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
7화
마차가 덜컹이며 방향을 틀었다. 궁으로 향하던 바퀴 소리가 둔탁하게 바뀌고, 차창 밖 가로등 불빛이 사라졌다. 비비안은 품에서 마커스의 해독 데이터 문서를 꺼내 접힌 종이를 폈다. 희미한 마차 등불 아래 빛바랜 잉크로 적힌 천적 식물 목록이 드러났다.
손끝이 목록 중간쯤에서 멈췄다.
“은루나 건조 표본의 향.”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셀레나의 손수건에서 맡은 겁니까.”
비비안은 문서를 내려다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향수인 줄 알았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코끝에 남는 잔향이 달랐습니다. 단순한 꽃향이 아니라——”
눈을 감았다. 연회장에서 스친 셀레나의 손수건. 비단 위에 배인 씁쓸하고 날카로운 향을 다시 떠올렸다.
“말린 검은이끼풀. 정확히는 뿌리 수지를 건조시켰을 때 나는 향이에요. 마커스의 약제실에서 맡은 표본과 일치합니다. 은루나 정제 향이 분명해요.”
숨을 들이켰다.
“저택 안이 아니라 별채예요. 셀레나는 은루나를 직접 가공하고 있습니다. 지금 별채로 가야 합니다.”
에단이 잠시 침묵했다. 마차 바퀴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곧 마부석 쪽으로 짧게 명령이 떨어졌다.
“행선지를 바꿔라. 하워드 별채 외곽 숲길. 등불은 끄고 접근한다.”
비비안은 접었던 문서를 다시 품에 넣었다. 손끝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지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근위대는 부르지 않으실 거죠.”
“궁에 연락하면 셀레나가 먼저 알아챈다.”
황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짧게 번뜩였다.
“둘이서 간다.”
마차는 별채에서 한참 떨어진 숲길 초입에 멈췄다. 내리자 축축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워드 별채는 야트막한 언덕 너머 보이는 이층 석조 건물이었다. 창마다 어둠이 내려앉았고, 정원 쪽 담장을 따라 키 큰 측백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에단이 앞장서서 담장 쪽으로 걸었다. 손에는 작은 랜턴 하나만 들려 있었다. 정문은 피하고, 별채 후면의 정원으로 우회하는 경로였다.
“정원에 뭔가 심어져 있다.”
걸음을 멈추며 낮게 내뱉었다.
비비안은 그의 어깨 너머로 정원을 바라봤다. 측백나무 그늘이 드리운 화단. 겉보기엔 평범한 관목과 덩굴이 무질서하게 심어져 있었다. 시선으로 식물들의 배치를 몇 초간 훑었다.
“저건 무질서가 아니야.”
이미 눈은 덩굴의 잎맥을 좇고 있었다.
“삼중 환형 배열. 가장 안쪽에 은루나를 심고, 중간 고리에 천적 회피 식물, 바깥 고리에——”
숨이 멎었다.
“까마귀덩굴. 인가 근처에선 절대 자생하지 않는 종이에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심었어요.”
“함정인가.”
“네. 침입자가 바깥 고리를 밟으면 덩굴이 다리부터 감아 올라갑니다. 올가미처럼 조이는 구조예요. 가시에는 알칼로이드 독소가——”
허리를 굽히며 덩굴 아래 흙을 손가락으로 살짝 헤집었다.
“피부에 닿으면 물집이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 호흡 곤란을 일으킵니다. 전문적인 방어용 식물 함정이에요. 독초 재배자들이 쓰는 방식 그대로.”
천천히 일어서며 정원 전체를 다시 훑었다. 시선이 멈춘 곳은 바깥 고리 가장자리의 작은 풀밭이었다. 까마귀덩굴 사이사이로 옅은 은빛 잎맥을 가진 풀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다.
“찾았다.”
걸음을 옮겼다. 정확히 덩굴이 닿지 않는 흙길을 따라 세 걸음. 몸이 화단 쪽으로 기울어졌다.
“저 은빛 풀. 달그림자풀이에요. 까마귀덩굴의 유일한 천적. 이 풀의 즙액이 덩굴 가시의 독소를 중화시킵니다.”
등 뒤에서 에단이 낮게 읊조렸다.
“그걸 지금 뜯어서 함정에 바를 생각이군.”
“네.”
비비안은 이미 무릎을 꿇고 달그림자풀을 몇 포기 뜯어 올렸다. 줄기에서 흰 즙이 배어나왔다. 풀을 손바닥으로 눌러 으깬 뒤, 가장 가까운 까마귀덩굴의 가시 촉에 문질렀다.
순간이었다.
덩굴이 경련하듯 움츠러들었다. 가시가 시커멓게 변색되더니 잎이 힘없이 축 처졌다. 덩굴 전체가 바싹 마르며 흙 위로 고꾸라졌다.
금빛 눈이 살짝 커졌다.
“대단하군.”
감탄이라기보다는 확인이었다. 비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다음 덩굴로 손을 뻗고 있었다. 달그림자풀 즙을 묻혀 두 번째 올가미도 무력화시켰다. 바깥 고리가 차례로 시들어 가며 침입 경로가 열렸다.
마지막 덩굴이 마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숨을 내쉬었다. 으깬 달그림자풀 가루를 손수건에 싸서 조심스럽게 품에 넣었다.
“증거물입니다. 천적 식물의 효소 반응은 후일 분석에 필요할 거예요.”
에단이 손목을 짧게 당겼다. 시든 덩굴 사이로 난 좁은 길을 함께 걸었다. 단단한 온기가 손에서 전해졌다.
“별채 내부로 진입한다.”
별채 뒷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녹슨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단검 손잡이로 내리치자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내부에선 희미한 흙내와 함께 씁쓸한 향이 흘러나왔다. 은루나 특유의 건조한 단내였다.
비비안은 손수건을 품에 단단히 밀어 넣고 문턱을 넘었다. 어둠 속에서 온실 특유의 습기가 피부에 닿았다. 에단이 바로 뒤에서 문을 닫으며 랜턴 불빛을 높이 쳐들었다.
차가운 빛이 조금씩 내부를 드러냈다.
공기는 차갑고 축축했다.
재배등 푸른 빛이 긴 복도를 희미하게 비췄다. 벽면을 따라 설치된 선반 위로 은루나 화분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잎맥을 타고 흐르는 은빛 수액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번뜩였다.
숨을 들이켰다.
“이 정도 규모면……”
“3년 치 관수 독살을 감당할 양이다.”
에단이 선반 아래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화분 받침대마다 관수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성수 온실의 것과 같은 규격의 구리관. 비비안은 손수건으로 코를 가렸다. 공기 중에 떠도는 은루나 포자 농도가 위험 수위에 가까웠다.
복도 끝에서 철제 문이 열렸다.
더 넓은 공간이었다.
천장까지 닿는 유리 온실 구조 안쪽, 중앙에 거대한 새장이 놓여 있었다. 금빛 장식이 달린 고급스러운 황동 새장. 하지만 그 안에 웅크린 것은 화려한 앵무새가 아니었다.
작은 송장들이었다.
발걸음이 멈췄다. 깃털 빠진 날개뼈. 부리 주변에 검게 굳은 액체. 세 번째 칸에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작은 카나리아 한 마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생체 실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은루나 뿌리 수지의 흡입 독성 실험. 새의 호흡기가 인간보다 예민하기 때문에…… 중간 독성 테스트 용도로 많이 썼다는 기록이 있어요. 30년 전 금지된 연구실들에서.”
에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새장 옆 탁자 위에 펼쳐진 공책을 집어 들었다. 가죽 표지에 박힌 하워드 가문의 금박 문장.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멎었다.
“셀레나의 필체다.”
비비안이 다가가 공책을 받아 들었다.
실험 17일차. 수지 농도 0.3% 흡입. 2시간 내 호흡곤란. 5시간 후 폐사.
실험 24일차. 관수 희석 비율 1:500. 3주 경과 관찰. 성수 잎맥 변색과 동일 패턴 확인.
손끝이 차가워졌다.
“성수에 직접 주입하기 전, 새로 테스트한 거예요.”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날짜가 적힌 칸마다 세밀한 필기와 숫자가 빼곡했다. 최근 날짜는 일주일 전.
에단이 공책 아래쪽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하워드 저택의 평면도. 붉은 잉크로 남쪽 별채와 본관 사이 지하 통로가 그려져 있었다.
“연회장 발코니 쪽에도 연결 통로가 있군.”
“셀레나가 연회 중간에 자리를 비웠던 이유네요.”
그때 별채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여러 겹. 질서정연하게 포장도로를 밟는 중무장한 군마 특유의 리듬. 이어서 쇠장화가 돌바닥을 찍는 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울려 퍼졌다.
“사병이다.”
에단이 평면도를 재킷 안으로 밀어 넣으며 방 안을 훑었다. 남쪽 벽 상단에 덩굴로 반쯤 가려진 작은 통풍창.
“일지를 품에 넣어라.”
비비안이 공책을 드레스 안쪽 허리띠에 밀착시켰다. 에단이 통풍창 아래로 이동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창문으로 정원 쪽 담장까지 갈 수 있다. 궁까지 직선으로 뛰어.”
“전하는요.”
“시간을 번다.”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에단이 재킷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구를 꺼내 손에 쥐여주었다. 안쪽에서 푸른 빛이 희미하게 맥동하는 마법 등불이었다.
“성수 온실 앞 근위대 초소에 이걸 비추면 내 명의로 출동한다. 셀레나 사병보다 빠르다.”
“같이 가야——”
“증거물을 지켜.”
황금빛 눈동자가 짧게 빛났다.
“계약을 상기시켜. 지금 이건 정치적 판단이다.”
복도 저편에서 철문이 열리는 소리.
에단이 허리를 감싸 들어 통풍창 높이까지 올렸다. 비비안이 덩굴을 밀어내고 좁은 창틀에 몸을 밀어 넣었다. 차가운 외부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손길이 잠시 허리에서 지체되었다.
“기다릴 거예요.”
창밖으로 몸을 빼내며 속삭였다.
“반드시.”
금안이 흔들렸다. 답신은 짧았다.
“알고 있다.”
정원 쪽 잔디 위로 착지한 순간, 별채 안쪽에서 셀레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을 더 밝혀라.”
사병들의 랜턴이 일제히 방 안을 비추자 재배등의 푸른 빛이 희석됐다. 비비안은 몸을 숙인 채 담장 쪽으로 달렸다. 손에 쥔 마법 등불이 체온에 반응해 더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심장이 귀에서 뛰었다.
별채 내부.
셀레나가 사병들 사이를 걸어 들어왔다. 은빛 실크 드레스 자락이 축축한 바닥을 끌었다. 새장을 한 번 바라보고는 이내 에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손수건으로 코를 가리며, 올려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
“왕세자 전하.”
입가의 각도는 칼날 같았다.
“약혼녀와 함께 한밤중 남의 저택을 습격한 스캔들을 걱정하셔야 할 겁니다.”
에단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칼날이 재배등 빛을 받아 차갑게 반사됐다.
“네가 먼저 걱정해라, 셀레나 하워드.”
낮고 평온한 목소리였다.
“은루나 재배와 성수 독살. 이 현장이 내일 아침 평의회에 공개된 후에, 네 스캔들이 과연 누구에게 유리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