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

9화

아침 햇살이 집무실의 묵직한 커튼 사이로 한 줄기 파고들었다. 비비안은 탁자 앞에 서서 손끝으로 서류 더미를 정리하다 멈췄다. 에단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긴급 회의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서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시선이 책상 구석의 은색 액자에 멎었다.

열두 살 즈음의 소년이 말을 탄 채 웃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린 모습이 지금의 그와 겹쳐졌다. 어깨에 손을 얹은 근위 기사는 중년의 사내로, 갑주 위에 크로포드 가문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비비안은 무심코 액자를 집어 들었다.

기사의 목 오른쪽에 희미한 칼자국이 빛에 비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이 상처.

시선이 급격히 에단의 왼손으로 옮겨갔다. 어젯밤 복도에서 그가 손바닥을 펼쳤을 때, 독초 접촉 흔적이라던 그 자리.

똑같은 방향이었다.

목을 감싼 손. 어린 왕세자를 가리려 했던 손.

칼날이 목을 겨누었을 때 기사가 앞을 막아섰다면, 그 손바닥은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향했을 터였다. 검을 든 자의 반대편에서.

비비안이 천천히 액자를 내려놓았다. 유리 표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짙은 녹색 눈동자가 조금 커져 있었다.

이 기사가 바로…….

그 순간,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군화 소리였다. 그녀는 액자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책상을 등진 채 창가로 걸어갔다.

문이 열리고 에단이 들어섰다.

군복 소매에 밤이슬이 조금 묻어 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 서류철을 던지듯 내려놓고 목을 풀었다. 피곤이 배인 눈매가 창가의 그녀를 향했다.

“오래 기다렸나.”

비비안은 고개를 저었다.

“결과는요.”

“셀레나의 구금 시설이 결정됐다. 공개 재판 전까지 북쪽 탑이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는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외투를 벗어 걸었다. 비비안은 여전히 창가에 선 채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에단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비비안은 액자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사진 속 근위 기사분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에단의 눈빛이 한순간 굳었다.

“어릴 적 날 가르치던 분이다.”

“목의 칼자국은요.”

집무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에단은 대답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아침 햇살이 두 사람 사이의 먼지를 비추었다.

비비안은 창가에서 한 걸음 다가섰다.

“그 자국은 전하의 왼손 흉터와 방향이 같습니다. 누군가의 검을 막을 때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그만.”

에단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말리려는 듯한 손짓이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성수 관수 시스템에 독을 탄 자와……”

비비안의 숨결이 가빠졌다.

“전하를 암살하려 한 자가 동일인입니까.”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액자 속 소년이 웃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이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그래.”

한마디뿐이었다. 그 짧은 대답에 수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비비안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알고 계셨으면서…… 저에게 말하지 않으셨군요.”

“알려줄 이유가 없었다.”

“성수 아래에서 은빛 가루를 발견한 그날 밤에도요?”

에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비비안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신뢰.

계약 약혼은 조건이었다. 성수 회복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느 순간 그를 동맹이라 믿었다.

그 믿음이 지금 무너지고 있었다.

“왕실 추문을 우려하신 겁니까.”

비비안의 존댓말이 전보다 차가워졌다.

“근위 기사의 배신을 감췄을 때…… 3년간 독초 관수를 눈치채지 못하게 했을 때…… 그때도 왕실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까.”

에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금색 눈동자에 창백한 빛이 스쳤다.

“그자가…… 죽었다.”

비비안의 숨이 멎었다. 에단의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움켜쥐어졌다. 독초 흉터가 하얗게 부각될 정도로.

“체포하기 전에. 내 손으로 심문하려 했던 날 밤, 감방 안에서 사라졌다. 독을 삼킨 채로.”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한 음절마다 깎아낸 듯 매끄러웠다.

“3년 전 그날, 나는 두 가지를 한 번에 잃었다. 성수와…… 증인을.”

비비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섯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꽉 쥐고 있던 분노가 조용히 떨어져 나갔다.

분노가 아니라.

이 감정은 실망이었다.

“전하.”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저는 당신의 동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에단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삼켰다.

나를 보호하려 했다.

그 말을 들었다면 달랐을까.

계약 때문에 감정을 숨긴 거라면.

이 거리두기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 기사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비비안이 물었다. 에단은 오래 침묵했다.

“말할 수 없다.”

“왜입니까.”

“그 이름은 이미 사형수가 된 자의 것이다.”

비비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우치 속 도감의 모서리가 손끝에 닿았다. 어젯밤 성수 아래에서 확증했던 결정체의 푸른 인광이 떠올랐다.

“저는 앞으로도 제 방식대로 조사하겠습니다.”

그녀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계약은 그대로입니다. 성수를 되살리면…… 그걸로 끝입니다.”

에단이 발걸음을 옮겼다. 딱 한 걸음.

“비비안.”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그녀의 등이 굳었다. 평범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입에서 나오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처음이다.

계약 서명 이후, 그가 그녀의 이름을 말한 것은.

“나는……”

에단의 목소리에 금이 갔다. 그러나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검은 단발이 이마를 가렸다.

비비안은 문고리를 잡았다. 손등에 핏줄이 조금 올라와 있었다.

“돌아가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에단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서 은색 액자가 조용히 그를 비추었다.

그가 손을 뻗어 액자를 집어 들었다. 유리 속 소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기사의 손은 변함없이 소년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에단의 손바닥이 유리 너머 기사의 얼굴을 가렸다. 왼손 흉터가 사진과 포개졌다.

상실은 언제나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약초 냄새가 복도까지 밀려왔다. 비비안은 마커스의 연구실 문을 두 번 두드리고 기다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건조대에 걸린 약초 다발이 움직임에 흔들렸다.

마커스가 증류기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손끝에 묻은 푸른 즙을 행주에 닦으며 실눈을 더 좁혔다.

“로즈우드 영애. 얼굴이 평의회 때보다 못하군요.”

“웰튼 경.”

비비안이 작업대 앞으로 걸어갔다. 허리춤 파우치에서 은루나 결정체 샘플을 꺼내 유리병째 올렸다.

“확인받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마커스가 병을 집어 들었다. 창가로 가서 빛에 비추자 결정체가 체온에 반응해 희미한 푸른 인광을 띠었다.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77페이지.”

마커스가 낮게 읊조렸다.

“제가 드린 도감으로 확인하셨군요.”

“셀레나 하워드의 손수건에서 동일한 향이 두 번 났습니다.”

비비안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갈라졌다. 마커스가 병을 내려놓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제된 은루나 뿌리 수지 향이죠. 매일 손수건에 배게 할 정도로 오래 다뤘다는 뜻입니다.”

그가 작업대 밑 서랍에서 낡은 가죽 폴더를 꺼냈다. 봉인 끈을 풀자 누렇게 바랜 문서 더미가 쏟아졌다. 가장 위의 종이에는 30년 전 날짜가 찍혀 있었다.

“선대 약제사, 제 스승의 은루나 독성 분석 기록입니다.”

마커스의 실눈이 완전히 떠졌다. 회색 눈동자가 비비안을 직시했다.

“셀레나가 온실 후원금을 독점 기부한 시기와 성수 관수 시스템 보수 공사가 겹친 게 3년 전. 은빛 가루의 유입도 그 무렵 시작됐어요. 일치가 너무 정확하죠.”

비비안이 문서를 받아 들었다. 첫 페이지의 해부도 아래로 은루나 뿌리 수지의 알칼로이드 사슬 구조가 그려져 있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 데이터를 제게 맡기시는 이유는.”

“개인적인 복수.”

마커스가 웃었지만 입가에 주름만 깊어졌다.

“밀고자를 알고 있었죠. 하워드 가문. 30년간 증거를 모았고, 이제 영애가 그 끝을 보여줬습니다.”

작업대 위로 약초 씁쓸한 내음이 가라앉았다. 비비안이 폴더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공동 수사로 전환합니다. 제 독자 판단입니다만, 웰튼 경의 자료를 법정 증거로 써도 되겠습니까.”

“이미 셀레나 구속됐으니 거부할 명분은 없죠.”

마커스가 증발접시를 치우며 어깨를 으쓱였다.

“한 가지. 전하께는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비비안의 손가락이 폴더 가장자리를 눌렀다.

“그분께는 제가 직접.”

오후 햇살이 집무실 창문을 비스듬히 관통했다. 에단은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사진틀이 왼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고, 손바닥의 흉터가 펜 굳은살 위로 드러나 있었다.

문이 열렸다. 비비안이 들어와 멈췄다.

“전하.”

평소보다 한 박자 늦게 문이 닫혔다.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단발 아래 황금색 눈동자가 잠시 비비안의 품에 안긴 폴더에 멎었다.

“마커스에게 갔군.”

“예.”

비비안이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폴더를 내려놓지 않았다.

“셀레나 하워드의 손수건에서 은루나 정제 향이 확인됐습니다. 3년 전 하워드 가문의 온실 후원과 관수 공사 시기가 독초 유입과 정확히 겹친다는 데이터도 확보했어요.”

에단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건 평의회에서 이미——”

“이건 공식 수사 자료가 아닙니다.”

비비안이 그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호흡이 한 번 끊겼다.

“제가 직접 확보한 독자 증거입니다.”

에단이 천천히 일어났다. 집무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무슨 뜻이지.”

“계약 조항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성혼서 어디에도 제가 전하의 수사 권한에 종속된다는 문구는 없었어요.”

비비안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폴더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 대신 가슴에 더 단단히 안았다.

“저는 오늘부터 당신의 계약 상대가 아니라, 공동 수사자입니다.”

에단의 숨소리가 변했다. 책상 모서리를 짚은 손가락이 살짝 굽어졌다.

“위험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알고 있습니다.”

“금지 구역에 접근하려면 약제사 권한이 필요하다. 하워드 영지의——”

“그것도 알고 왔습니다.”

비비안의 푸른 눈동자가 에단을 똑바로 바라봤다.

“검은이끼풀 자생지에 직접 가겠습니다. 거부하셔도 상관없어요. 제 권한으로 진입할 방법은 따로 찾겠습니다.”

에단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황금색 눈동자가 좁아지고 입술이 열렸다.

“안 된다.”

“전하.”

“내가 막겠다.”

짧은 단어에 전에 없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에단이 책상에서 손을 떼고 비비안 쪽으로 반 걸음 움직였다. 어깨 너비만큼 좁혀진 거리. 오후 햇살이 책상 위 사진틀을 비스듬히 스쳤다.

“당신까지 잃을 수는 없다.”

비비안의 손가락이 폴더 끈을 꽉 움켜쥐었다. 반 박자 침묵.

“……그 말씀, 계약 범위를 벗어나셨습니다.”

에단의 숨이 멎었다. 비비안이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내일 아침 하워드 영지로 출발하겠습니다. 자료는 웰튼 경과 공유할 예정이니, 전하께서 거부하셔도 수사는 계속됩니다.”

등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관자놀이에 묵직한 압박이 스몄다. 교정력이었다.

또야.

머릿속이 살짝 흔들렸다. 숨을 들이켜고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발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관자놀이의 압박이 맥박처럼 뛰었다.

“……내 방식대로.”

비비안이 낮게 속삭였다. 폴더를 품에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진실을 찾겠다.”

집무실 문 뒤에서 무거운 침묵이 흘러나왔다. 비비안은 고개를 들고 복도를 걸었다. 발소리가 돌바닥에 또렷이 남았다.

“전하.”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저는 당신의 동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에단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삼켰다
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