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사문의 마지막 밤
2화
발소리 하나 폐사 문턱을 넘었다.
진사현은 오른손으로 검집을 밀어 올렸다. 반 촌 드러난 칼날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번뜩였다. 왼손은 위소월의 어깨를 짚어 바닥으로 눌렀다.
“숨 죽여.”
위소월은 엎드린 채 고개만 들었다. 입술이 벌어졌지만 소리는 새어나오지 않았다. 호박색 눈동자가 문 쪽을 향했다.
네 명. 발걸음이 균일하다. 무인이다. 대화는 없다. 손짓만으로 신호를 주고받는지, 바람에 옷깃 스치는 소리만 어둠을 오갔다.
진사현은 폐사 기둥 뒤로 몸을 붙였다. 오른쪽 어깨 상처가 옷깃에 닿으며 쑤셔왔으나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검집을 살며시 내려놓고 장검만 오른손에 쥐었다.
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안쪽이다. 불빛이 없으니…….”
“들어간다.”
두 개의 실루엣이 법당 안으로 진입했다. 검은 복면에 각자 짧은 날을 쥐고 있었다. 자세가 낮다. 암습에 익숙한 걸음걸이였다.
진사현은 숨을 멈췄다.
복면 둘이 흩어졌다. 한 명은 불단 쪽, 다른 한 명은 기둥 쪽으로 접근했다. 위소월이 엎드린 자리에서 오른손을 살짝 움직였다. 허리춤으로 손가락을 뻗어 무언가 닿을 듯 말 듯 폈다.
기둥 쪽 복면인이 위소월을 발견했다. 걸음을 멈추고 쥔 날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진사현이 튀어나왔다.
장검이 수평으로 그어졌다. 상대의 날을 쳐내자 쇳소리가 폐사를 울렸다. 되돌아오는 탄력에 검을 밀어 넣었다. 검첨이 복면인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찔렀다. 뼈에 닿는 감각, 즉시 검을 빼내며 뒤로 물러섰다.
“적이다!”
복면인이 비틀거리며 외쳤다. 불단 쪽에 있던 자가 달려들었다. 바깥에 남은 둘도 법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진사현은 위소월과 등을 맞대듯 서서 검을 들었다.
“묶은 손 풀어.”
짧은 명령이었다. 위소월이 이미 반쯤 풀린 결박을 완전히 벗었다. 손목을 비비며 일어서자 오른손이 허리춤으로 갔다.
복면 셋이 반원을 그리며 압박해왔다. 어깨를 찔린 자는 왼손으로 무기를 바꿔 쥐고 뒤에서 숨을 골랐다.
진사현은 검끝을 바닥에 낮춘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대의 보법을 확인했다. 오른쪽 자가 발을 반 보 내밀었다. 진입각은 비스듬, 목표는 측면.
“혈사문의 앞잡이냐.”
진사현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대답 대신 가운데 복면인이 뛰어들었다. 짧은 날이 위에서 아래로 찍혔다. 진사현은 검을 비스듬히 들어 충격을 흘려보내며 왼쪽으로 한 걸음 돌았다. 검날이 미끄러지며 상대의 손목을 그었다. 핏방울이 흩어지기 전에 오른발을 내디뎠다.
보법은 직선.
검첨이 가운데 자의 옆구리를 스쳤다. 옷이 찢어지고, 어둠 속에서 비린내가 올라왔다.
왼쪽 복면인이 위소월에게 달려들었다.
위소월은 물러서며 품에서 날을 뽑았다. 두 개의 쇠가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체구 차이에 밀려 한 걸음 물러섰지만 곧바로 자세를 바로 잡았다. 새끼손가락이 손잡이 아래에서 살짝 접혔다.
진사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검을 들어 올린 채 발끝을 바깥으로 벌렸다.
“셋.”
자신을 향한 상대가 셋임을 확인하는 중얼거림이었다.
가장 멀리 있던 자가 갑자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표창 두 개가 날아왔다. 진사현은 상체를 젖혀 하나를 피하고, 다른 하나를 검으로 쳐냈다. 표창이 기둥에 박혔다.
그 틈에 나머지 둘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좌우 협공. 진사현은 오른쪽 상대의 날을 검으로 감아 돌리며 왼쪽으로 흘렀다. 오른쪽 자의 손목이 꺾이며 쥐었던 것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기세로 왼쪽 자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왼쪽 팔꿈치를 상대 명치에 찔러 넣었다. 숨이 터져 나오는 소리. 무릎으로 복부를 차올린 뒤 어깨로 밀쳐냈다. 상대가 뒤로 넘어졌다.
그 사이 오른쪽 자가 왼손으로 바닥의 날을 주워 찔러왔다. 진사현은 비틀어 피하며 검을 옆으로 그었다. 허벅지 깊숙이 베이자 상대가 무릎을 꿇었다.
이제 넷 중 둘은 전투 불능. 하나는 위소월과 대치 중.
표창을 던진 자가 마지막 남은 날을 빼 들었다. 자세가 달랐다. 역수로 쥐고 중심을 낮게 깔았다. 살수다.
“누구 의뢰냐.”
진사현이 물으며 검끝을 상대 눈높이에 맞췄다.
대답 없이 살수가 뛰어들었다. 역수로 쥔 날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왔다. 진사현은 뒤로 물러서며 검을 내리쳐 그 움직임을 아래로 눌렀다. 두 날이 맞물렸다. 힘겨루기.
살수의 왼손이 허리춤으로 갔다. 또 다른 쇠붙이가 반짝였다.
진사현은 즉시 검을 밀어내며 거리를 벌렸다. 살수의 왼손에 쥐어진 짧은 비도가 허공을 갈랐다.
호흡 한 번.
진사현이 먼저 들어갔다. 검을 수평으로 내지르며 보법을 세 번 바꿨다. 살수는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쳐냈지만, 세 번째 전환에서 타이밍을 놓쳤다. 검끝이 살수 왼쪽 어깨를 뚫고 들어갔다. 뼈가 갈라지는 둔탁한 소리.
살수가 비명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뒤돌아보니 위소월이 상대를 제압한 직후였다. 날이 복면인의 목께에 닿아 있었고, 상대는 양손을 들고 있었다.
“죽이지 마.”
진사현이 말했다. 위소월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사현은 네 명의 복면인을 기둥에 한 줄로 앉혔다. 부상 정도를 훑었다. 치명상은 없다. 팔다리 근육을 골라 베었고, 출혈은 있으나 즉사할 곳은 아니었다.
어깨를 꿰뚫린 살수의 복면을 벗겼다. 나이는 서른 안팎. 날카로운 눈매에 왼쪽 뺨에는 가느다란 칼자국.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의뢰인.”
진사현이 검끝으로 상대 턱을 들어 올렸다.
살수는 입가를 비틀며 억지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죽이든 말든.”
진사현은 검을 내렸다. 대신 상대 오른쪽 손바닥을 짚었다. 검지와 중지에 단련된 굳은살이 자리 잡은 손가락이었다. 그중 하나를 뒤로 젖혔다.
우두둑.
살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명이 목구멍에서 멎었다.
“한 번만 더 묻는다. 의뢰인.”
“혈…… 혈사문이다! 혈사문 외청! 부문주님……!”
살수가 말을 토해냈다. 진사현은 손을 놓았다. 부러진 손가락이 힘없이 늘어졌다.
“부문주의 위치.”
“모른다……. 정말 모른다! 우리는 중간에서 지령만 받았을 뿐…….”
“누구에게.”
“동수루 앞, 사흘에 한 번. 암호는 ‘서풍이 분다’.”
진사현은 일어섰다. 정보는 충분했다. 살수들을 차례로 훑어보며 품속을 뒤졌다. 은자 몇 닢과 표창, 지령문 하나가 전부였다. 지령문을 펼쳤다.
‘폐사에 은거한 복수귀를 제거하라. 생포하지 말 것. 완료 후 동수루로 복귀.’
글씨체에 눈에 익었다. 전령죽간에 쓰인 것과 같은 필체. 혈사문 외청의 공용 서체였다.
위소월이 다가왔다. 허리춤에 손을 둔 채로, 손끝이 살짝 떨렸다.
“동수루라면…… 제가 아는 곳입니다.”
진사현이 고개를 돌렸다.
“혈성단이 한 달 전쯤 그 주변을 순찰했어요. 의뢰받은 건 아니었고…… 우연히 지나친 거였는데.”
위소월이 말을 이었다.
“그때 단원 하나가 동수루 뒷편 골목에서 피 묻은 천 조각을 발견했어요. 별일 아니라고 넘겼는데…….”
“그 단원. 누구냐.”
“저…… 모릅니다. 당직표를 봐야 알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왜…….”
“혈사문이 미끼를 쓴 거다. 너희는 순찰 기록을 남겼고, 혈사문은 그 기록으로 침입자를 감시했다.”
위소월의 얼굴이 굳어졌다. 호박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크게 떠졌다. 손에 쥔 것이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그럼 저는…… 처음부터…….”
“이용당했다.”
진사현은 짧게 끊었다. 살수들의 상처를 천으로 대충 동여매며 말을 이었다.
“네 순찰, 네 보고, 네 임무. 전부 혈사문 정보망에 들어갔다. 너는 몰랐을 거다. 몰랐기 때문에 더 쓸모 있었다.”
위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끼손가락이 접힌 채 굳어 있었다. 배신감이 얼굴 전체로 번졌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내가…… 저도 모르게 그들을 도운 거군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존댓말이었지만 어미가 떨렸다.
진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령문을 접어 품에 넣고 살수들을 기둥에 묶었다. 끈을 당길 때마다 어깨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손놀림은 정확했다.
“이들은?”
위소월이 물었다.
“내일 아침이면 혈성단이 올 거다. 네 실종 추적 중이니까.”
“그걸 어떻게 아시죠?”
“한 시진 전에 네 임무 지휘관이 신호연기를 올렸다. 붉은 연기. 추적 신호다.”
위소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찾는 혈성단의 신호를 진사현이 먼저 알아챘다는 사실이 혼란을 더 깊게 만들었다.
진사현은 폐사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에 별이 선명했다. 동풍이 불어와 옷자락을 스쳤다. 무심코 손목을 만졌다. 소매 아래 오래된 화상 흉터가 손끝에 닿았다.
삼 년.
스승이 돌아가시고 삼 년. 복수는 이제야 첫 발을 뗐다. 살수들의 정보에 따르면 부문주는 동수루 근처에서 사흘에 한 번 연락책을 만난다. 사흘. 그 안에 찾아야 한다.
“그 은신처…….”
위소월이 뒤따라 나왔다.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날은 이미 칼집에 들어가 있었다.
“제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사현이 뒤돌아봤다. 위소월은 두 손을 꽉 쥐고 서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에 혼란과 결심이 뒤섞여 흔들리고 있었다.
“왜.”
“저를 이용한 배후가 누군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혈성단 내부에 혈사문의 연락책이 있다는 걸…… 그냥 넘길 수 없어요.”
위소월의 말투는 또박또박했지만 평소보다 속도가 빨랐다.
“이건 제 책임이기도 해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흘린 정보로 사람이 죽을 뻔했으니까요.”
진사현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위소월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동수루 근처. 네가 아는 은신처는 어디냐.”
“남쪽 골목 끝에 버려진 약재상이 있어요. 삼 년 전에 문 닫은 곳인데…… 지하에 저장고가 있었어요.”
“규모.”
“스무 명은 숨을 수 있을 정도였어요. 출입구는 둘. 앞문은 봉쇄됐고, 뒷문은 골목 쪽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진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동선을 그렸다. 폐사에서 동수루까지 산길로 반 시진. 지금 출발하면 자시 전에 도착한다.
“가자.”
짧은 명령이었다. 위소월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요?”
“사흘에 한 번. 오늘이 그 사흘째 되는 날일 가능성이 있다. 놓치면 다시 사흘.”
진사현은 폐사 안으로 돌아가 검집을 챙겼다. 바닥에 놓인 검을 집어 넣으며 어깨 상처를 확인했다. 출혈은 멎었다. 움직임에 약간의 둔함이 있었지만 전투는 가능했다.
위소월은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진사현은 대답 없이 검을 찼다.
“왜 저를 죽이지 않으시는 거죠? 인질로서 가치는 이제…….”
“정보.”
진사현이 말을 끊었다.
“너는 혈성단 내부를 안다. 혈사문이 어떻게 연계되는지도 알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 왼손이 무심코 손목을 감쌌다. 손가락이 소매 아래 흉터를 짚었다. 스승이 생전에 내공을 점검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네가 옳다고 믿던 것들이 무너진 자리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보고 싶다.”
위소월의 눈동자가 떨렸다. 진사현은 그 시선을 피해 폐사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행한다면 조건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내 지시에 절대 복종한다. 위험하면 혼자 도망친다. 그리고…….”
진사현이 발걸음을 멈추고 위소월을 돌아봤다.
“복수는 내 몫이다. 네가 끼어들 자리 없다.”
위소월은 잠시 망설였다. 새끼손가락을 접은 채 숨을 들이켰다.
“알겠습니다. 대신…….”
“대가냐.”
“부문주를 찾으면, 혈성단 내부의 연락책이 누군지 확인하게 해주십시오. 그게 제 복수입니다.”
진사현은 잠시 생각했다. 이 소녀가 혈성단의 연락책을 추궁하면 어떤 소란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소란이 오히려 혈사문의 이목을 분산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좋다.”
짧은 대답이었다.
두 사람은 폐사 앞마당에 섰다. 동풍이 잦아들고 별빛 아래 잡초가 흔들렸다. 진사현은 동수루 방향의 산길을 바라봤다.
“출발한다.”
위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폐사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발걸음이 풀숲을 스쳤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산등성이를 향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