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

5화

어둠 속에서 나온 비비안의 손이 아직도 촛농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별관 복도를 가로지르려던 그때, 낮고 느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로즈우드 영애. 잠시 시간이 되십니까.”

마커스 웰튼이 벽 기둥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푸른 약제사 로브 자락이 촛불에 흔들렸다.

비비안이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각에 무슨 일이십니까.”

“분석이 끝났습니다. 전하께도 이미 연락을 넣었고요. 지금 바로 비밀 연구실로 오시라는 전갈입니다.”

비비안은 품 안의 분석서 사본을 만졌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마커스가 직접 나왔다는 건, 서면으로 남기지 못할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전하께서도 오십니까.”

“먼저 가 계실 겁니다. 아마 지금쯤 제 작업대를 못마땅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계시겠죠.”

마커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약제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좁고 습했다. 벽면의 석재 사이로 이끼 낀 흙냄새가 배어 있었고, 마커스가 든 램프가 계단마다 길쭉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비밀 연구실의 철제 문이 열리자, 약초와 알코올이 섞인 특유의 찰랑한 공기가 밀려나왔다. 에단은 이미 중앙 작업대 건너편에 서 있었다. 검은 제복 차림 그대로, 팔짱을 끼고 건조대에 매달린 약초 다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마커스가 문을 닫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영애를 모셔오느라 그런 거니까 나무라지 마십시오, 전하.”

비비안은 에단의 옆모습을 스쳐 지나며 작업대 앞으로 갔다.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 집무실에서 등을 돌리던 그 순간이 아직 두 사람 사이에 얼음처럼 놓여 있었다.

마커스가 유리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증발접시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각각의 표면에 미세한 은색 막이 코팅되어 있었다.

“사흘 전 로즈우드 영애가 채취한 시료입니다. 그리고 이건——”

마커스가 첫 번째 접시를 집어 들었다. 램프 불빛을 비스듬히 받자 은색 막이 보랏빛으로 변색되며 희미하게 반짝였다.

“은루나 뿌리 추출물의 결정체입니다. 그것도 단순한 포자나 잎 추출이 아니라, 뿌리 핵심부에서 채취한 수지를 정제한 거죠. 독성이 가장 강한 부위입니다.”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뿌리 수지라면.”

“예. 누군가 은루나를 직접 재배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오랫동안요. 뿌리에서 이 정도 순도의 수지를 얻으려면 최소 2년 이상 생육시켜야 하니까요.”

비비안이 두 번째 접시를 가리켰다. 그 위의 은색 막에는 미세한 붉은 줄무늬가 보였다.

“이건 제가 따로 채취한——”

말을 멈췄다. 에단에게는 말하지 않은 시료였다.

마커스가 끼어들었다.

“성수 아래 토양에서 발견된 붉은 결정입니다. 역시 은루나 계열인데, 이쪽은 수지가 산화되며 형성된 부산물이에요. 관수 경로를 통해 물에 섞여 들어갔고, 토양에 축적됐습니다.”

마커스가 셋째 접시를 들어 올렸다. 다른 두 접시와 달리 표면의 은색이 더 짙고 군데군데 녹색으로 변색된 자국이 있었다.

“이게 가장 오래된 층입니다. 성수 뿌리 주변 30센티 지점에서 채취했어요. 변색도를 역산해 보니, 최초 유입 시점이 최소 3년 전이더군요.”

비비안의 손끝이 파우치 위에서 멈췄다.

“3년 전. 하워드 가문이 왕실 온실 후원금을 기부하고 관수 시스템을 보수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는군요.”

그 말에 에단의 손이 작업대 모서리를 짧게 움켜쥐었다.

마커스는 대답 대신 분석서 한 묶음을 비비안 쪽으로 밀었다.

“자세한 수치는 여기 있습니다. 성수에 유입된 은루나 독초의 총량, 관수 주기 추정치,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덧붙였다.

“해독에 필요한 천적 식물 목록까지 정리했어요. 믿을 만한 정보니까, 영애의 온실 조사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비비안은 분석서의 첫 장을 펼쳤다. 빽빽한 필체와 함께 토양 단면도, 독초 성분 분포 그래프가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커스가 3년간 밤마다 이 지하실에서 홀로 작성한 기록이었다.

“고맙습니다, 웰튼 약제사님.”

“감사는 나중에. 일단 읽어보시고요.”

비비안은 분석서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녹색으로 날카롭게 빛났다.

“전하.”

에단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3년입니다. 누군가 최소 3년 동안, 정기적으로, 관수 시스템을 통해 성수에 접근했습니다. 단기 침입이 아니라 내부의——”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정원사, 관리인,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접근 권한을 가진 자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 게 있지 않습니까.”

에단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성수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대상이다. 외부 세력이 내부 인력을 매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건 외부 위협에 대한 일반론일 뿐입니다. 제가 묻는 건——”

“비비안.”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처음으로 억지가 섞여 있었다.

“조사는 계속된다. 단, 지금 이 자리에서 특정 인물을 거론하는 건 위험하다.”

비비안의 시선이 에단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그의 오른손이 작업대 가장자리를 쥔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새까만 단발 아래로 목의 근육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당신은 이미 누군지 알고 있다.

그 확신이 가슴을 쳤다. 집무실에서 약병을 발견한 기사를 이튿날 전출시킨 것도, 정원사 명단을 건네지 않은 것도, 모두 특정 인물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마커스가 그때까지 조용히 증발접시를 케이스에 정리하며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의 느린 손놀림이 의도적으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음을 비비안은 느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외부 세력의 매수 가능성.”

비비안이 분석서를 접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외부 세력이 정확히 누군지, 전하께서는 이미 특정하고 계시는 거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에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작업대 위의 손을 천천히 거두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발걸음 소리가 지하실 바닥에 낮게 깔렸다.

“마커스.”

“네, 전하.”

“분석서 사본은 영애가 보관해라. 원본은 폐기한다.”

“이미 사본은 영애에게 드린 뒤입니다. 원본도 안전하게 보관하죠.”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발걸음을 옮기기 직전, 어깨 너머로 비비안을 돌아보았다.

“네가 옳다.”

짧은 세 마디였다. 그 이상은 없었다. 철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지하실을 진동시켰다.

마커스가 램프를 높이 들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건, 제 기억으로는 처음 보는 일이에요.”

비비안은 품 안의 분석서를 만졌다. 파우치 안에서 은루나 독초 분석서 사본 두 권이 서로의 표지를 스쳤다. 한 권은 마커스가 준 해독 데이터, 한 권은 자신이 확보한 물증 기록.

에단 크로포드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 결정은 이미 신뢰를 깨뜨렸다.

“로즈우드 영애.”

마커스가 증발접시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온실 조사를 시작하실 거라면, 제가 한 가지 당부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검은이끼풀은 음지에서만 자랍니다. 온실 서쪽 구역, 관수로가 지나는 오래된 돌담 근처를 먼저 확인하세요. 만약 거기에 없다면——”

램프 불빛이 잠시 흔들렸다.

“누군가 일부러 옮겼다는 뜻이겠죠.”

비비안은 주먹을 쥐었다.

“찾겠습니다. 반드시.”

지하실 계단을 오르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서로 다른 리듬으로 벽에 부딪혔다. 아직 이른 오전의 찬 공기가 약제실 복도 끝에서부터 스며들고 있었다.

비비안은 에단이 이미 대답을 거부했음을 직감했지만,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선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마커스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지금, 이 대화는 오직 두 사람만의 것이었다.

약제실 문이 닫히자 복도는 갑자기 넓어졌다. 마커스의 발소리가 문 너머로 멀어지고, 에단이 먼저 걷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그의 발걸음 속도를 따라잡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저는 위험할 뿐입니다. 셀레나 하워드가 독초 유통 경로라면, 그녀를 막을 방법을 당신만 아는 건——”

“계약의 본질을 잊었느냐.”

에단이 멈춰 서지도 않고 대꾸했다.

비비안의 손끝이 파우치 가장자리를 눌렀다. “계약 조건을 재확인하고자 합니다. 성수를 살리는 것이 목표라면, 누군가 매일 밤 관수로에 독초를 타는데도——”

“네 역할은 성수를 살리는 것이다. 범인 색출은 내 역할이다.”

“그 역할 분담에 대한 합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에단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복도 창가로 들어온 오전 빛이 그의 황금색 눈을 날카롭게 갈랐다.

“내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건 안다. 너도 눈치챘겠지.”

대답하지 않았다. 비비안의 녹색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 정보를 주면, 내일 위원회에서 네가 걸려든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무엇을 위한 준비입니까.”

“그걸 묻지 마라.”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비비안은 손을 내렸다. “전하께서는 제가 위험에 빠지지 않길 바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감정적 기대는 오해를 낳는다.”

에단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두운 제복에서 차가운 송진 향이 풍겼다.

“이 계약은 정치적 동맹이다. 서로에게 그 이상을 바라지 마라.”

입술을 열려던 비비안이 숨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 사흘 동안 몇 번이고 봤던 긴장, 무언가를 참아내는 듯한 근육의 움직임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더 이상의 설명도, 변명도 없었다.

에단이 몸을 돌렸다.

“수행원은 약제실 앞에 보내겠다.”

“거절합니다.”

그의 뒷모습이 잠시 멎었다.

“감시도, 호위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제 방식으로 조사하겠습니다.”

에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걸음이 다시 복도 저편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제복의 망토 자락이 그가 보낸 밤처럼 쓸쓸히 끌려갔다. 마지막 발소리는 모퉁이를 돌아 이내 사라졌고, 비비안은 혼자 남았다.

정치적 동맹.

그 이상을 바라지 마라.

손등으로 입술을 짧게 문질렀다. 어젯밤 집무실에서도, 바로 지금도 그가 하는 말은 본질이 같았다. 거리를 두라는 경고. 하지만 그 거리를 만든 게 정말 나였을까.

아니다. 애초에 이 사람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성수의 독살 진실조차 마커스의 데이터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것이다.

비비안은 복도 벽을 한 번 짚었다가 손을 떼고 자신의 임시 집무실로 방향을 틀었다.

점심 직후의 집무실은 조용했다. 수행원이 가져다 놓은 차가 이미 식어 있었다. 비비안은 탁자에 분석서 사본과 마커스에게 빌린 낡은 약초 도감을 나란히 펼쳤다.

은루나 독초의 해독 경로는 검은이끼풀.

마커스의 분석서 마지막 장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비비안은 약초 도감의 색인을 훑어 검은이끼풀 항목을 찾았다. 낡은 종이 냄새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흙먼지처럼 피어올랐다.

검은이끼풀(Black Moss Fern). 왕실 온실 목록 제외종. 재배 조건: 일조량 하루 세 시간 이하, 수온 8도 이하의 지하 용천수, pH 5.2 이하의 약산성 토양.

그 조건을 충족하는 장소는 인공 온실이 아니다.

자연 상태에서만 자란다.

비비안의 손가락이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거기에는 접혀 있던 작은 고지도가 한 장 붙어 있었다. 누군가 손으로 그린, 잉크 빛이 바랜 약초 자생지 분포도였다. 검은이끼풀의 표식이 찍힌 지점은 단 한 곳.

하워드 가문 영지 인근 계곡.

비비안은 도감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책상 가장자리에 아침에 도착한 편지 뭉치가 쌓여 있었다. 가장 위쪽의 진홍색 밀랍 봉인이 찍힌 초청장.

사교계 연회. 개최자 셀레나 하워드.

비비안은 검은이끼풀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우고 도감을 덮었다. 파우치에서 관찰 일지를 꺼내 펼쳤다. 잉크병 뚜껑을 열고 펜을 든 손이 조금 떨렸다. 식물이 아닌 사람을 추적하는 기록은 처음이었다.

은루나 해독 식물 '검은이끼풀'의 자생지가 하워드 영지 인근 계곡으로 확인된다. 은루나 정제 향을 지닌 셀레나 하워드가 이 계곡에서 독초를 재배했을 가능성. 사교계 연회는 그 영지를 방문할 유일한 명분이다.

펜을 내려놓으며 초청장을 다시 바라봤다. 진홍색 밀랍 속 하워드 가문의 문장은 비비안이 아직 가보지 못한 그 계곡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