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
3화
연구실의 아침은 쓸쓸했다. 유리 벽 너머로 이른 햇살이 쏟아졌지만, 작업대 위 분석서의 잉크 냄새만 공기를 가득 채웠다. 비비안은 전날 밤 붉은 결정을 목격한 유리병을 파우치 깊숙이 넣은 채 서 있었다. 에단은 이미 도착해 창가에 기대 섰고, 탁자 위에는 마커스의 인장이 찍힌 봉투가 놓여 있었다.
“밤새 분석한 모양이다.”
에단이 턱짓으로 봉투를 가리켰다. 비비안이 봉투를 열자 두 장의 양피지가 미끄러졌다. 위쪽은 은빛 가루의 성분표. 아래쪽은 마커스의 손글씨였다.
‘은루나. 3급 금지 독초. 포자 형태로 존재하며 수용성 유기 용매에 희석 시 무색무취. 은빛 잔여물이 유일한 흔적. 천적 식물은 검은이끼풀.’
비비안의 손가락이 성분표의 한 줄에서 멈췄다.
“포자벽 구조가…… 여기 보십시오.”
손끝이 가리킨 곳에 ‘미량의 2차 대사산물 검출 — 은루나 특유의 알칼로이드 계열’이라 적혀 있었다.
“자연 발생하는 곰팡이 포자가 아닙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정제해서——”
“알고 있다.”
에단이 말을 잘랐다. 황금색 눈동자가 분석서를 훑고 비비안에게로 향했다.
“문제는 누가, 어디서 정제했느냐다.”
비비안은 독초 분석 메모를 탁자 위에 펼쳤다. 은이나 유사 금속 계열을 다룰 가능성이 있는 온실 세 곳. 제3온실, 제7약초실, 구관 지하 배양실.
에단이 메모를 집어 들었다.
“구관 지하 배양실은 3년 전 폐쇄됐다.”
“폐쇄된 구역에 침입자가 드나든 흔적이 있다면.”
“그걸 확인하자는 거군.”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메모 위로 움직이며 글자들을 가리켰다.
“은루나 포자는 숙주 식물에 침투하면 72시간 안에 포자벽을 용해시킵니다. 하지만 검은이끼풀의 뿌리 삼출물에 닿으면 포자벽이 역으로 응고돼. 독소 분산 구조가 차단되는 거죠. 이식 충격만 제어하면 성수 뿌리에 직접 적용할 수 있어.”
에단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볼 뿐이었다.
“이식 충격 제어는 가능하냐.”
“……예. 단계적 희석과 온도 조절을 병행하면.”
“좋다. 네 말대로 검은이끼풀을 이용한 해독을 추진한다. 온실 목록은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오늘 중으로.”
바로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시종이 문 앞에서 숨을 고르며 허리를 숙였다.
“전하. 하워드 후작님께서 급히 뵙자고 하십니다. 지금 연구실 앞에——”
에단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비비안은 메모를 접어 파우치에 넣었다.
“들이게.”
시종이 물러나고 구두 소리가 연구실 바닥을 울렸다. 셀레나 하워드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진청색 실크 드레스에 은빛 브로치를 달고, 손에는 레이스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아침부터 두 분이 함께 계시다니, 감동적이군요.”
비비안을 향해 미소 지었다. 올려다보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입가의 각도는 칼날 같았다.
“합동 조사라도 진행 중이신지.”
에단이 탁자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용건이 뭐지.”
“소문을 들었습니다. 로즈우드 영애께서 독초 관련 서적을 열람하셨다고. 선대 왕께서 금지하신 학문입니다. 아무리 전하의 약혼자라 해도——”
“분석을 위한 참고였을 뿐이다.”
셀레나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다만 의회 일부 의원분들께서 우려를 표하셨어요. 왕실의 금지령이 계약 약혼을 이유로 완화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비비안이 입을 열었다.
“하워드 후작님. 제 연구는 성수 회복을 위한——”
“회복을 빙자한 독초 연구일 가능성을 누가 배제할 수 있을까요.”
셀레나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손수건을 쥔 손가락이 살짝 굽어졌다.
“위원회 소집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로즈우드 영애의 조사 권한이 적절한지 검토해야죠.”
바람이 창문을 스치며 손수건에서 희미한 향기를 실어왔다. 달콤한 꽃 향기 사이로 스며든 씁쓸한 끝맛. 비비안의 콧잔등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 향기. 은은하지만 독초 계열이다. 민들레뿌리와 흡사하지만 더 인공적으로 정제된——.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에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하.”
셀레나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것은 단순한 견제가 아닙니다. 왕실의 법을 지키려는 충정입니다.”
“충정. 그 충정이 성수를 살릴 방법을 알고 있나.”
셀레나의 미소가 굳어졌다.
“그건——”
“방법을 모른다면, 아는 자를 방해하지 마라. 위원회는 소집해도 좋다. 단, 그때까지 이 조사는 계속된다.”
셀레나의 손수건이 구겨졌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지만, 더 깊은 미소가 번졌다.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그리 명하신다면.”
돌아서며 구두 소리가 연구실을 가로질렀다. 문 앞에서 멈추더니 어깨 너머로 비비안을 돌아보았다.
“로즈우드 영애. 부디 성공하시길.”
존댓말의 끝 음절이 비수처럼 날을 세웠다. 문이 닫히고 손수건의 잔향만 남았다.
에단이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젖혔다.
“조사는 계속한다.”
“……전하. 하워드 후작님의 손수건에서 독초 계열 향이 났습니다. 은은했지만 정제된——”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조사를 맡기는 거다.”
비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파우치 안의 유리병이 손끝에 닿았다. 붉은 결정의 잔상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셀레나의 발자국 소리가 정원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비비안은 손수건을 파우치에 밀어 넣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 지금 즉시 의심 온실을 직접 수색해야 합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근거로.”
“셀레나 하워드의 손수건에서 독초 계열 향이 났습니다. 은은했지만 분명했어요. 제 코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에단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증거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확인하자는 겁니다. 원작에—— 아니, 통상적인 절차대로라면 위원회 소집을 기다려야겠지만, 그러는 사이 증거는 사라집니다.”
비비안은 숨을 들이켰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조여드는 듯한 압박감이 시작됐다.
“대온실 동쪽 별관 구역. 폐쇄 구역으로 지정된 바로 그곳——”
문장이 끝나기 전이었다.
관자놀이 양쪽에서 쇠말뚝이 박히는 듯한 통증이 번쩍였다. 비비안의 무릎이 접혔다. 손가락 사이로 파우치가 미끄러져 정원의 자갈 위에 떨어졌다.
“비비안 로즈우드.”
에단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았다.
손이 어깨를 잡았다. 단단한 악력이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비비안은 이를 악물었다. 시야 가장자리가 하얗게 번지고, 귀 안에서 파도 소리가 울렸다.
이게 교정력이다. 원작을 바꾸려는 자에게 내려지는 대가.
“고개를 들라.”
에단의 손이 턱 밑으로 옮겨졌다. 비비안은 억지로 시선을 올렸다. 황금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가까이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비비안이 손바닥으로 자갈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버텼다.
“잠시 어지러웠을 뿐입니다.”
“네 얼굴색이 아니다.”
“조사를——”
“나중이다.”
에단이 팔을 당겼다. 비비안의 몸이 반 걸음 기울어 그의 어깨에 닿았다. 검은 제복에서 차가운 금속 단추 냄새와 은은한 백단향이 풍겼다.
“별관으로 돌아가라.”
“전하께서는 계속 미루실 작정이십니까.”
비비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두통이 걷히지 않은 상태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증거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에단의 턱선이 굳어졌다.
“네 몸 상태를 먼저 확인한다.”
“제 몸은 제가 압니다.”
“그렇지 않아 보이니까 하는 말이다.”
일순 침묵이 흘렀다. 비비안은 에단의 팔을 조용히 뿌리쳤다. 다리는 아직 후들거렸지만 서 있을 수는 있었다.
이 세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원작을 거스를 때마다 몸이 이렇게 반응한다면.
“잠시 휴식 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허락한 적 없다.”
“이 조사, 계약 약혼의 조건입니다. 성수 회복이 목표라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네가 쓰러지면 무슨 의미가 있나.”
에단이 한 걸음 물러서며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주먹을 꽉 쥔 듯 손목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해질녘이 대온실 유리 돔을 주황빛으로 물들일 무렵.
비비안은 별관 방에서 나왔다. 두 시간 남짓 눈을 붙였고, 관자놀이의 통증은 둔한 압박감으로 남아 있었다.
대온실 입구에서 에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제복 차림 그대로였다. 쉬지 않았는지 눈 밑이 약간 어둑했다.
“괜찮나.”
“예. 이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에단이 대답 대신 온실 문을 열었다. 축축한 흙내와 함께 열대 식물들의 짙은 풀내가 밀려왔다. 야간용 마법 램프들이 바닥에 은은한 푸른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성수 앞에 서자 비비안은 곧바로 허리를 굽혀 흙을 살폈다. 어제보다 뿌리 주변의 변색이 더 넓어졌다. 표토를 손가락으로 살짝 걷어내자 은빛 미립자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관수 경로입니다. 누군가 정기적으로 희석액을 주입하고 있어요.”
에단이 성수 옆으로 다가섰다.
“수일 전에도 같은 흔적이 있었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젯밤에 새로 보충된 흔적도 확인했고요.”
비비안이 천천히 일어서며 손가락에 묻은 흙을 손수건에 닦아냈다.
“전하께 묻겠습니다. 성수 관리는 누가 담당합니까.”
에단의 시선이 성수의 잎사귀 쪽으로 고정됐다.
“왕실 정원사들이 순번제로 맡는다.”
“그 정원사들의 명단과 순번 기록을——”
“열람할 수 없다.”
“무엇 때문입니까.”
에단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 검지로 성수 줄기의 마른 부분을 한 번 쓸었다. 나무껍질 조각이 부스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전하.”
“내일까지 기다려라.”
비비안이 반 걸음 다가섰다.
“이미 사흘 전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새로운 은빛 가루가 보충됐어요. 누군가 우리의 조사 속도를 정확히 알고서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에단의 어깨가 미세하게 경직됐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알고 계시죠. 누군가 성수 회복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비비안 로즈우드.”
“약병입니다. 성수 아래에서 발견됐다가 사라진 약병. 전하께서 직접 확인하셨다고 하셨죠.”
에단이 뒤돌았다. 황금색 눈동자에 램프 불빛이 반사되어 일렁였다.
“그 약병을 발견한 기사는 다음 날 전출됐다.”
비비안의 숨이 멎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이미——”
“말했다.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에단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분명한 단절이 담겨 있었다.
“네게 모든 정보를 줄 수는 없다. 아직은.”
“제가 의심스럽습니까.”
에단의 입술이 얇게 벌어졌다 닫혔다. 말을 삼키는 듯한 동작이었다.
“의심할 대상은 따로 있다.”
그 말을 남기고 에단이 몸을 돌렸다. 군화 밑창이 온실 바닥의 마른 낙엽을 밟자 바스락 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조사는 계속하라. 수행원은 내일 아침까지 붙이겠다.”
비비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전하께서 제게 숨기시는 게 무엇입니까.”
에단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러나 뒤돌지는 않았다.
“내가 신뢰했던 자들의 일부가—— 관여되어 있다.”
“신뢰했던 자들. 누굽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유리 벽 너머로 에단의 검은 실루엣이 저녁 어둠 속으로 빠르게 멀어졌다.
비비안은 성수 앞에 혼자 남았다. 램프의 푸른빛이 발밑 은빛 가루를 일렁이게 했다.
에단 크로포드는 이미 알고 있다. 범인이 내부에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사실을 나에게조차 숨겨야 할 만큼 신뢰가 없는 상태다.
그러나 오늘 오후 자신이 쓰러졌을 때 그의 손이 어깨를 잡았던 순간. 그 손에서 느껴졌던 긴장된 온도.
적어도 내가 죽는 건 원치 않는 모양이다.
비비안은 천천히 파우치를 열었다. 두통의 잔재가 아직 관자놀이 뒤에서 둔하게 울리고 있었다. 교정력이라는 이름의 족쇄. 원작이 정한 길을 벗어나려는 자에게 가해지는 제약.
하지만 나는 이미 원작에 없던 인물이다.
그녀는 성수의 잎사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변색된 잎맥이 램프 아래서 실핏줄처럼 붉게 반짝였다.
“네가 병든 이유도, 누가 너에게 독을 주입했는지도. 그리고 그가 왜 숨기려 하는지도. 내가 끝까지 밝히겠다.”
손가락 끝으로 잎사귀 한 장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은빛 가루가 손톱 밑에 미세하게 박혔다.
비비안은 파우치에서 유리병을 꺼내 샘플을 추가했다. 뚜껑을 닫기 전, 미세한 붉은 결정 하나가 유리 안쪽에서 한 번 깜빡였다. 어젯밤 방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빛이었다.
살아 있다. 이 가루 속 무언가가.
그녀는 병을 단단히 마개로 막아 파우치 깊숙이 밀어 넣었다. 온실 밖은 이미 완전한 어둠이었다.
비비안은 허리춤의 가지치기 가위를 한 번 만지며 굳게 다짐했다.
에단 크로포드의 비밀도, 이 세계의 규칙도, 결국 나를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