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

6화

복도는 이미 촛불이 반 넘게 줄어들어 있었다. 비비안은 벽에서 손을 떼고 임시 집무실에서 나왔지만,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여전히 더뎠다. 도감 속 지도가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워드 영지 인근 계곡. 검은이끼풀. 초청장.

그때 복도 끝에서 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

“로즈우드 영애.”

마커스 웰튼이었다. 약제사 가운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모습이 마치 실험을 중단하고 급히 뛰쳐나온 것 같았다. 실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이 시각까지 집무실이십니까. 전하께서는 이미 퇴청하셨습니다.”

“집무실에 있었던 게 아닙니다.”

비비안이 몸을 돌렸다. 파우치를 가슴께로 당겨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침 찾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약사님께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마커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촛불 그림자가 그의 실눈을 한 번 가로질렀다.

“검은이끼풀의 해독 원리는 이론으로 그치는 겁니까. 아니면 실제로 증명된 적이 있습니까.”

마커스의 손끝이 허공에서 잠시 움직였다. 익숙한 약초 냄새가 복도에 번졌다.

“증명하고 싶으십니까.”

“그럴 수 있다면요.”

마커스는 잠시 비비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평가하는 것이었으나 불쾌하지 않았다. 마치 식물 표본의 생장점을 들여다보는 시선이었다.

“좋습니다. 지금 약제실로 오시지요.”

그가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시험 하나를 치르시게 될 겁니다.”

왕실 약제실은 밤에도 약초 달이는 화로가 꺼지지 않은 채 희미하게 벌겋게 타고 있었다. 마커스는 작업대 서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병 안에는 은빛 액체에 담근 뿌리 조각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비비안은 숨을 삼켰다. 은루나 뿌리.

“표본입니다. 이십 년 전 멸종된 것으로 공식 기록됐지만, 실물이죠.”

마커스가 병을 작업대 중앙에 올렸다. 뿌리 조각은 희미하게 은빛을 띠며 액체 속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천천히 회전했다.

“해독제로 쓰이는 검은이끼풀. 이 식물이 은루나를 어떻게 중화하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식물 생리학적 기작을 포함해서.”

비비안은 잠시 병을 들여다보았다. 뿌리 표면의 미세한 포자 흔적이 액체 속에서 움찔거렸다.

“검은이끼풀은 잎 뒷면의 분비샘에서 단백질 분해 효소를 내보냅니다. 은루나 뿌리 수지의 독성은 특정 알칼로이드 사슬에 기반하는데, 그 효소가 사슬의 이황화결합을 선택적으로 끊습니다.”

마커스의 실눈이 반 박자 늦게 가늘어졌다.

“계속하십시오.”

비비안의 말투가 전문용어 사이로 반말로 흐트러졌다.

“pH 5.2 이하의 산성 환경에서 효소 활성이 극대화돼. 검은이끼풀이 약산성 토양과 8도 이하의 저온 용천수를 요구하는 건 그 때문이야. 독소 분자랑 결합할 때는 저온에서 효소의 입체구조가 더 안정적으로 접혀서 기질 특이성이 높아져.”

마커스가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실눈이 완전히 사라질 만큼.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비비안이 고개를 들었다.

“먼저 묻겠습니다. 이 표본은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마커스의 손이 병을 조용히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제 스승님의 유품입니다. 삼십 년 전 은루나 연구 누명을 쓰고 희생되신 분이지요.”

그가 작업대 아래쪽 깊숙이 숨겨둔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촘촘한 필체로 기록된 문서 뭉치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고대 독초 해독 데이터. 스승님의 실제 연구 노트고, 저는 이걸 보완해서 분석서를 완성했습니다. 검은이끼풀의 해독 원리는 이미 삼십 년 전에 증명된 겁니다.”

비비안이 숨을 들이쉬었다.

“이걸 제게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승님께서 평생 기록하신 데이터를 써먹을 단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커스의 표정은 여전히 느긋했지만 목소리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조건은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게 증명하는 바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효력이 있습니다.”

비비안은 문서 위로 손을 뻗었다. 종이는 예상보다 거칠었고, 오래된 잉크 냄새가 약초 쓴내에 섞여 피어올랐다.

“전대 약제사님에겐 제자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마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 손동작 안에 삼십 년의 침묵이 담겨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왕세자 집무실의 문이 열리기 전에 비비안은 이미 복도에 서 있었다.

문이 열렸을 때, 책상 위에는 펼쳐진 서류들 사이로 식어버린 찻잔이 놓여 있었다. 에단은 들어온 그녀를 보자마자 펜을 내려놓았다.

“일찍이군.”

짧았다.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전날의 대화가 아직도 책상과 그녀 사이에 놓여 있었다. 비비안은 해독 데이터 문서를 탁자 위에 올렸다.

“전하께 제안드릴 계획이 있습니다.”

에단의 시선이 문서를 훑었다. 두 장을 넘기고 나서 멈췄다.

“마커스의 노트인가.”

“예. 해독 식물 검은이끼풀의 유일한 자생지는 하워드 영지 인근입니다. 셀레나 하워드는 사흘 뒤 사교계 연회를 개최합니다.”

“그 연회에 가겠다는 건가.”

“위장 잠입입니다. 손수건 향만으로는 증거가 안 된다고 약사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연회장에서 직접——”

“위험하다.”

에단이 말을 잘랐다. 펜을 집어들려다 다시 내려놓았다. 검은 단발 아래로 목의 칼자국이 옷깃 위로 살짝 드러났다 사라졌다.

“하워드 저택의 보안은 궁보다 빈틈이 적다. 게다가 그 영애는 이미 자네를 경계하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비비안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알고도 내일 위원회에서 제 조사 권한이 정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압니다. 그 전에 증거를 확보하지 않으면 성수 독살의——”

말을 멈췄다. 에단의 황금색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날 밤의 일로 철회할 거라 생각했다.”

“그게 무슨——”

“정보를 숨긴 건 나다. 자네가 분노할 자격은 충분히 있다.”

에단의 말투는 평소처럼 짧았지만, 마지막 문장 끝이 아주 약간 느려졌다.

“그런데도 아침 일찍 와서 계획을 올린단 말이지.”

비비안은 잠시 숨을 고르고서 입을 열었다.

“계약의 본질은 정치적 동맹입니다. 감정적 기대를 품지 않겠다고 전하께서 말씀하셨죠.”

에단의 손가락이 책상 가장자리에서 움찔했다.

“그러니 감정이 아니라 증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셀레나 하워드는 연회에서 독초 향수를 쓸 겁니다. 그 향을 현장에서 포착해——”

“어떻게.”

“제 코로요.”

마커스의 문서 위에 손을 얹으며 덧붙였다.

“관련 데이터로 뒷받침해서 말입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에단이 목 뒤로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겼다.

“나도 간다.”

“전하께서 직접——”

“연회 초청장은 나한테도 와 있다. 위장을 하더라도 내 신분이 더 빠른 접근을 보장한다.”

에단이 일어서서 벽 쪽으로 걸어갔다. 종을 한 번 울리자 옆문으로 수행관이 들어왔다.

“궁정 예법 담당관을 불러라. 지금 즉시.”

수행관이 물러난 뒤, 에단은 벽을 등진 채 비비안을 돌아보지 않고 덧붙였다.

“고집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대로군.”

“식물에게서 배운 겁니다. 척박한 토양일수록 뿌리를 더 깊게 내린다는 걸요.”

에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창가 쪽으로 반쯤 돌아선 그의 입가가 아주 짧게 움찔였다.

그건 미소도 아니고 말을 삼킨 것도 아닌, 뭔가를 인정해 본 적 없는 사람이 무언가를 거의 인정할 뻔한 순간에 가까웠다.

하워드 저택 대연회장은 은은한 장미향과 와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다. 비비안은 진청색 드레스의 소매를 여미며 회장 중앙을 향했다. 위장 신분은 서부 변경의 작은 영주 가문 딸. 예법 담당관이 급조한 설정이었지만 통할 만했다.

셀레나 하워드가 군중 속에 서 있었다. 선홍색 실크 드레스에 황금 관을 쓴 모습은 마치 연회장을 지배하는 여왕 같았다. 손에는 언제나처럼 작은 향수병 대신 자수 손수건을 쥐고 귀족들과 담소 중이었다.

비비안이 다가가자 셀레나의 시선이 그녀를 훑었다.

“서부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긴 여정이셨겠군요.”

입가에 미소가 걸렸지만 푸른 눈은 비비안의 드레스 장식과 머리핀을 차례로 평가했다. 비비안은 예법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하워드 영애의 연회에 초대받아 영광입니다. 더없이 아름다운 저택이군요.”

“서부엔 이런 저택이 드물 테니, 구경을 충분히 하시길.”

셀레나가 웃으며 손수건을 들어 입가를 가볍게 눌렀다.

그 순간 씁쓸한 향이 풍겼다.

달콤한 장미향 속에서 솟아오른 그 냄새는 분명 은루나였다. 비비안은 호흡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미소를 유지하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향이 참 독특하군요. 어떤 향수를 쓰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셀레나의 눈이 반짝 좁아졌다.

“서부에선 구하기 어려운 제품입니다. 하워드 가문의 전통 조향이죠.”

손수건을 접어 드레스 소매 안으로 밀어 넣는 동작이 너무 매끄러웠다. 비비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귀한 것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회를 즐기시길.”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비비안의 관자놀이에 맥박이 뛰었다. 저 손수건에 밴 향은 앞선 사건에서 마커스가 보여준 은루나 건조 표본 냄새와 완전히 일치한다.

정제된 독초 향.

셀레나는 이 향을 손수건에 배개 해 매일 휴대하고 있다.

연회장 구석, 하녀들의 출입구 근처.

에단은 검은색 단정한 예복 차림으로 기둥 뒤에 서 있었다. 손에는 빈 와인 잔을 들고 귀족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는 척했지만 시선은 하녀 한 명에게 고정돼 있었다.

셀레나의 전속 하녀가 주방 쪽 통로로 빠르게 걸어가다 쓰레기 바구니에 종이 뭉치를 던졌다. 하녀가 사라지자 에단은 잔을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바구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겨진 종이는 세 조각으로 찢겨 있었다. 에단은 재빨리 조각들을 집어 소매 안으로 감췄다. 그대로 벽을 따라 걸어 테라스 쪽 프렌치 도어를 향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테라스 난간에 서 있던 비비안이 발소리를 듣고 돌아봤다. 에단이 유리문을 닫으며 다가왔다.

“손수건 향.”

비비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루나 정제 향이 확실해요. 마커스가 5화에 보여준 건조 표본과 일치합니다. 셀레나는 저걸 몸에 지니고 다녀요.”

“일상적으로.”

에단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독초를 취미처럼 휴대하는 거군.”

“증거는 더 필요합니다.”

비비안이 손을 내밀자 에단이 품에서 찢어진 편지 조각을 꺼내 건넸다. 세 조각을 맞추자 비뚤어진 필체가 드러났다.

‘새장 이전 완료. 남쪽 별채.’

비비안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새장.”

“살아있는 무언가를 운반했단 뜻이다.”

에단이 조각들을 다시 접어 내의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남쪽 별채는 이 저택 부지 안이다. 연회 중엔 경비가 본관에 집중되니 지금밖에 없다.”

비비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무의식적으로 품으로 향해 마커스에게 받은 해독 데이터 문서를 꺼냈다. 접힌 종이를 펴자 빛바랜 잉크로 독초 함정 식물 목록이 적혀 있었다.

“별채엔 방어용 식물 함정이 있을 거예요. 은루나 재배지라면 천적 식물들을 심어 침입자를 막는 구조가 일반적입니다. 이 데이터로 대비할 수 있어요.”

에단이 문서를 들여다보려 고개를 숙였다.

거리가 좁혀졌다.

비비안은 그의 체온을 느꼈다. 어깨가 스칠 듯한 간격에서 에단의 숨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면 그의 손등에 닿을 거리.

하지만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계약을 상기시켜.”

에단이 짧게 내뱉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비비안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어조였다.

“정치적 동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비비안이 애써 담담하게 대꾸했다. 목소리엔 떨림이 없었지만, 문서를 집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은 별채가 먼저예요.”

두 사람 사이로 밤바람이 지나갔다. 테라스 난간 너머로 하워드 저택 정원의 등불이 흔들렸다.

그때 연회장 안쪽에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셀레나의 목소리였다.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라.”

유리문 너머로 그녀의 명령이 또렷이 들렸다.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찍으며 다가왔다.

“손님들 중에 신원이 의심스러운 분이 계십니다. 재검증 전까지 누구도 이 회장을 떠날 수 없습니다.”

에단이 비비안의 팔목을 짧게 당겼다. 테라스 난간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그가 속삭였다.

“별채로 간다. 지금.”

비비안은 문서를 접어 품에 넣고 난간 아래 정원을 내려다봤다. 겨우 한 층 높이. 덩굴이 벽돌담을 타고 내려간 어두운 정원으로 사병들의 랜턴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테라스 난간에 서 있던 비비안이 발소리를 듣고 돌아봤다. 에단이 유리문을 닫으며 다가왔다.

“손수건 향.”

비비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루나 정제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