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

4화

비비안은 쪽지를 두 번째로 읽었다. '밤 10시, 옛 약초 건조실. 혼자 오십시오. — 마커스 웰튼.' 종이 구석에 약제사 길드 문양 대신 작게 눌러쓴 은루나 잎사귀 모양. 비비안은 쪽지를 촛불에 태워 재를 털어냈다.

마커스 웰튼이 이걸 보낸 건가. 아니면 누군가의 미끼인가.

두통의 잔재가 관자놀이 뒤에서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수행원도 아직 붙지 않은 밤이었다. 비비안은 파우치에서 은빛 가루 샘플 병을 꺼내 손바닥 안에 움켜쥐었다.

가야 한다. 이 가루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다.

그녀는 망토를 걸치고 별관 복도로 나섰다.

옛 약초 건조실은 왕실 약제실 가장 구석진 통로 끝에 있었다.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문 앞에 서자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노크는 됐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마커스 웰튼이 등잔 하나만 켜둔 채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짚고 문 너머를 가리켰다. 비비안이 문을 닫자 마커스가 일어서서 문고리에 말린 쑥과 으깬 월계수 잎을 뿌렸다. 손목의 가죽 팔찌를 한 번 꼬자 등잔 불빛이 푸르게 변하며 벽면이 일렁였다.

“방음과 탐지 차단입니다. 대략 한 시간.”

비비안이 작업대 쪽으로 걸어갔다.

“위험을 감수하시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마커스는 싱긋 웃으며 테이블 위의 낡은 가죽 폴더를 열었다.

“개인적인 복수입니다.”

폴더 안에는 은루나 독초의 해부도가 보이는 연구 노트 더미. 마커스의 실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선대 왕실 약제사, 제 스승이십니다. 삼십 년 전 이 데이터를 남기고 독초 연구 누명을 쓰셨어요. 밀고한 자가 누군지 저는 알고 있었고요.”

“복수의 기회를 기다리셨군요.”

“오래 걸렸습니다.” 마커스가 노트 한 페이지를 펼쳤다. 은루나 꽃가루가 관수 시스템을 통해 주입될 때 나타나는 증상이 적혀 있었다. “이번 성수 가루의 결정 형태가 딱 맞아떨어지더군요.”

비비안은 유리병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이걸 분석하셨습니까.”

“조금 줘 보시겠소.”

마커스는 별다른 도구 없이 맨손으로 병을 열었다. 오른손 검지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독초 반응석도 없이 포자의 활성도를 재는 움직임이었다.

저 손은 이미 은루나에 감촉 적응이 되어 있다.

비비안이 숨을 멈췄다. 마커스가 병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살아 있군요. 붉은 결정.”

“알고 계셨습니까.”

“붉은 건 포자가 아닙니다. 은루나 뿌리에서 나오는 수지 결정이에요. 이게 살아 있다는 건——”

그가 비비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군가 지금도 독초를 길러 신선한 수액을 관수로 흘려보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비비안의 손아귀에서 가지치기 가위가 흔들렸다.

“얼마나 오래됐습니까.”

마커스가 연구 노트를 넘겨 표를 보여주었다.

“수지가 흙 속에서 분해되는 속도를 역산했습니다. 최소 3년.”

“3년…… 대관식 이전부터군요. 전하께서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 미리 준비한 겁니다.”

비비안이 병을 등잔 불빛에 비추자 붉은 결정이 천천히 빛을 내며 회전했다.

“수지가 관수 경로로 지속 주입되었다면, 범인은 온실 관수 시스템에 접근 가능하고 은루나 재배 장소까지 확보한 인물입니다.”

“이미 결론까지 내리셨네.”

마커스는 서랍에서 두툼한 양피지를 꺼내 밀었다. 성분 분석표에 타임라인, 관수 주기, 독성 강도 변화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분석서입니다. 사본은 만들어 두었고 원본은 제가 보관합니다.”

비비안이 양피지를 집어 들다가 멈췄다.

“이 관수 주기 기록은 제가 오기 전 수집된 데이터입니까.”

“스승님 기록을 제가 보강했습니다. 지난 3년간 성수 주변 흙 시료를 몰래 채취해 왔어요.”

비비안이 고개를 들었다.

“왜 지금입니까. 3년간 혼자 이걸 쥐고 계셨을 텐데.”

마커스의 미소가 처음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두 눈이 칼날처럼 드러났다.

“혼자서는 못 끝냅니다. 저는 약제사지 정치인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영애께서 오셨어요. 온실 바닥의 은빛 가루를 발견하고 당일 밤 샘플을 채취한 사람이.”

그가 테이블을 두 번 두드렸다.

“복수라고 불렀습니다만, 진실을 밝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스승님의 누명을 벗기고 성수를 살릴 수 있다면.”

비비안은 분석서를 접어 파우치 안쪽에 밀어 넣었다.

“이 데이터, 전하께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목적으로 드리는 겁니다.”

마커스는 문고리의 쑥가루를 쓸어내며 일어섰다. 등잔 불빛이 다시 노란색으로 돌아왔다.

“다만 전달 방법은 신중하게. 전하께서 아마 그 3년의 시간 속에 있는 누군가를 아직 의심하고 싶지 않으실 테니까.”

비비안은 파우치 끈을 여미며 숨을 내쉬었다.

“에단 크로포드 전하께서 이미 내부 관여자를 알고 계십니다. 어젯밤 직접 말씀하셨어요.”

마커스의 손이 문고리에서 멈췄다.

“……그렇습니까.”

“신뢰했던 자들 일부가 관여되어 있다고.”

정적 속에서 등잔 심지가 지글거렸다. 마커스가 천천히 돌아서며 다시 싱긋 웃었으나 눈매는 웃지 않았다.

“그럼 더욱 서둘러야겠군요. 전하께서 그 말을 입 밖에 낸 이상 범인도 곧 눈치채겠습니다.”

비비안은 문고리를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셀레나 하워드의 손수건에서 독초 정제 향이 난다고 말하는 정보를 얼마나 신뢰하시겠습니까.”

마커스의 실눈이 반 박자 느리게 가늘어졌다.

“향만으로는 증거가 못 됩니다. 하지만 하워드 가문은 3년 전 왕실 온실 후원금을 전액 독점 기부했고, 관수 시스템 보수 공사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왜 지금 말씀하십니까.”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증거 없는 의심은 이 궁 안에선 독입니다.”

비비안은 눈을 감았다 떴다.

3년. 관수 시스템 보수 공사. 후원금 독점. 손수건 향. 에단이 숨기는 이름들.

“오늘 밤 가능한 빨리 전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마커스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손끝은 더는 떨리지 않았다.

“분석서 사본 마지막 페이지에 제 서명을 넣었습니다. 필요하면 증언대에 서겠소.”

비비안은 문을 열었다. 복도의 찬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의 누명을 벗기고 싶다는 말씀,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마커스의 미소가 처음으로 눈가까지 번졌다.

“고맙습니다, 로즈우드 영애.”

비비안은 파우치를 가슴께로 당겨 쥐고 어두운 복도로 나섰다.

분석서는 손에 있다. 이제 에단에게 가는 일만 남았다. 오늘 밤 반드시 그가 숨기는 자들의 이름도, 하워드 가문의 온실 후원금도 탁자 위에 펼쳐놓겠다.

왕세자 전용 별관의 집무실에 들어선 비비안은 탁자 위에 분석서 사본을 올렸다.

“성수에서 채취한 은빛 가루의 분석 결과입니다. 은루나 계열 독초입니다. 관수 경로를 통해 주기적으로 주입했고, 최소 3년 이상 축적된 농도예요. 성수 주변의 은빛 가루는 신선한 상태였습니다. 범인이 아직도——”

“알고 있다.”

에단의 짧은 대답에 비비안의 숨이 멈췄다.

그가 벽난로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신뢰했던 자들 중 일부가 이 일에 관여되어 있다. 네가 알 필요는 없는 부분이다.”

“이미 세 분의 이름을 알고 계신 겁니까. 알고 계셨으면서, 숨기고 계셨으면서, 성수가 죽어가는 동안.”

비비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독초 조사 권한을 제게 맡기신 것은 계약 이행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모든 정보를——”

“계약 조항을 수정하겠다.”

돌아선 에단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성수 완전 회복까지의 기간을 단축하고, 네가 원한다면 백작가령 반환 시기도 앞당기겠다. 그 대신——”

“입을 다물라는 말씀이십니까.”

“진실을 쫓는 자는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 말씀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네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에단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비비안은 잠시 그를 바라보며 어젯밤 자신을 붙잡았던 손의 온도를 떠올렸다.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조건부로 수락하겠습니다. 단, 계약 조항 수정은 성수 회복 이후로 보류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숨기시는 사안 중 제 조사에 직접적인 장애가 되는 것은——”

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대화가 그리 분주하신지.”

셀레나 하워드가 실크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며 들어왔다. 손에는 리본 장식 상자가 들려 있었다.

“하워드 여백작. 약속된 면담이 아닙니다.”

에단의 목소리가 굳었다.

“약혼 축하 선물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거절하시면 제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셀레나는 비비안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로즈우드 영애께서도 여기 계실 줄은 몰랐네요. 요즘 매일 밤 바쁘신 모양이에요.”

“급한 보고가 있어서 왔습니다.”

셀레나가 미소 지으며 상자를 탁자 구석에 올렸다. 손수건을 꺼내려다 집어넣는 동작 사이로, 비비안의 콧속에 씁쓸한 향이 스몄다. 은루나의 정제된 잔향이었다.

“왕실 위원회에서 내일 긴급 회의가 소집됩니다. 의제는 금지된 독초 서적 열람 건과, 계약 약혼자의 조사 권한 남용 여부라고 하더군요.”

셀레나가 비비안을 향해 말을 던졌다.

“제 조사는 전하의 승인 아래——”

“선대 왕의 금지령을 아십니까. 독초 연구는 단순 소지만으로도 중죄예요. 그런데 지금 영애께서 독초 서적을 열람하고 샘플까지 채취하고 계신 모양이더군요.”

비비안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셀레나가 에단을 향해 돌아섰다.

“전하께서도 위원회의 판단을 무시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계약 약혼이 성수 회복을 위한 조치라면, 그 목적에 부합하는 인물인지 검증하는 절차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검증 절차는 이미——”

“이미 끝났다고 말씀하시면,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셀레나가 물러서며 비비안에게 시선을 흘렸다. 그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너는 이미 덫 안에 있다.

“축하 선물은 열어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의니까.”

문이 닫히기 전, 비비안은 다시 한 번 그 냄새를 맡았다. 옷깃 전체에 배어 있는 은루나의 흔적. 이 여자가 독초의 유통 경로다. 그러나 증거는 지금 내 손에 없었다.

문이 닫히자 에단이 입을 열었다. “셀레나 하워드에 대한 조사는 중단하라.”

“전하께서도 냄새를 맡으셨습니까. 은루나의 향입니다. 손수건에서 정제된——”

“증거가 없다.”

비비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당신이 나에게서 가져간 것들 때문에 증거가 없는 거라고.

“지금 셀레나를 건드리면 위원회가 네 조사 권한 전체를 박탈할 명분을 갖게 된다. 이해하느냐.”

비비안은 대답 대신 파우치 속 분석서를 천천히 정리하며 말했다.

“내일부터 독자적으로 온실을 조사하겠습니다. 은루나의 천적 식물이 왕실 온실 목록에 등록되어 있다면, 해독을 위한 생장 조건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하의 승인 없이도 분석실 권한으로 접근 가능한 구역입니다.”

에단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킨 얼굴이었다.

“수행원 한 명을 붙이겠다.”

“감시입니까.”

“호위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단은 외투도 챙기지 않고 집무실 문 쪽으로 발을 돌렸다.

“계약은 유효하다. 걱정하지 마라.”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세 번 울리고, 네 번째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비안은 홀로 탁자 앞에 서서 촛불을 바라보았다. 신뢰는 무너졌다.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통제하려는 거다. 파우치 안 분석서가 무거웠고, 셀레나의 옷깃에서 풍기던 은루나 향이 아직 코끝에 남아 있었다.

비비안은 허리춤의 가지치기 가위를 한 번 만졌다. 백작가령과 성수. 딱 두 가지다. 나는 그걸 위해 여기 왔고, 그걸 위해 끝까지 간다. 에단 크로포드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혼자 할 뿐이다.

촛불 하나가 심지 끝에서 타들어 가며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올렸다. 비비안은 손을 내밀어 심지를 비볐다. 불빛이 꺼지고 집무실은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