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혈사문의 마지막 밤

11화

자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사현은 혈사문 본거지 북쪽 외곽 담장에 몸을 붙였다. 높이 두 길 반, 거친 돌벽 곳곳에 손가락을 걸 틈이 나 있었다. 왼손을 뻗어 틈새를 짚자 얼음 같은 냉기가 손끝에 스몄다.

오른손으로 허리춤 검 손잡이를 한 번 눌러 확인했다. 품 속 약도는 이미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외곽 초소 세 곳, 순찰 간격 반 시진, 교대 시각은 자시 정각.

발을 굴러 담장 중턱까지 단숨에 뛰어올랐다. 양팔 근골이 파열되어 있었지만, 내공 없이 순수 근력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세 번 숨을 쉬는 동안 담장 위로 몸을 끌어올려 엎드렸다.

첫 초소는 이십 보 앞 돌 보루. 횃불 하나가 흔들렸다. 병사 둘—하나는 서서 먼 산을 바라보고, 다른 하나는 보루 안쪽에 걸터앉아 숫돌에 칼을 갈고 있었다.

진사현은 담장 너머로 미끄러지듯 내려섰다. 착지음을 바람이 삼켰다. 상체를 낮추고 돌 틈 사이로 접근하며 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검을 잡기 전에 호흡부터 다스려라. 폐사 뒷마당에서 수없이 반복한 구법의 첫걸음이었다. 들숨과 날숨 사이, 그 멈춤에 걸음을 맞췄다. 숨 참으며 내딛고, 내쉬며 멈추기를 되풀이했다.

서 있던 병사의 등 뒤로 붙어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풍부혈을 찍었다. 병사가 숨 들이쉴 틈도 없이 정신을 놓았다. 쓰러지는 육중한 몸을 왼팔로 받아 조용히 내렸다.

그때 칼 갈던 병사가 고개를 들었다. 입이 열리기도 전에 손이 그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연수혈과 아문혈을 연속으로 가격하자 병사가 돌바닥에 미끄러졌다.

검들을 빼앗아 보루 구석으로 밀어 넣고 주위를 살폈다. 기척은 없다. 횃불은 그대로 두었다—꺼진 불이야말로 확실한 신호였으니까.

두 번째 초소는 사십 보 서쪽. 병사 셋—하나는 길을 서성이고, 둘은 작은 불 앞에 쭈그려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바위 그늘을 따라 이동해 순찰병이 뒤돌아서기를 기다렸다.

불 쪽 두 병사에게 먼저 다가가 오른손으로 찻잔 든 자의 견정혈, 왼손으로 다른 자의 명문혈을 동시에 찍었다. 두 몸이 소리 없이 무너졌다. 순찰병이 발소리를 듣고 황급히 돌아보며 손이 검자루로 향했지만, 거리를 좁히는 속도가 빨랐다.

손바닥 측면으로 측두부를 내리쳐 한 방에 정리했다. 검들을 모아 구석에 놓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양팔의 뻐근함이 더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마지막 초소는 성문 가까이, 보루도 크고 병사도 넷이었다. 그러나 내부 정전 쪽 경계는 의외로 느슨했다. 외부 침입 방어에 특화된 배치일 뿐, 담장을 넘은 침투자를 상대할 구조가 아니었다.

진사현은 보루 뒤 바위산을 타고 올랐다. 경사는 가팔랐지만 발 디딜 틈은 충분했다. 보루 난간에 오르자 네 명 모두 시야에 들어왔다—둘은 잡담 중, 둘은 무기를 손질하는 모습.

난간에서 뛰어내리며 가장 가까운 병사의 신도혈을 찍고, 착지 직전에 두 번째 병사에게 오른발을 뻗어 측부를 걷어찼다. 몸을 굴려 일어서며 무기 손질하던 자의 손목을 꺾어 검을 떨어뜨린 뒤 인당혈을 노렸다. 마지막 병사가 검을 완전히 뽑기도 전에 허리를 한 바퀴 돌리며 수혈을 정확히 가격했다. 넷 모두 쓰러지는 데 열한 호흡.

이제 내부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중앙 전각, 삼십 장 앞.”

진사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외곽과 내부 사이 회랑은 어둡고, 성긴 화로만이 길을 겨우 비추고 있었다. 병사들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서율이 중상을 입고 돌아왔다면 본거지 전력은 내부 방어와 부문주 치료에 집중되었을 터였다.

그는 벽을 따라 전각 앞마당으로 움직였다. 걸음마다 구법에 맞춰 호흡했다. 들숨, 내딛기, 날숨, 멈춤.

그 리듬이 묻어뒀던 기억을 끌어올렸다. 폐사에서의 새벽 훈련, 스승이 말없이 등을 보여주던 마지막 아침. 진사현은 고개를 저었다—지금은 아니다.

전각 앞마당에 들어서자 달빛이 공간 전체를 점령했다. 마당 중앙에 누군가 등을 보인 채 두 손을 뒤로 깍지 끼고 서 있었다. 진홍색 부문주 예복이 달빛을 받아 검게 가라앉았고, 어깨와 가슴 근육은 옷 위로도 위압감을 알렸다. 백발이 섞인 흑발이 관 아래로 흘러내렸다.

서율이 천천히 돌아섰다. 얼굴 절반이 달빛에 잠겼다. 싸늘한 녹색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이고, 오른쪽 뺨의 붉은 실핏줄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굵어졌다.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짓눌러 담은 비아냥이 말끝에서 흘러나왔다. 서율이 오른손으로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벌어지자 왼손은 사람의 살이 아니었다. 검은 쇠로 만든 의수—첫마디부터 없는 약지의 자리까지 정교하게 본떠 있었다. 스승의 손에 잘려나간 자취.

“이거 만든 날부터 네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서율이 입술을 비틀었다. 녹색 눈동자의 살기가 한 겹 더 짙어졌다. 의수가 달빛을 받아 차갑게 반사됐다.

“사형.”

진사현이 검을 뽑았다. 검날과 검집이 갈리는 소리가 고요한 마당에 퍼졌다. 오른손에 쥔 검자루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이 순간을 위해 삼 년을 수련했고, 폐관을 견뎠다. 팔 옆으로 검을 늘어뜨린 채 말을 이었다.

“오늘은 너 하나다. 혈사문 따위에는 관심 없다.”

“그 따위라……”

서율의 의수가 느리게 말려 올라갔다.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가 차례로 접히며 주먹을 만들었다.

“너는 처음부터 그랬지. 커다란 눈으로 스승의 뒷모습만 따라다니던 꼬맹이. 눈치 없이 총애를 혼자 먹던 막내 말이다.”

눈썹 끝의 옅은 칼자국이 달빛에 가늘게 드러났다. 진사현은 대답 대신 검을 허리 높이로 올렸다. 칼끝이 서율의 가슴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왼손은 자연스럽게 검자루 아래를 받쳤다. 구법의 기본 착수식. 스승이 가장 먼저 가르친 자세였다.

서율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녹색 눈동자에 증오가 처음으로 스쳤다.

“그 자세. 아직도 그 낡은 초식을 고집하는군.”

진사현은 칼끝을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의 굳은살이 검자루에 밀착되었고, 몸은 이미 다음 동작으로 이행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서율이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가자 천천히 검이 뽑혀 나왔다. 검날이 달빛을 머금고 푸르게 번쩍였다.

달빛만이 침묵을 견디고 있었다.

대치를 깬 것은 서율의 의수 쪽이었다. 약지가 없는 왼손. 가죽 장갑 아래 움직임마다 미세한 쇳소리가 났다. 진사현 앞에서는 더 이상 숨길 의미가 없었다.

서율의 오른손이 독문검을 비스듬히 쳐들었다. 검날에 달빛이 번지자 핏물을 머금은 듯한 붉은 빛이 일었다.

“삼 년 만에 온 사제에게 문주로서 예를 갖춰야지 않겠나.”

말끝의 비아냥이 칼날보다 얇았다. 진사현은 대답 없이 검을 쥔 채 호흡을 낮췄다. 왼쪽 갈비가 욱신거렸다. 근육이 굳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왜 말이 없나.”

서율이 묻자 진사현은 시선으로 답을 대신했다.

서율이 먼저 발을 뗐다. 좌측으로 반 보, 상체를 기울이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다. 혈영십삼검의 첫 초식이 공기를 갈랐다. 진사현은 물러서지 않고 검을 수직으로 세워 정면에서 받았다. 손목을 타고 전해지는 내공이 예상보다 무거웠다.

“중상을 입고도 이 정도인가.”

진사현이 낮게 내뱉었다.

두 번째 초식이 이어졌다. 옆으로 휘두르는 듯하다가 중간에서 방향을 꺾어 오른쪽 옆구리를 노렸다. 진사현은 몸을 반 바퀴 돌리며 흘려냈으나 검날이 도포를 찢었다.

“폐관에서 뭘 배웠는지 보여줘 봐라.”

서율의 녹색 눈동자에 광기가 점멸했다. 세 번째 초식은 위, 아래, 측면에서 동시에 들어오는 착시를 만들었다. 혈영십삼검의 잔영.

진사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검을 몸 앞에 두어 작은 원을 그렸다. 궁극기가 아니었다. 스승에게 배운 기본 검법—삼 년간 반복한 동작을 근육이 기억하고 있었다.

쇠 부딪히는 소리가 세 번 울렸다. 모두 막혔다. 왼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양팔의 근골은 여전히 파열된 상태.

“기본으로 막아내다니, 제법인데.”

서율이 한 걸음 물러서며 숨을 골랐다. 철면노괴에게 당한 가슴 관통상이 덜 아물어 숨소리에 불규칙성이 실렸다.

“전대 부문주에게 배운 것치고는 초라하군. 네놈이 가진 비급의 마지막 장 말이다. 결국 열었지?”

진사현의 침묵 위로 서율의 웃음이 번져 내렸다. 뺨에서 붉은 실핏줄이 꿈틀거렸다.

“열었군. 그 늙은이의 꿈을 삼킨 독을 네놈이 마셨단 말이다.”

서율이 다시 움직였다. 네 번째 초식의 속도가 확연히 빨라졌다. 왼쪽 어깨를 노린 검날이 머리 위를 스치자 진사현은 반 박자 빠르게 상체를 숙이고 오른발을 내디디며 찔러 들어갔다. 가장 기본적인 찌르기. 서율이 검으로 쳐내며 물러났지만 발이 반 보 늦었다.

찰나의 균열. 진사현은 그 틈을 감지하고 집중을 놓지 않았다. 서율의 검은 화려했다.

그러나 그 화려함 속에 이질적인 움직임이 섞여 있었다. 다섯 번째 초식을 풀어낼 때 분명히 보았다. 오른쪽 어깨가 먼저 들리는 준비 동작.

혈영십삼검의 본래 투로에는 없는 버릇이었다. 화산파 검법에 가까운 자세—정파의 검리가 섞여 있었다. 혈사문 독문무공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형식.

“눈썰미가 좋아졌군.”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초식에서도 반복되었다. 검을 거둘 때 손목을 바깥으로 꺾는 각도,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할 때 오른발을 살짝 드는 버릇까지. 하나하나가 정파 검법의 특징과 일치했다.

“알아챈 모양이야. 그렇지.”

여덟 번째 초식이 수평으로 그어져 내려왔다. 진사현은 검을 세워 막았다. 왼쪽 손목이 삐끗하며 근골이 비명을 질렀다.

서율의 숨은 더욱 가빠지고 있었다. 가슴 상처가 다시 벌어졌는지 도포 위로 어두운 얼룩이 확산됐다. 그러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걸려 있었다.

“맞다. 이건 혈사문의 무공이 아니다. 네가 폐관에 틀어박혀 있을 때, 밖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어. 누군가는 힘을 원했고, 누군가는 그 힘을 사려 했다.”

서율이 오른손으로 의수를 만지작거렸다. 약지가 없는 왼손. 그 손가락을 자른 스승에 대한 증오와 그 스승의 비급을 탐하는 욕망이 같은 손끝에서 떨리고 있었다.

“나는 평생 그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들이 먼저 찾아왔지. 우리 문주님께서 원하시는 게 뭔지 제대로 아는 자들 말이다. 그중 한 분이 내게 말하더군. 혈사문의 독문무공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진정한 강자는 모든 검을 이해하는 자라고.”

증오에 불타는 눈이 진사현을 뚫어지게 보았다.

“이게 네놈과 나의 차이다. 네놈은 그 늙은이의 유산에 매달렸고, 나는 그 너머를 봤다.”

서율의 검날에서 붉은 기운이 번졌다.

“죽어라, 사제. 여기가 네 무덤이다.”

혈영십삼검의 아홉 번째 초식이 일직선으로 뻗어왔다. 그때 진사현은 보았다. 정파 검법을 섞으면서 오히려 혈영십삼검 본래의 흐름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서로 다른 검리가 충돌하며 발생한 배타성. 독문무공의 철칙이었다.

진사현은 방어를 버렸다. 오른발을 반 걸음 앞으로 내디디고 상체를 깊이 숙여 서율의 검날이 왼쪽 어깨 위를 지나가게 놔두었다. 옷이 찢기고 살갗이 벗겨졌다. 피를 볼 겨를도 없이 진사현의 검이 뻗어나갔다.

스승에게 처음 배운 날, 천 번을 반복한 바로 그 찌르기.

검끝이 서율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근육과 힘줄을 관통하는 감각이 손에 전해졌다. 서율의 몸이 뒤로 꺾이며 독문검을 놓쳤다. 진사현은 검을 뽑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전각 기둥에 부딪친 서율의 등에서 먼지가 일었다.

서율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광기는 더 깊어졌다.

“전대 부문주가…… 네놈에게만 준 것이 뭔지…… 이제야 알겠구나……. 그 복잡한 비급의 이치를…… 이렇게 단순하게 풀어내다니…….”

서율의 오른손이 진사현의 검날을 움켜잡았다. 손바닥이 베여 피가 흘렀지만 더 세게 쥐었다. 의수를 낀 왼손은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네놈만 받은 선물이었나…… 그 기본 찌르기를…….”

진사현은 검을 거둬들였다. 피가 솟아 기둥을 타고 바닥으로 흘렀다. 한 걸음 물러섰다. 달빛 아래 드러난 검날은 붉은 기운 없는 평범한 강철이었다.

서율이 무릎을 꿇었다가 옆으로 쓰러져 기둥에 기대었다. 왼쪽 어깨 구멍에서 피는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혈관이 터진 눈이 진사현을 올려다보았다.

“찌르지 않는 것이냐…….”

진사현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검끝이 서율의 목을 향했다. 거리는 석 자.

“사형.”

진사현의 목소리엔 떨림이 없었다.

“너를 죽이러 왔다. 누구의 사주인지는 묻지 않겠다.”

서율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곧 광기가 그 자리를 메웠다. 피가 섞인 웃음이 낮게 시작되어 점점 커졌다. 전각 앞마당을 가득 채우는 광소가 달빛 아래로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바닥에 대칭을 만들었다. 검을 겨눈 자와 기둥에 기대어 웃는 자. 스승의 유품 검, 그 스승에게 손가락을 빼앗긴 의수. 그 사이로 검은 피가 흘렀다.

진사현의 검이 내려가지 않았다. 손목에 힘은 실려 있었지만 근육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왼손이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 손목을 감싸 쥐었다. 생전에 스승이 내공을 점검하며 꼭 잡아주던 그 부위.

서율의 웃음이 멎고 숨소리만 남았다.

“찌르지 못하는 것이냐. 사제야.”

“사형.”

진사현이 불렀다. 그때, 먼 곳에서 무질서하면서도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횃불의 빛이 어둠을 뚫고 점점 커졌다. 혈사문 본대가 앞마당으로 몰려오는 중이었다.

진사현은 듣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내려가지 않았다. 달빛이 칼날 위에 멈춰 있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는 그대로였다. 가까워지는 횃불이 그림자의 경계를 한층 더 선명하게 만들 뿐이었다.

진사현의 왼손이 손목을 더 세게 감쌌다.

혈사문의 마지막 밤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