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혈사문의 마지막 밤

5화

철면노괴의 말이 동굴 안을 울렸다가 가라앉았다. 진사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채 노인의 백내장을 올려다봤다. 눈빛에는 답 대신 답을 찾는 방향만 남아 있었다.

위소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나서고 싶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손끝만 차갑게 식어갔다.

철면노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뒷목의 힘줄이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삐걱였다.

“네놈의 눈.”

“……눈?”

“스승과 다르다. 그건 분명하군.”

진사현이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무릎에서 돌가루가 떨어졌다. 검을 쥔 손은 여전히 단단했다.

“시험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

“조건을 말해라.”

철면노괴가 입매를 비틀었다. 미소인지 경련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조건이라.”

소매 속에서 뒤틀린 왼팔이 움직였다. 갈고리처럼 굳은 손가락이 허공을 한 번 쥐었다 폈다. 관절이 움직일 때마다 뼈 가는 소리가 작게 났다.

“네놈에게 비급 후반부를 전수하겠다.”

위소월의 호흡이 한 번 끊겼다. 직감했다. 이 노인이 무턱대고 주는 법이 없다.

진사현도 알았다. 그래서 기다렸다.

“대신 진심을 보여라.”

“진심.”

“복수라는 두 글자로는 부족하다. 누구나 그 말은 할 수 있지.”

노인의 회색 눈동자가 좁혀졌다. 백내장 너머로 날카로운 빛이 스며나왔다.

“무엇을 버릴 수 있느냐. 무엇을 견딜 수 있느냐. 그걸 증명하란 말이다.”

침묵이 흘렀다. 세 호흡 정도.

진사현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을 펼치자 손목 안쪽으로 희미한 혈흔 자국이 드러났다.

“스승의 마지막 밤. 도망치라는 명을 받았다.”

목소리는 건조했다. 사실을 나열할 뿐이었다.

“듣지 않았다. 스승은 나를 벽장 속에 처넣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접혔다.

“틈새로 봤다. 사형제들이 쓰러지는 걸. 스승의 목이 날아가는 걸.”

주먹이 만들어졌다.

“숨죽여야 했다. 죽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스승의 마지막 명령이 발목을 잡았다.”

철면노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진심이냐.”

“복수는 이미 선택이 아니다.”

진사현의 검지가 검자루를 두드렸다. 손톱과 금속이 부딪혀 딱, 하는 맑은 소리가 났다.

“숨 쉬는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다. 그게 복수다.”

위소월이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철면노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화상 자국이 덮인 얼굴 절반이 촛불 없는 어둠 속에서 더 깊게 패여 보였다.

“…… 한 가지 묻지.”

“해라.”

“네놈은 스승이 마지막에 무얼 깨달았는지 아느냐.”

진사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모른다.”

“당연하지. 네놈 스승은 그걸 깨닫고 등졌으니까.”

위소월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등졌다는 말. 앞서도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말에 무언가 더 실려 있었다.

“직접 말해주마.”

철면노괴가 벽 쪽으로 턱짓했다. 암벽에 금이 간 자리에 손가락을 밀어넣자 돌이 밀리는 소리가 나더니, 틈새에서 낡은 천 조각이 떨어졌다.

노인이 집어 바닥에 펼쳤다. 천은 뻣뻣하게 굳은 채 색이라고 할 것도 없이 누런 바탕에 검붉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쟁기혈(爭氣穴). 아느냐.”

진사현이 천 조각의 혈 자리를 응시했다. 검붉은 얼룩은 글자 위에 덧입혀져 있었다. 묵서가 먼저였고, 피가 나중이었다.

“두 어깨뼈 사이. 내공을 급격히 끌어올릴 때 가장 취약해지는 혈.”

“그래.”

철면노괴가 천 조각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내 옛 제자가 이 혈을 찔려 죽었다.”

동굴 안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무거워졌다. 공기 자체가 진흙으로 변한 듯했다.

“누구에게.”

진사현이 물었다. 짧았다. 그러나 음절마다 긴장이 실려 있었다.

“서율.”

위소월이 숨을 들이켰다.

“서율은 그때 혈사문주가 아니었다. 문주 직속의 호법(護法)이었지. 나보다 열 살은 어리고, 겉으로는 누구에게나 공손한 놈이었다.”

철면노괴의 목소리가 한 톤 가라앉았다. 냉소는 여전했지만 그 밑바닥에 다른 것이 깔려 있었다.

“녀석이 내 제자에게 찾아왔다. 혈사문의 옛 비급에 관해 묻고 싶다고. 그는 문파를 배신한 스승의 제자였다. 배척받아 마땅한 몸이었지. 그런데도 서율은 예를 갖췄다. 차를 대접하고, 밤새 무공을 논했다.”

노인의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갈고리 손가락이 무언가를 움켜쥐듯 구부러졌다.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비급을 보여달라고 했다. 보여줄 수 없다 하니 웃더군. 그러곤 말했다. ‘그럼 가르침을 직접 받겠다’고.”

위소월이 손톱으로 손등을 긁었다. 긴장이 피부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쟁기혈을 찔렀다. 한 방이었다. 제자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피를 토하지도 않았다. 그냥 숨이 멎더군.”

철면노괴가 천 조각을 집어 진사현의 앞으로 밀었다.

“녀석은 그날 밤 제자의 가방을 뒤졌다. 비급은 거기 없었지만, 대신 알았을 터다. 비급의 전편을 꿰뚫는 구결(口訣)이 나에게 있음을.”

진사현이 천 조각을 집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감촉은 보기보다 거칠었다.

“서율은 지금도 비급을 원한다.”

“아마 그럴 테지.”

“당신에게서 그걸 빼앗지 못했기 때문에.”

“빼앗으려면 날 죽여야 한다. 녀석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철면노괴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숨소리에 쇳소리가 섞였다.

“늙어 썩어가는 몸이지만, 서율보다 내공의 연수가 다르다. 한 방으로 찌르는 놈에게 대비하면 그뿐이니까.”

노인이 왼팔을 들어 올리자 뒤틀린 팔이 소매 밖으로 완전히 드러났다. 팔꿈치가 거꾸로 꺾이고 손가락은 갈고리처럼 안으로 굽어 있었다. 관절은 바깥쪽으로 돌출되어 마치 나무뿌리 같았다.

“이건 서율 때문이 아니다.”

진사현이 팔을 응시했다.

“비급의 마지막 장.”

“그래.”

위소월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등이 동굴 벽에 닿자 차가운 돌의 감촉이 등판 전체로 파고들었다.

“비급 후반부를 전수한다면, 먼저 마지막 장의 대가를 알아야 한다.”

철면노괴가 뒤틀린 왼팔을 천천히 내렸다. 관절이 삐걱이며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마지막 초식은 살과 뼈를 갈아엎는다. 수련자의 두 팔을 무기로 바꾸는 대신, 인간의 팔을 거둔다. 관절은 뒤틀리고 손가락은 굳는다. 살은 돌처럼 단단해지고, 대신 통증도 감촉도 사라진다.”

“움직일 수 있느냐.”

“움직이지. 그러나 닿는 모든 것을 부순다. 붓을 쥘 수 없고, 차를 따를 수 없고,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없지.”

진사현이 왼손을 들어 자신의 손등을 똑바로 내려다봤다. 붓자루를 쥐며 굳은 중지의 굳은살. 스승이 마지막으로 잡아주었던 손목.

“이제 알겠느냐. 네놈 스승이 왜 마지막 하루를 넘지 못했는지.”

철면노괴가 작게 기침했다. 가슴에 난 굵은 칼자국이 숨결에 따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네 스승은 그걸 읽었다. 마지막 장을 열기 직전에 깨달은 거다. 복수는 할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등졌다.”

“제자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게 복수보다 쉬웠겠지.”

말투에는 경멸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 경멸은 묘하게 무뎌져 있었다. 누군가를 비웃을 때보다, 누군가를 시험할 때와 더 가까운 말투였다.

진사현이 천천히 천 조각을 접어 세 번 만에 네모반듯하게 만든 뒤 품 안에 넣었다.

“그게 전부라면.”

철면노괴가 눈을 깜빡였다.

“그게 전부라면, 들었다.”

“들었다는 게 뭐냐.”

“경고.”

진사현이 검자루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복수 이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경고. 내 팔이 부서질 거라는 경고.”

위소월이 눈을 크게 떴다.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진사현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막았다. 말리려는 동작이 아니었다. 이미 자신의 답을 정했다는 고지였다.

“복수는 내가 선택한 적이 없다고 했다.”

진사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위소월은 그걸 보았다. 분노도 결의도 아닌, 그보다 더 깊고 조용한 것.

“나도 안다. 그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걸.”

철면노괴가 침묵했다.

“그래도 해야 한다. 그게 복수의 정의다.”

진사현이 고개를 들고 백내장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인간의 팔을 버리겠다. 움켜쥐지 못할 미래는 필요 없다.”

“단언하는군.”

“망설일 일이 아니다.”

철면노괴가 뒤로 물러섰다. 이번에도 미끄러지듯 움직이자, 바위가 갈라지며 좁은 통로가 노인의 등 뒤에서 입을 벌렸다. 통로 안쪽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수련실이다.”

노인이 오른쪽 벽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돌이 울리며 안쪽에서 바람이 새어 나왔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이 진사현의 뺨을 스쳤다.

“밖에서 열 수 없다. 안에서 열지 않으면 나도 열 수 없다.”

“고립.”

“폐관의 본질이다.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어야 한다.”

위소월이 단도를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이 자루를 오르내리는 소리가 동굴 안에서 부자연스럽게 증폭됐다.

“당신은.”

철면노괴가 위소월을 바라봤다. 시선이 닿자 위소월의 손이 멈췄다.

“밖에서 기다리게나. 아가씨.”

“저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자의 몫이야.”

진사현이 통로를 향해 걸었다. 발걸음 하나에 위소월의 눈이 따라붙었다.

통로 입구에서 멈췄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위소월.”

“……예.”

“밖에 있어라.”

“하지만……”

“내가 나갈 수 없는 곳이면, 네가 밖에서 기다리는 게 옳다.”

위소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입술이 창백하게 눌렸다.

“돌아오실 거죠?”

진사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집을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철면노괴가 입구 옆으로 비켜서자 소매가 스치며 바위에 먼지가 일었다.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묻지.”

“……하나만 더.”

“비급은 네놈 스승의 유품이다. 그런데도 나에게 배우려는 이유가 뭐냐.”

잠시 침묵이 있었다.

“스승은 마지막 장을 보지 못했다.”

진사현의 목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울렸다.

“당신은 봤다.”

“그래서?”

“스승을 넘으려는 게 아니다. 스승이 보지 못한 길을 걸으려는 거다.”

철면노괴가 웃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라. 시간은 네놈의 몫이다.”

진사현이 통로로 한 걸음 내디뎠다. 암흑이 그를 삼켰다. 발소리가 한 번, 두 번, 세 번 울렸다가 멎었다.

어둠 속에서 등지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시작하겠다.”

철면노괴가 벽면의 돌기를 누르자 돌문이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무겁고 느렸다. 마치 심장이 뛰는 간격과 똑같았다.

돌문이 완전히 닫혔다.

위소월은 멈춰 서 있었다. 두 손이 주먹을 쥐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손바닥에 파고드는 손톱의 감각만 선명했다.

철면노괴가 벽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았다. 호흡이 느려지며 동굴 전체의 기운도 잦아들었다.

주먹을 쥔 채 위소월은 돌문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혈사문의 마지막 밤5화