉬었다. 탁자 위에 유리병을 꺼내 촛불을 가까이 당겼다. 은빛 가루가 불빛에 반짝이며 병 바닥에 고여 있었다.

그런데 한 알이 달랐다.

미세한 붉은 결정 하나가 자체 발광했다. 촛불보다 붉은 빛이 병 안에서 깜빡였다. 한 번. 다시 한 번. 그리고 사라졌다.

비비안은 숨을 멈췄다. 유리의 차가운 감촉만이 이것이 현실임을 증명했다. 은빛 가루 안에 섞여 있던 무언가. 살아서 반응했다.

촛불이 흔들렸다. 병 안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붉은 결정이 있던 자리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비비안은 천천히 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